必死 筆寫

모래/임솔아

시치 2017. 3. 29. 22:34

          모래/임솔아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떨어지라고 응원해주었다.
 
 내가 키우는 담쟁이가 몇 개의 잎을 가지고 있는지
 처음으로 세어보았다. 담쟁이를 따라 숫자가 뒤엉켰고 나는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술래는 숨은 아이를 궁금해하고
 숨은 아이는 술래를 궁금해했지. 나는
 궁금함을 앓고 있다.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
 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
 
 오늘은 세상에 없는 국가의 국기를 그렸다.
 나만 그걸 그릴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벌거벗은 돼지 인형에게 양말을 벗어 신겼다.
 돼지에 비해 나는 두 발이 부족했다.
 
 빌딩 꼭대기에서 깜박거리는 빨간 점을
 마주 보면 눈을 깜박이게 된다.
 깜박인다는 걸 잊는 방법을 잊어버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인가.
 
 
       -현대문학 201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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