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용의자
#천변여관
삭제. 나는 지우는 자이다.
#낡은 욕실
이빨을 닦을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거울. 그 순간 나는 유일하게 이빨에 사로잡힌 자. 나는 어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지나치게 집요하다. 누군가 내게 완고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려준다면. 나는 복종하는 자의 평화와 더불어. 그러나 오늘은 약간 어지러운 아침.
#산동반점
알리바이를 위해 당신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당신을 만나자 나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여전히 내 앞의 당신은 나를 의심하지 않고. 그것은 일종의 습관이다. 나의 행방은 일간스포츠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YTN의 머나먼 소문 속으로 사라진다. 때로는 담배 연기 속으로.
#거리
담배와 신문을 사야 한다. 습관의 내부를 관찰할 것. 완벽하게 나를 은닉할 수 있는 그곳.
#담배와 신문
나를 의심하는 자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편의점의 여자를, 가판대의 사내를, 유심히 관찰한다. 그 표정이 나를 영원히 삭제하는 순간이 있다. 변화는 아주 미세하다. 그때를 기다려 나는 편의점과 가판대를 떠난다. 삭제된 것들이 내 뒤를 추적하지만, 나는 슬쩍 몸을 돌려 골목으로.
#내발산동
증거인멸을 위해 몸을 바꾸는 낮과 밤. 아직 모든 것은 혐의일 뿐. 그렇다. 나의 우울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지겨워.
#황혼
그러므로 이상한 동감의 순간이 있다. 지금 누군가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황혼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나는 당황한다. 방금 스쳐온 골목길의 그림자, 그것이 당신이라면. 다시 말하지만 나는 황혼을 통해 내게 건너온 당신과 무관한 자. 황혼이란 아주 사소한 우연일 뿐.
#방백, 혹은 삼성 파브
결국 나는 길가의 돌. 나는 극도로 천천히 발견될 것이다. 우연히 발에 치여 당신의 눈앞에 그 사소한 전모를 드러낸다는 것. 쇼윈도우에 진열된 삼성파브,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화면이 스프링복의 뿔을 클로즈업하는 순간, 뿔의 배경으로 보이면서 보이지 않게 이동하는 초원의 태양.
(『문학과사회』 2003년 봄호)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골목, 이라는 발음을 반복하자 서서히 골목이 사라진다. 골목이, 골목이, 골목이, 골목이, 사라진다. 하지만 창밖에 골목이 있다. 냉장고를 열고 우유팩을 꺼낸다. 내일은 선거일이다. 유통 기한이 지난 날짜가 찍혀 있다.
하지만 음악은 발라드. 시인 오장환이 "백석은 모던 보이"라고 적어 놓은 글을 읽었다. 통장에 입금된 아르바이트 급여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국민은행으로. 내일은 선거일이다. 백석은 모던 보이,
나는 아직 과부하 상태인지도 모른다. 소실점을 향해 맹렬히 사라지는 롤러블레이드들. 골목이, 골목은, 골목과, 결국 골목을…… 나는 골목을 걸어간다. 인터넷 카페의 초기 화면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육(肉)에서 나온 것은 육(肉)이며, 영(靈)에서 나온 것은 영(靈)이다."(요한 3: 6)
한때 혁명가였던, 아직 혁명가인지도 모르는, 컴퓨터 수리점 사장 김(金)을 먼발치로 발견하고, 나는 다른 골목을 택해 걷는다. 골목이, 골목을, 골목과, 결국 골목은…… 그는 나를 로맨틱한 동물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지만, 그 날 밤 동해로 떠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아파트 신축 현장의 모래 바람이 골목을 휩쓸고 지나갈 때, 일당제 인부의 흰 모자에서 클로즈업되는 '안전 제일'. 백석은 모던 보이가 아니다. 통장에 아르바이트 급여는 찍히지 않는다. 눈을 가늘게 뜨면, 서서히 떠오르는 것들. 가령 골목은, 골목과, 골목에, 골목의…… 도레미레코드점에서 울리는 음악은 발라드.
나는 육(肉)이며 영(靈)으로서 기한이 지난 골목을 통과한다. 내일은 선거일이다. 국민은행의 간판에 앉았다가 날아오르는 까치 몇 마리. 내가 걸어가는 골목을, 골목의, 골목에서, 골목을 향해, 어느 먼 하늘 쪽으로부터 점점이, 명백한 자세로 밀려오는 동해의 파도.
(『문학과사회』 2003년 봄호)
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 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 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문학사상』 2003년 3월호)
태양의 지식
나뭇잎 하나가 제 그림자를 서서히 넓히며 着地하자
그림자는 뒤늦게, 사라진다.
벤치에 누운 사내의 표정이 그림자를 따라 문득 지워지고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내부에 잠복해 있던 고요가
누설되고
나는 어느덧 사내의 표정에 갇힌다. 그의 곁에서,
'필림 있슴'이라고 적힌 채 나부끼는 깃발.
사내의 표정이 태양을 정면으로
인화하려는 듯 신중하게 움직인다.
제발 뭔가 찍어 봐,
환한 빛으로 가득한 그 텅 빈 인화지 속에서
나는 안 보이는 태양을 찾아 헤맨다.
거대한 건물이
그의 잠과 태양의 사이에 일어나고
때로 황혼에 젖은 잠 속을 횡단하는 오토바이.
사라진 것들은 모두 그의 공원에 들러
김치, 하며 웃어본 적이 있지.
하지만 태양의 지식은 떠오르고 지는 것뿐.
나는 사내의 각도로 누워
그의 잠에서 저무는 태양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을
약간 피로한 눈으로
추적하는 중.
(『시안』 2003년 봄호)
사물들과의 이별
내 잠 속의 먼 곳에 내리는 비. 이것은 내리는 비와 더불어 걷는 꿈속의 피크닉. 손 뻗으면 만져지던 그대들로부터 나는 머나먼 곳으로. 비와 음악의 숲을 지나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라고는 중얼거리지 않는 이 희망의 나라에서.
천천히 삭제되는 내 더운 몸. 에네르기가 떨어진 아톰처럼 애수에 젖은 자명종이, 낮고 길게 울리는 이 모호한 경계에. 서서히 잦아드는 빗속에서 나는 인사를. 멀어지는 당신께 인사를. 나는 손을 내밀어 당신의 명료한 손을. 지표면을 떠나며 모든 것을 흔드는, 저기 저 비 온 뒤 아지랑이.
(『시작』 200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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