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 외 /김사인
이것으로 올해도 작별이구나.
풀들도 주섬주섬 좌판을 거두는 외진 길옆 어린 연둣빛 귀뚜리 하나를(생후 며칠이나) 늙은 거미가 온 힘을 다해 끌고 간다. 가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아직 산놈이면 봐주는 게 어떻겠는가, 하자 한사코 죽은 놈이라 우긴다.
놓지 않는다.
미안한 일
개구리 한 마리가 가부좌하고 눈을 부라리며 상체를 내 쪽으로 쑥 내밀고 울대를 꿀럭거린다.
뭐라고 성을 내며 따지는 게 틀림 없는데
둔해 알아먹지 못하고 나는 뒷목만 긁는다 눈만 꿈벅거린다 늙은 두꺼비처럼
보살
그냥 그 곁에만 있으믄 배도 안 고프고, 몇날을 나도 힘도 안 들고, 잠도 안 오고 팔다리도 개뿐혀요. 그저 좋아 자꾸 콧노래가 난다요. 숟가락 건네주다 손만 한번 닿아도 온몸 이 다 짜르르허요. 잘 있는 신발이라도 다시 놓아주고 싶고, 양말도 한번 더 빨아놓고 싶고, 흐트러진 뒷머리칼 몇올도 바로 해주고 싶어 애가 씌인다요. 거기가 고개를 숙이고만 가도, 뭔 일이 있는가 가슴이 철렁허요. 좀 웃는가 싶으면, 세상이 봄날같이 환해져라우, 그길로 그만 죽어도 좋을 것 같아저라우. 남들 모르게 밥도 허고 빨래도 허고 절도 함시 러, 이렇게 곁에서 한 세월 자났으믄 혀라우.
좌탈(座脫)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 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 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겨울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공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허공장경(虛空藏經)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힘들어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털어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이라 했다. 삼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자 두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 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 산으로 가 목을 맸다. 내려앉을 땅은 없어 재 한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 나이 마흔둘.
출처:김사인 시집 - 어린 당나귀 곁에서
2015년, 임화 문학상 지훈문학상 만해 문학상(수상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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