必死 筆寫

백색 공간/ 안희연

시치 2019. 7. 19. 20:07


백색 공간/ 안희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지독한 폭설이었다고

털썩 바닥에 쓰러져 온기를 청하다가도

다시 진흙투성이로 돌아와

유리창을 부수며 소리친다

"왜 당신은 행복한 생각을 할 줄 모릅니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

 

* 안희연 : 1986년 경기 성남 출생. 서울여대 중문학과 졸업. 명지대 문창과 박사 수료. 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이 있다.

 


 

안희연의 시는 소멸과 몰락이 동시에 진행되는 어두운 세계의 삶 속에서 쓰여진다. 소멸하는 것은 그녀의 세계며 몰락하는 것은 그녀를 그녀이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소멸과 몰락의 세계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어두운 세계에는 폭력과 불의 혹은 지배논리와 구조적 모순이라는 근원적인 부정성에 편입되어버린 세계를 의미하는 바 그녀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 자체다. 그녀의 시가 실종된 삶과 삶 자체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그녀의 시편들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존재방식 일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희연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단 한 권의 시집을 갖고 싶어 한다. 언어로 쓰여 졌지만 쓰여지지 않은 시의 원형질의 시편으로 된 시집은 그녀의 로망이다. 그걸 위해서 밤마다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 새로운 시어들을 고르는 것이다.

 

김윤배 시인

 

 

“공간보다는 시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인 것 같아요. 시집에 나온 대부분의 장소는 실재하지 않거나 실재하더라도 가본 적 없는 공간이거든요. ‘백색 공간’이라는 것도 범박하게 말하면 ‘백지’인 거죠. 세 편의 「백색 공간」이라는 시는 전부 저의 시 쓰기나 ‘어떻게 살지?’라는 질문을 품고 썼던 시예요. 시가 뭘까 하는 생각을 평소에 하다 보면 ‘데려다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은 계속 바뀌겠지요.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몸은 여기에 있으니 못 가는 곳을 상상으로 가 닿는 것, 나를 데려다 주는 것이 시라고 생각해요. 「백색 공간」도 보면 계속 어딘가로 가거나 진행하거나 앞을 보고 달려 나가고 먼 곳으로 계속 가려고 하는 이야기 같아요. 실재하지 않은 허황된 공간이지만 제 마음 속에 있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안희연 / YES24 채널예스 2015.10.23 대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