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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관한 시 모음

시치 2017. 11. 10. 11:53

의자에 관한 시 모음

 

의자 / 조병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오는 어린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드리겠습니다

 

 

 

식당의자

 

문인수

 

   장맛비 속에, 수성못 유원지 도로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플

라스틱 의자 하나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있다. 뼈만 남아 덜거덕거

리던 소리도 비에 씻겼는지 없다. 부산하게 끌려 다니지 않으니, 앙

상한 다리 네 개가 이제 또렷하게 보인다.

 

  털도 없고 짖지도 않는 저 의자, 꼬리치며 펄쩍 뛰어오르거나 슬

슬 기지도 않는 저 의자, 오히려 잠잠 백합 핀 것 같다. 오랜 충복을

부를 때처럼 마땅한 이름 하나 별도로 붙여주고 싶은 저 의자, 속을

다 파낸 걸까, 비 맞아도 일절 구시렁거리지 않는다. 상당기간 실로

모처럼 편안한, 등받이며 팔걸이가 있는 저 의자,

 

  여름의 엉덩일까, 꽉 찬 먹구름이 무지근하게 내 마음을 자꾸 뭉게

뭉게 뭉갠다. 생활이 그렇다. 나도 요즘 휴가에 대해 이런 저런 궁리

중이다. 이 몸 요가처럼 비틀어 날개를 펼쳐낸 저 의자,

 

   젖어도 젖을 일 없는 전문가, 의자가 쉬고 있다.

* 제7회 미당문학상 수상작



 

비 맞는 의자

 

배 한 봉

 

나무 의자가 비에 젖는다 어제도 오늘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4개의 다리는 땅에

생각을 뿌리 내리고 있다.

심연에 연꽃이 피고

연꽃은 모든 괴로움 속에서도 실로 청정하다.

나는 지금 의자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낡으면서 완성되는 

의자.

아니, 꽃의 사색.

 

* 시집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문학의전당, 2006

 

 

 

의자

 

 

 

김명인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

서성거려온 내 몸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때로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어둠을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마른장마에 잔 비 뿌리다 마는 오늘

어느새 다 자란 저 벼들을 보면

들판의 주인은 바람인가,

온 다리가 휘청거리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는 것은

그 무게로 벼를 익히는 것이라 깨닫는다

흔들리는 생각이 저절로 무거워져

의자를 이마 높이로 받들고 싶어질 때

저쪽 구산 자락은 훨씬 이전부터 정지의 자세로

지그시 뒷발을 내리고 파도를 등에 업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네가

네번째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 한낮인데 부지런한

낮닭이 어디선가 길게 또 운다

아무도 없는데 무엇인가 내 어깨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힘겹게 흔들린다

 * 시집-<길의 침묵> 중에서

 

 

 

 

+ 의자

앉아 있는 사람의 몸 아래에
어느새 먼저 와서
앉아 있는 사람

의자는 먼 곳에서 쉼 없는 네 발로
삐걱삐걱 걸어 여기 왔다

의자의 이데아는,
마르고 다정하고 아픈 몸을 한
늙은 신일 것이다
(이영광·시인, 1965-)


+ 의자

너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지 않으면
둥기둥기 무등을 태우며 즐거워하고,
눈길 한번 마주친 적 없는데도
언제나 너는 샅샅이 내 몸을 안다.

서지도 눕지도 않고 밤낮을 앉아서
삐걱삐걱 요람을 흔드는 따뜻한 손길,
아가의 언어를 알아듣는 어미처럼
언제나 너는 깊숙이 내 맘을 안다.
(유용선·시인, 1967-)


+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교사 시인, 1964-)


+ 빈 의자

조금 힘들면
쉬었다 갈 수 있는
빈 의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무 말 없이
당신의 휴식을 도와 줄
그런,
편안함이었으면 싶습니다

내 마음이
여유로운 공간으로 남아

그대
잠시라도 머물러
새로운 희망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고 싶습니다

당신을 위한
빈 의자
(최원정·시인, 1958-)


+ 흔들의자에 앉아

어머니의
흔들의자에 앉아
저만치 세상을
내려다본다

더 이상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병든 손과 굽어진
허리가 되어

만지고픈 아이들
웃음소리와 종일
휘청이는 그네를
바라보거나

더 이상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주름진 이마와
어눌한 발음이 되어

한 번쯤은
노래하고 싶었던
그리운 이름도
읊조려 본다

어머니의
흔들의자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느니

인생이란 한나절
빠르게 피었다 지는
한 송이 꽃과도 같아

뼈가 불거진 손바닥
위엔 너를 위해 밝혔던
작은 촛불 뿐,

어머니의
흔들의자에 앉으면
아무것도 내게
남을 것 없다
(홍수희·시인)


+ 나무 의자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생각에 빠진다

어느 숲 속의
나무였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몇 번이나 지냈을까

어느 새가 날아와 앉아
울고 갔을까
어떤 짐승이 보금자리를
틀고 싶어했을까

나무는 자라가면서
무엇들을 바라보았을까
나무는 여름날 그늘을
잘 만들어 주었을 텐데

목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만들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의자에 피곤을 기대고 앉아
잠이 들어버렸다

꿈길에서 큰 나무를 만났다
(용혜원·목사 시인, 1952-)


+ 한 그루 의자

태어나서 한번도 두 발로 걸어보지 못했다
다리가 넷이라는 것이 불행의 이유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는 앉아 있다
그가 누구를 앉힐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을 누구보다 잘하기 때문,
그는 앉은 채 눕고 앉은 채 걷는다
혹은 앉은 채 훨훨 날고 있을 때도 있다
그를 오래 보고 있으면
조금씩 피가 식고 눈은 밝아져
그가 입을 열 때까지 하냥 기다릴 수도 있다
스물 여섯 도막의 통나무가 한 그루 의자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못에 찔려야 했는지,
그 굳어가는 팔다리 속에 잉잉거리는 게 무엇인지.
그러나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알 것만 같다
며칠 전부터 상처를 들락거리며
날벌레가 슬어놓고 간 알들을 깨우려고
햇빛은 자꾸만 그의 등뒤로 와서 내리쬐는 것이었다
한 그루 나무에게 그렇게 하듯이
(나희덕·시인, 1966-)


+ 사진관 의자

참 이상한 곳에 놓인 의자군,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기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졸지 않고
아무도 이 의자에 앉아 창 밖
지나가는 차 바라보지 않네
참 적막한 곳에 놓인 의자
외톨박이 의자군, 오늘도
혼자뿐인 의자 단 한번도
엉덩이가 따뜻해져본 적이 없는 의자
누구랑 마주 앉아서
얘기를 하나, 얘기를 듣나
오늘도 검은 커튼 뒤에 앉아
혼잣말만 하는 의자
독백의 의자 그래도 조용하고
단정한 의자군, 진짜보다 더
예쁜 가짜 꽃바구니 두어 개
제 곁에 갖다놓고 누구는
이 의자 한가운데 앉아
돌사진, 독사진을 찍고
누구는 졸업사진, 영정사진을 찍고
나는 또 새 이력서에 붙일
굳은 표정의 증명사진 몇 장을 찍네
시선이 없는 내 청춘의
무표정 몇 장을 남기네
(유홍준·시인, 1962-)


+ 오래된 의자

생각이 삐그덕 움직이자
쇠못 하나가 겨드랑이에서
쑥 빠져 나옵니다
망치로
빠져 나온 쇠못을 박아 넣자
등받이가 왼쪽으로
기울어 버립니다

어렸을 때 동생과 그 위에서
마구 뛰고 싸우고 던지고
온갖 까탈을 부려도
묵묵히 다 받아준 의자
언제고 필요하면
아무생각 없이 털썩 앉곤 했는데

기울어진 의자를 바라보니
어깨가 시큰거리며
풍 맞아 기우뚱해진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오래 됐다고
망치로 이리저리 내리치다
안되면 버리려고 하다니

이번엔 아무리 돈이 들어도
의자를 제대로
고쳐야겠습니다
(신미균·시인, 1955-)


+ 낡은 의자

그는 길바닥에 엎어져 비까지 맞고 있었다.
세월의 때를 입히며 십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던
그가 분해되지 않은 채 버려진 주검이 되었다,
딱딱해진 정물 속에 군데군데 상처난 흔적이 깊다

그의 모습에 나를 얹어 본다.
온기 다 빠져나간 집안에 찍혀있는 고단했던 삶의 발자국들.
이젠 쉬어야겠다고 거칠어진 손 거두려 하니,
퇴물이 되어 버려질 시간들이 거기에 있다.
(목필균·시인)


+ 낡은 의자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김기택·시인, 1957-)


+ 삐걱대는 의자야, 너도

변두리 포장마차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빗방울 소리

마음의 안쪽으로
파고드는
그 소리의 끝을 따라갈 수 없어
우동 먹으러 왔다가 죄 없는 술잔만 비우는데요

마흔 살의 허기,
공복의 찬 속을 확, 확, 불지르는
소주 맛 같은
그런 여자 하나 만났으면 싶은데요

세상도 좀 알고
남자도 좀 아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도 뗄 줄 아는
여자의
휘어질 땐 휘어지고 감을 땐 착착 감는
뽕짝 노래 속으로 들어가,
슬쩍, 손만 대도 젖어드는 몸 속으로 들어가, 들어가
한 사나흘
젓갈처럼 푹 삭았으면 싶은데요, 그런데요

-니에미, 삐걱대는 의자여, 너도 한 잔 해라
(전동균·시인, 1962-)


+ 빈 의자

신경통 앓고
관절염으로 삐그덕거리는 의자가
길 모롱이에서 동면에 빠져있다

든든한 다리가 있어
산도 오르고 강도 건너던 안락의자

젊음으로 버티던 생의 안식도
서서히 황혼처럼 기울어지고
좀 먹은 가구처럼 속이 얇아진 채
동구 밖을 지키는 의자가 되어
땅과 하늘만 쳐다본다

터벅터벅 오실 분도 없는데
누구를 기다리나
한때는 남의 앉을 자리가 되어
푹신한 안락을 주었었는데

세월이 삐그덕하는 사이에
움직이는 종합병원 신세가 되어
긴 한숨만 몰아쉬고 있는 빈 의자

시간의 낭떠러지에서
세월을 붙잡고 한탄한들 무엇하랴
(반기룡·시인)


+ 나는 작은 의자이고 싶습니다

나는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 그 아래
작은 의자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치고 곤하여 의기소침해 있는 날
내가 당신에게 편한 휴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아무런 부담 없이 왔다가
당신이 자그마한 여유라도 안고 갈 수 있도록
더 없는 편안함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분노의 감정을 안고 와서
누군가를 실컷 원망하고 있다면
내가 당신의 그 원망을 다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분노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간혹 당신이 기쁨에 들떠 환한 웃음으로 찾아와서
그토록 세상을 다 가져 버린 듯 이야기한다면
내가 당신의 그 즐거움을 다 담아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내
미소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비가 억수로 쏟아져
당신이 나를 찾아 주지 못할 땐
내가 먼발치서 당신을 그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무슨 이유로 당신이 한동안 나를 찾아오지 못할 땐
내가 애타게 당신을 걱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한참 뒤에나 내게 나타나게 되거든
한결 가벼운 몸짓으로 내게 이르렀으면 좋겠습니다

또 언젠가 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희미해져
당신이 영영 나를 찾아 주지 않는다 해도

정녕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한 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당신이 내 안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준호·시인)

 

 

의자의 얼굴


고은희



땡볕이 그늘을 끌고 모퉁이 돌아간 곳
누군가 내다버린 꽃무늬 애기 의자에
가난을 두르고 앉아
졸고 있는 할아버지

무거운 세월 이고 허리 펴는 외로움이
털어도 끈끈이처럼 온 몸에 달라붙어
허기진 세상은 온통
말줄임표로 갇혀 있다

살다 떠난 얼룩만이 가슴깊이 내려앉은
폐기물 딱지조차 못 붙이는 그 몸피여!
사는 건 먼지 수북한
그리움 또
견디는 것

오늘도 먼 길 돌아 헤살 떠는 한줄기 바람
먼저 간 할머니 손길 덤으로 묻어온 듯
그 옆에 폐타이어도
슬그머니 이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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