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詩로 여는 세상》신인상 당선작
심사위원 : 최문자, 유종인
삼합 외2편
남길순
우리 속에 들어가고 싶다, 돼지여
설령 그 깜깜한 곳에 평생을 갇힌다 해도
외롭지는 않겠다, 우리
너와 나의 경계가 불분명해질 때
그냥 우리라고 부르자
우리, 얼마나 포근하고 든든한 말인가
억지로 십리 길을 걸어와
수컷 돼지 아래 엎드린 암컷의 외침을 들었네
우리는 애초부터 우리 안에 안주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지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하느님은 싸움을 붙이고 즐기시는 진정한 싸움꾼
우리끼리라는 말은 스스로를 가두지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한 우리일 수 없는 거야
그것이 슬픈 너와 나 우리는 빙 둘러앉아 술잔을 부딪치네
너는 피 토하며 열변을 토하고
나는 취한 척 너의 말을 받아 삼킨다
세상 이치는 삼박자가 맞아야 돌아간다는 것
천지인이 그렇고 가위 바위 보가 그렇듯
최소한의 다른 우리가 필요하다는 것
지필묵 없이도 시를 받아 적을 수 있는 오늘
남자 없이도 여자 몸에 애기 씨를 받을 수 있는 오늘
고집스럽게 바닥을 헤엄치다 지독하게 썩은 흑산 홍어와
새벽잠 깨우던 목 딴 돼지고기와
근 삼년 얼다 녹은 곰삭은 배추김치를 얹고
우리가 된 우리는 목청껏 술잔을 부딪치네
오묘한 삼합 맛에 빠져드네
우리 밖에서 비웃는 톡 쏘는 한 마디
지랄들 허고 자빠졌네!
멸치회
고추장 양념 속 머리에 띠 두른 멸치들이 쏘아본다
세찬 바다를 헤엄쳐 온 작은 눈빛들
힘없는 것들은 늘 떼로 모여 파닥이지
리어커 행상이 트럭이 되기까지
해보지 않은 일 없다며 비늘을 세운다
블 밝힌 고물 트럭에 앉아 늦은 밤까지 뻥을 튀기면
치는 뻥이라야 아무리 힘을 실어도
고작 한 봉지에 천 원인데
종로 바닥은 파닥이는 재미가 있어
자리싸움은 더욱 치열하고
뱃사람들이 빙 둘러서 그물을 털 듯 그들을 털어내면
사대문 안에서 지리멸렬하는
멸치 떼들
텔레비전 속 선거판은 흐드러진 남해 벚꽃 같아
죽방렴 건나 꽃 터널 끝
미조식당에 앉아
포 뜬 멸치의 등을 쳐 먹는다
소주 한 잔에 녹아드는 만만하고 고소한 맛
삐뚤빼뚤 벽을 가득 메운 낙서들은 뭐지?
무슨 할 말을 아프게 눌러 쓴
말라비틀어진 까만 똥
칼의 노래
장례 행렬 눈부신 호상이다
노란 상복 입은 가로수 길에 쌍칼 꽂아두고
칼 가시오, 칼
시간 가늠하는 노인의 소리
잘 가시오 잘,
끊어 읽는 가을 하늘
노인의 날선 칼 위로
얇게 저민 각양각색들이 스치며 지나간다
거대한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도무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도심을 향해
칼 가시오 칼,
노인은 등 뒤에서 칼을 들이대고
찌개요? 구이요?
좌판 위에 목 내어놓고
어제의 뒤통수를 보며 달려가는 오후
이제 견고한 것들은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노인의 소리를 되뇌며
오랫동안 쓰지 않은 녹슨 칼을 슬며시 꺼내본다
쏟아지는 은행잎 속에서 날아가는
검은 새 한 마리
쨍한 가을 하늘이
물 한 방울로 세운 칼날처럼 시퍼렇다
ㅡ《詩로 여는 세상》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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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길순 / 순천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방문 교사 외2편
최 휘
나는 교실을 가방에 넣고 이동 중이지
아파트 사이 허공으로 어둠으로
희미한 빛자락을 밟으며 경쾌하게 걷는 중이지
방금 내려온 20층 석벽에는 저녁이 흘러내리고
18층 현관문 틈에는 구운 꽁치 냄새가 걸리고
학원에서 돌아오는 가방이 옆구리를 툭툭 치고
저녁의 장바구니들이 바삐 지나가지
가방에 부딪치며 장바구니에 부딪치며 걷는 커다란 가방
제 속에 제 그림자를 넣고 다니는 가방
가방의 중심은 가방, 창문의 중심은 창문이지
창문들이 어둠을 빠르게 말아 올릴 때까지
더 이상 끌어 덮을 허공이 없을 때까지
빠르게 걷고 걸을 뿐,
나는 가방 속에 남아 있는 교재를 머리로 세며 길을 찾는 가방이지
벨을 누를 때마다 가벼워지는 건 오늘의 무게가 아니야
오늘이란 아침마다 쌓이는 교재 같은 것
그 속에 샛노랗게 붙인 포스트 잇 같은 것
복숭아뼈
오른 발목이 밑으로 향하게 앉는 건
골수염을 앓던 내 다리의 습관
그래요, 가슴에 복숭아가 열리기 전의 일이었죠
밭에는 연분홍 복사꽃들이 만발하고
나는 성한 다리로 흙비탈을 끌며 내려오고 있었는데
문득 복숭아 두 개가 내 가슴에 열렸죠
그리고는 골수염을 앓았죠
나는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끌며
복숭이 속으로 들어가곤 했죠
복숭아들은 자꾸 털을 날리고 내 뼈는 콕콕 쑤시고
밤이면 하얀 녹두꽃이 꽃망울을 틔우고
엄마는 골수염 위에 녹두를 짓이겨 덮었죠
꾸덕꾸덕 녹두가 말라가는 동안
복숭아꽃 수천 송이가 밤하늘을 날아올랐죠
짓이겨진 녹두가 뼛속으로 스며들 때마다
발목이 자꾸 뜨거워졌죠
다리를 잘라낼지도 몰라 엄마가 말했죠
그때 작디작은 뼈들이 일어서고
복숭아가 흐물흐물 사라졌죠
천지에 분홍이 파도치고
복숭아 단물들이 흘러넘쳤죠
복숭아 따는 처녀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봄날을 날렸죠
비탈마다 봉긋한 뼈들의 무덤이 보였죠
즐거운 나의 집
고양이가 새 집의 난간을 폴짝 뛰어오르고
오색 마삭줄이 출렁 흔들리고
아래향이 몽글거리고
구석구석 조명등이 반짝이고
팔 벌리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길게 늘어나고
팡팡 웃음이 터지고
바비큐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축배, 축배, 건배, 건배
집들이용 두루마리 휴지가 쌓이고
빈 접시가 쌓이고
하수구로 구정물이 쉴 새 없이 빠져나가고
새 상이 차려지고 치워지고
집들이 손님들이 돌아가고 남고
3층까지 오르내리는 발자국
계단은 등뼈처럼 휘고
어질러진 이불 위로 아이들 잠들고
등 위에 고양이도 잠들고
고양이 털이 가만가만 날아다니고
개다 만 빨래가 구겨지고
지붕 저편에 대출금이 노랗게 떠오르고
ㅡ《詩로 여는 세상》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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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휘(본명: 최영숙)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현상>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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