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장미 (외 2편)/ 이기영
쇄골이 살짝, 드러난 붉은 장미
손끝과 발끝에 힘을 준 채 코끝을 집중시키면
발가락의 진동이 머리끝까지 요동치다가
입술에 닿게 되지
아찔하게,
그때 흔들리는 건 반쯤 잠긴 현기증이 아닐까
잠시 의심하는 사이
이건 은유일까, 다시
어둠이 더 깊은 어둠을 업고
붉은 꽃잎은 더 붉은 꽃잎을 얹고
향기가 더 짙은 향기를 안고
긴 목으로도 닿을 수 없는 거리(距離)에서
가시는 왜 더 맹랑해질까
다시
머나먼 이름, 지난날의 장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Buena vista social club)
오래된 악사들과 귀에 익은 재즈와
시끌벅적한 서른아홉 체 게바라와 스물일곱 이상이 있다
부르주아적 시가를 피우는 이상과 노동자의 술 모히또를 마시는 체 게바라
절인 청새치와 코히마르 해변에 뜬 붉은 달을 말하면
어린 연인들의 앳된 입술과 꼬치니로(cochinillo)에 대해 입맛을 다신다
혁명은 주방장이 추천한 오늘의 아기 통돼지 바비큐보다 못하고
달아나지 못한 열세 명의 아해들은
가난한 생일 파티가 열리고 있는 마술사의 입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더부룩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불금이라 선언하고
눈이 너무 부시다고 선글라스를 껴야 한다고
봉고, 바따, 체께라, 마라까스가 찬찬(chan chan)을 연주한다
—나는 알토 쎄드로에서 마르카네로 가고 쿠에토에 도착한 후에는 마야리로 가
인생에 흐르는 힘 어쩔 수 없다네*
시인도 못 되고 내일의 혁명가는 오늘의 혁명을 모르는
불온한 승객들은 이 밤 또 어디로 다 흘러가나
그와 그가 감쪽같이 사라진 오, 쿠바!
* '찬찬'의 노래 가사 중에서.
노이즈 (noise)
몇 번씩 끝나가는 연애에도 잔인하게 밝은 달
끝내, 오지 않는 밤
시간의 귓볼을 생각하고
귓볼은 입술을 생각하고
입술은 애무를 생각하고, 생각하고
멈출 수 없는 몸의 절실한 신호를 생각하다
붉어진 뺨이라든가 끈적끈적한 소리로도 덮을 수 없는
변덕스런 거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뒤돌아선 당신 머리카락 하나가
달 속으로 계속 뻗어가기 때문이지
라디오를 켤 수 있는 자정은 참 편리하지
당신을 찾는 주파수가 계속되고
지지직거리는 신호음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더 이상 깊어지지 않는 어둠
더 이상 오지 않는 잠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노래
몇 번씩 다시 시작하는 이별에도 다정하게 지는 달
밤의 허기를 생각하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밤의 억장을 생각하다 오지 않는
답답한 신호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나는 여전히 불협화음 앞에 서 있고
—시집『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2016. 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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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 1958년 전남 순천 출생.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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