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살인은 연애처럼 연애는 살인처럼*/강성은

시치 2018. 11. 8. 08:05

살인은 연애처럼 연애는 살인처럼*/강성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야 누군가 길에 내놓은 의자는 목이 긴 여자처럼 혼자 서 있다 골목을 돌면 또다른 골목이 나타나고 나는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상점의 유리를 쳐다본다 투명하고 희미하게 우리는 닮아 있어 너는 잠든 내 얼굴을 쳐다보기도 하는 것일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야 창백한 인형들이 줄지어 약국으로 들어간다 검은 새들이 유리문을 쪼아댄다 어둠이 이 거리를 우주 저 먼 시간으로 옮겨놓을 때까지
 
  너를 읽다가 너를 베고 누웠다 눈을 뜨고 감는 사이 어쩌면 이것은 우아한 카니발리즘의 세계 내가 너를 씹어먹고 네가 나를 흡수하고 서서히 가늘고 희미해져가고 말라가고 뼈만 남는다 우리는 가장 가벼운 책이 되고 싶었지만 바람이 불면 한 장씩 날아가 침묵에 이르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다 낮잠에서 문득 깨어나 팔을 깨물어본다 좀비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꿈의 어떤 장면에서는 비가 내리고 나는 우산도 없이 달린다 어떤 사람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한 가지의 인상으로 존재할 것이다 나는 달린다 뼈들이 부딪혀 경쾌한 소리를 낸다 한밤중에 내리는 빗소리처럼
 
 

 *트뤼포가 히치콕의 영화에 대해 한 말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2009, pp.4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