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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29회 《시안》신인상 당선작_ 전현자

시치 2012. 12. 4. 01:38

제29회 《시안》신인상 당선작_ 전현자

                                    심사위원_ 이명수, 김은자 시인

느릿느릿 (외 4편)

 

   전현자

 

 

 

십자가를 짊어진 분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걸식했던 분이 저기 계신가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하늘

언덕 위에 푸른 커튼처럼 쳐져 있다

미처 풀지 못한 어제의 구름들,

약간의 오해가 한쪽 구석에 끼어 있지만

구름은 흘러가는 것

단골손님처럼 오가는 것

오해는 제 알아서 풀 일

아롱이다롱이 구름들아

저 산 능선들이나 구경해 봐

먼 초원을 향해 나가는 소떼처럼

가야산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허리 감고 휘도는 물안개야

욕망으로 쭉 뻗은 먼 아스팔트길이

오늘만큼은 우직한 한 그루 나무로 보여

나뭇잎도 돋아날 것 같아

지금 아니면 못 볼

저 생생한 한 송이 꽃잎 속으로

느릿느릿 걸어가 봐

 

 

 

봄날

 

 

 

여기도 꽃 저기도 꽃

논두렁 밭두렁으로 오시게

개불알풀꽃 하나가 웃으니

별꽃 냉이꽃 모두 까르르 까르르

배꼽 떨어지겠네

노박이로 피어있는 꽃 보았는가

시간이 별로 없다네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그대

문 열고 풀꽃밭으로 오시게

키는 낮추고 마음은 그냥 열어두시게

이렇게 아름다운 낙하도 있다네

까르르 까르르 웃다가 보시하다가

가는 길도 있다네

벌 날아와 앉으니

개불알풀꽃 가는 허리가 휘청

꽃잎 뚝 떨어지네

꿀 따던 벌들도 붕붕거리고

오늘은 내 눈물이 주책없네

 

 

 

슬픔을 깎다

 

 

 

손톱은 슬픈 만큼

발톱은 기쁜 만큼 자란다지

손톱 서너 번 깎을 때

발톱은 한 번 깎을까 말까

그러고 보니

기쁨 하나가 슬픔 서넛을 견뎌냈군

요즘은 손톱 깎는 것도 귀찮고 하여

내버려두었더니 서로 할퀴고 물어뜯는다

기쁨도 너무 길면 불안한 법

오늘은 발톱도 깎아냈다

혹,

깎은 발톱이 튀어나가진 않았는지

두리번거리며

내 자라난 슬픔들

하나씩 호명하며 다듬어간다

 

 

 

풀벌레가 운다

 

 

 

보리차 끓이려

물주전자 가스불 위에 올린다

불꽃에 진저리치던 주전자 속

쓰르륵 쓰르륵

아!

낯익은

쓰르라미 울음소리

저 물은 분명

내 고향 앞개울을 지나왔던 것

풀벌레 소리 들으며

다슬기를 키우고 나를 키우고

철철철, 예까지 흘러왔던 것

가슴 저 밑동까지 배인 풀벌레 소리

차마 떨쳐내지 못하고

소독약 냄새 풍기며 펄펄 끓고 있다

 

풀잎 위 이슬방울 구르듯

몸속으로 흘러드는 물

내 몸에서 풀벌레가 운다

 

 

 

양파

 

 

 

겨우내

뒤꼍 처마 바람만 퍼마셨다

 

점점 쪼그라드는 살

아득하게 더듬어간 실뿌리들

 

몸을 알사탕처럼 녹여 먹었다

길게 올라온 푸른 눈

 

아직은 보이지 않네

나에게 가는 길

 

문밖

봄 햇살 쏟아지는데

 

 

————

전현자 / 충남 태안군 고남면 고남리

            이메일 jahyun822@hanmail.net

 

 

 

     —《시안》2012년 가을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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