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새/ 이정록

시치 2018. 11. 22. 20:18

새/ 이정록  ㅡ아버지학교 9


숫눈이 내렸구나.
마당 좀 봐라.
아직 녹지 않은 흰 줄 보이지?
빨랫줄 그늘 자리다. 저 빨랫줄도 그늘이 있는 거다.
바지랑대 그림자도 자두나무처럼 자랐구나.
아기 주먹만한 흰 새 다섯 마리는, 빨래집게 그림자구나.
햇살 받으면 새도 날아가겠지. 젖은 자리도 흔적 없겠지.
저 흰 그늘, 혼자만 녹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리는 시린 것,
가슴의 성에로 쌓이는 저 아린 것, 조런 실타래가 엉켜서
마음이 되는 거다. 빨래집게처럼 움켜잡으려던 이름도
미음처럼 묽어짐을, 고삭부리* 되고서야 깨닫는구나.
그리움도 설움도 다 녹는 거구나. 저리고 아린 가슴팍이
눈송이로 뭉친 새의 둥우리였구나.
깃털 하나 남지 않은 마당 좀 보아라.
약봉지 같은 햇살 좀 봐라.


* 고삭부리 : 몸이 약해서 늘 병치레하는 사람.

시집아버지학교(열림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