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어항 (외 2편)/김 륭
임산부처럼 앉아 있다 그 남자 가끔씩 물고기 눈을 감겨 줄 수 있는 음악이나 만들면서 지나간 잠은, 검은 모래로 만든 어항
당신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밤이 있었다 그냥, 그냥이라는 말이 좋아서 당신이라면 내가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내 기억을 키우고 있을 것 같아서 아무도 몰래
사랑은 언제나 맞은 적도 없었지만 틀린 적도 없었다
돌멩이를 던지면 동그랗게 태어나는 어항, 내가 사랑한 사람은 당신이지만 당신이 사랑한 사람은 내가 아닌데도 하나의 어항 속에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야 세상의 전부가 되는 걸까
세상의 반은 어둠이어서 물로 뛰어들어 눈을 씻는 달, 검은 기억 속을 길게 빠져나오는 몸 이야기, 잊어버린 마음이 아파 어두워진 어항, 내 잠마저 모래시계처럼 옮겨 갔을까
기억은 검은 노래도 불러 준다 물고기가 눈을 감고 따라 부르는 노래, 같이 살았어야 했는데 같이 살아야 하는데, 단 한 번만이라도 물고기를 키우는 임산부처럼 앉아서
같이 살 수 있을까
식물 K
머릿속에 살던 짐승들이 염소를 따라 가슴까지 내려와 죽었습니다
손에 숨을 쥐고 그러니까 꽃 대신 뱀을 쥐고 나는 지금 누워 있다, 는 문장으로 수습(收拾)된 사람
당신은 내게서 꺼낼 수 있는 짐승들이 몇 마리나 남았을까 궁금해 하지만 그것은 내 죽은 숨들을 발밑에 심는 일, 봄이다 내 피가 내 몸을 돌아다니다 흙을 묻히듯 그렇게 봄은 까마득히 무덤 위에 올려놓은 뗏장처럼 간신히 숨만 붙은 노동이 되고 종교가 되고
삐걱거리는 침대는 나를 비루하고 지루하게 살아낸 몇 마리 짐승들의 딱딱한 기억, 입 안의 울음들이 그랬듯이, 갔어요, 방금 출발했다니까요 퉁퉁 면이 불어터진 우리 동네 중국집 주인장 말씀을 따라
마침내 나는, 나를 떠나 나를 끓어오르려는 숨의 임계 너머로 두 발을 녹일 수 있게 된다 너무 일찍 출발했거나 너무 늦게 도착했거나 목숨이란 게 슬그머니 문밖에 내다놓은 자장면 빈 그릇 같아서
집으로 가자, 고 말하지 않는 식물들 사이 숨이 자꾸 흘러 흙이 붙은 뿌리째 떠낸 비곗덩어리처럼 나는, 내 몸을 따로 흘러 내가 없고 아내도 없고, 하늘을 흘러내린 썩은 동아줄에 딸 하나 가만히 묶여 있고
누워 있다, 는 단 하나의 문장 위로 바람 간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의자와 염소가 하늘을 뒤집어 입는 저녁 바지가 가슴까지 올라가 죽었습니다
원숭이의 원숭이
뚱뚱하고 키 작은 남자 혹은 목이 긴 여자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고 예기치 못한 일은 발생한다 나무에서 내려오는 법을 먼저 배웠으므로, 새를 쓸 줄 모른다 머릿속이 너무 식어 버린 까닭에 두 손을 울음으로 말아 사용하는 일은 없지만 자꾸 꼬이는 두 발로 바람을 뒤적뒤적 글을 날려 보내려는 동작이 많고 의자와 친한데, 이따금 하늘을 떠가는 비행기들이 자신들의 연애에 끼어들거나 침대 사이즈를 간섭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는 그렇게 걸음을 재촉했고 누구보다 빨리 달렸고 나무에 올라타 매미들의 뜨거운 울음 속으로 목을 집어넣고 자음과 모음을 물고 나오던 어느 날, 다음 일이 발생하였다 나무의 최초를 껴안아 본 인간의 낡은 가방 속에서 비행기 한 대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는 원숭이의 긴 팔 하나를 나뭇가지처럼 뚝, 꺾어 자신의 화분에 심었다 나무가 나무에서 내려오게 하는 법을 아직도 배우지 못했으므로, 그는 구름마저 쓸 줄 모르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인간의 일부가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따금 시골 할머니 집 암탉을 모자처럼 푹 눌러쓰고 속삭인다 비행기가 땅에서 살도록 살살 달래기 시작한다
⸺시집 『원숭이의 원숭이』 (2018. 4)에서 ---------- 김륭 / 1961년 진주 출생. 2007년 〈문화일보〉신춘문예 시, 〈강원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원숭이의 원숭이』, 동시집『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별에 다녀왔습니다』『엄마의 법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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