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시안》신인상 당선작_ 전현자
심사위원_ 이명수, 김은자 시인
느릿느릿 (외 4편)
전현자
십자가를 짊어진 분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걸식했던 분이 저기 계신가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하늘
언덕 위에 푸른 커튼처럼 쳐져 있다
미처 풀지 못한 어제의 구름들,
약간의 오해가 한쪽 구석에 끼어 있지만
구름은 흘러가는 것
단골손님처럼 오가는 것
오해는 제 알아서 풀 일
아롱이다롱이 구름들아
저 산 능선들이나 구경해 봐
먼 초원을 향해 나가는 소떼처럼
가야산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허리 감고 휘도는 물안개야
욕망으로 쭉 뻗은 먼 아스팔트길이
오늘만큼은 우직한 한 그루 나무로 보여
나뭇잎도 돋아날 것 같아
지금 아니면 못 볼
저 생생한 한 송이 꽃잎 속으로
느릿느릿 걸어가 봐
봄날
여기도 꽃 저기도 꽃
논두렁 밭두렁으로 오시게
개불알풀꽃 하나가 웃으니
별꽃 냉이꽃 모두 까르르 까르르
배꼽 떨어지겠네
노박이로 피어있는 꽃 보았는가
시간이 별로 없다네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그대
문 열고 풀꽃밭으로 오시게
키는 낮추고 마음은 그냥 열어두시게
이렇게 아름다운 낙하도 있다네
까르르 까르르 웃다가 보시하다가
가는 길도 있다네
벌 날아와 앉으니
개불알풀꽃 가는 허리가 휘청
꽃잎 뚝 떨어지네
꿀 따던 벌들도 붕붕거리고
오늘은 내 눈물이 주책없네
슬픔을 깎다
손톱은 슬픈 만큼
발톱은 기쁜 만큼 자란다지
손톱 서너 번 깎을 때
발톱은 한 번 깎을까 말까
그러고 보니
기쁨 하나가 슬픔 서넛을 견뎌냈군
요즘은 손톱 깎는 것도 귀찮고 하여
내버려두었더니 서로 할퀴고 물어뜯는다
기쁨도 너무 길면 불안한 법
오늘은 발톱도 깎아냈다
혹,
깎은 발톱이 튀어나가진 않았는지
두리번거리며
내 자라난 슬픔들
하나씩 호명하며 다듬어간다
풀벌레가 운다
보리차 끓이려
물주전자 가스불 위에 올린다
불꽃에 진저리치던 주전자 속
쓰르륵 쓰르륵
아!
낯익은
쓰르라미 울음소리
저 물은 분명
내 고향 앞개울을 지나왔던 것
풀벌레 소리 들으며
다슬기를 키우고 나를 키우고
철철철, 예까지 흘러왔던 것
가슴 저 밑동까지 배인 풀벌레 소리
차마 떨쳐내지 못하고
소독약 냄새 풍기며 펄펄 끓고 있다
풀잎 위 이슬방울 구르듯
몸속으로 흘러드는 물
내 몸에서 풀벌레가 운다
양파
겨우내
뒤꼍 처마 바람만 퍼마셨다
점점 쪼그라드는 살
아득하게 더듬어간 실뿌리들
몸을 알사탕처럼 녹여 먹었다
길게 올라온 푸른 눈
아직은 보이지 않네
나에게 가는 길
문밖
봄 햇살 쏟아지는데
————
▲ 전현자 / 충남 태안군 고남면 고남리
—《시안》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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