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한 파동 (외 1편)
신철규
나는 무지개예요,
하나의 색이 언제나 모자란.
잔디밭 바다 하늘 숲
그리고 노을 태양
그 모든 일렁임이 무지개를 만들어요.
치유될 수 없는 삶이
온도가 다른 목소리들이
농도가 다른 색들이
카멜레온처럼 두근거리고 있어요.
멍든 색들이 얼룩이 되어 지워지지 않아요.
이 어긋난 합창이 들리나요?
나는 물결이에요,
날카로운 칼을 품은.
짙푸른 바다에 떠 있는 산호섬처럼 나는 흔들려요.
조각난 문서들
덧댐과 고침의 기록들
덧칠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 약속들
활자가 가득한 종이를 구겨서 물에 집어넣었다가 건져 내면
잿빛 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물결물결물결
빛을 받은 연두와 빛을 삼킨 진초록
잎의 앞면과 뒷면처럼 나는 팔랑거려요.
물결물결
발목을 스쳐 가는 가장 낮은 바람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들
이 납작한 파동이 느껴지나요?
검은 산책
여기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금지 표지판과 짙은 안개를 뚫고
이제는 꺼져 버린 양초를 들고 거리를 나섭니다.
우리는 가시철망과 불에 탄 나무들이 둘러싼 구멍 주위에 모여 있습니다.
검은 호수와 같은 구멍에는 달이 뜨고 별이 반짝입니다.
하늘에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검은 새들,
지상에는 기울어진 나무들,
멀리 바벨탑이 희미하게 서 있는 곳으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구멍 안입니까, 바깥입니까.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이 걸어옵니다.
달도 별도 없는 공중을 바라보며
우리는 불붙은 뗏목을 타고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흘러내리는 촛농처럼 졸음이 쏟아집니다.
긴 뿔을 단 사슴이 뾰족한 풀을 뜯고 있고
새들은 날개를 몸에 붙이고 바닥에 뒹굴고 있습니다.
자, 이제 밧줄을 내려요.
잘린 손목들을 이어 붙여요.
저기 저 흐린 빛이 흘러나오는 구멍 속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음화 속으로,
모든 것을 뱉어 내는 양화 속으로.
여기로 오세요.
검은 산책은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계간 《문학들》 2018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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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 1980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조선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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