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2012) 미당시문학상 수상작
봄밤 / 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커튼 뒤에서/황병승
첫사랑. 그것은 히스테릭한 도형인데
첫사랑. 그것은 회전이 필요한 버젓함인데
그것은, 그것을 아무도 연주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자들이 상처 입었고
너무 많은 자들이 떠나갔으며
너무 많은 자들이 불편한 찬 바닥에서 잤다
첫사랑. 예의범절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너무 빨리 이해하고
서로를 너무 빨리 용서하고
너무 빨리 하모니를 꿈꾸며
뜨거운 돌을 손에 쥔 기분으로
차가운 돌을 손에 쥔 기분으로
우리를 위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망쳤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가 망쳤다
뜨거운 돌을 집어삼키는 심정으로
차가운 돌을 집어삼키는 심정으로
첫사랑,
석탄을 베고 검은 잠에 빠져 들 때까지
이 가을의 무늬/허수경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여름을 촘촘히 짜내렸던 빛은 이제여름의 무늬를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명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무려진 손금처럼 어스름한 갸날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연필 한 자루/허수경 (최종경선작)
그렸다
꿈꾸던 돌의 얼굴을 그렸다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부서진 벽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렸다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멸종해가던 거대 짐승의 목
먹다 남은 생선 머리 뼈 꼬리 마침내 차가운 눈
열대림이 눈을 감으며 아무도 모르는 부족의 노래를 듣는 거
태양이 들판에 정주하던 안개를 밀어내던 거
천천히 몸을 낮추며 쓰러지는 너를 바라보던 오래된 노래
눈물 머금은 플라스틱 봉지도 그 봉지의 아들들이
화염병의 신음으로 만든 반지를 끼는 거
어둠에 매장당하는 나무를 보는 거
사랑을 배반하던 순간, 섬득섬득 위장으로 들어가던 찬물
늦여름의 만남, 그 상처의 얼굴을 닮아가면서 익는 오렌지를
그렸다
마침내 필통도 그를 매장할 때쯤
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되는 연필이었다, 우리는
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
영영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
헤어질 사람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속에서
영원한 목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루였다
당신이여, 그것뿐이었다
(『문학과사회』 2011년 겨울호)
국립낱말과학수사원/함기석
부검될 변사체 <없다>가 보관된 곳은 1연이다
1연은 지하 4층에 있다
빛과 음이 차단된 탈의실에서 부검의 y는 흰 가운으로 갈아입고
황급히 2연으로 이동 중이다
2연은 1연에서 엘리베이터로 1분 거리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2연이다 9층 복도를 따라 환자복을 입은 낱말들이
휠체어를 타고 지나다닌다 간호사 둘이
두개골이 함몰된 또 다른 변사체 <있다>를 실은 침대를 밀며
복도 끝의 5연으로 뛰어간다
y는 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3연을 걷는다
사각문을 열고 들어가니 잔디가 깔린 튤립 정원이 나온다
공중으로 알파벳 새들이 날고
목련나무 밑의 벤치에서 외국 검시관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사체의 인적사항, 사건명, 사건번호, 사건개요와 일시 등
의뢰서에 적힌 세부사항들을 확인하는 사이
법의학과 회전문이 반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도대체 오늘의 부검대상은 누구야? y는 투덜거리며 침을 뱉고
범죄분석실 좌측의 대리석으로 지은 4연으로 들어간다
바닥에 어제 부검한 <보다>의 핏덩이 혈흔이 엉켜 있고
<쓰다>의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있다
y는 손가락을 집어 비닐에 넣고 5연으로 이동한다
금속침대에 <있다>와 <없다>가 부부처럼 나란히 누워 있다
y는 매스로 <있다>의 복부를 가른다 물컹거리는 창자를 만지는데
커튼 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가위를 들고 나온다
y의 옷을 갈가리 찢고 질식시켜 6연으로 끌고간다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는 과학수사원 뒤편의 숲이다
y는 계곡에 버려진 채 누구도 발음할 수 없는 낱말이 되어간다
살을 파먹는 모음벌레 o와 u가 들러붙어 즙을 빤다 며칠 후
한 등산객에 의해 사체는 우연히 발견된다
오늘 부검될 변사체 가 보관된 곳은 1연이다
살가죽이 벗겨진 자화상/이원
검은 빛에 갇힌
길들. 제 스스로 몸을 구부려 돌아가고 있는 것
하루. 벽을 밀고 가는 것
한여름에 모포를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는 형국
물 빠진 뻘에 배가 여럿이다
바다 멀리까지 보인다
죽은 사람 산 사람 모두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안이 들끓어 밖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없는 안을 만들어 내기 때문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내가 사람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차가운 잠/이근화
꿈속에서 세차게 따귀를 얻어맞았다
새벽이 통째로 흔들렸고
흔들린 새벽의 공기를 되돌려 놓기 위해
전화벨이 울렸다
나의 눈은 동그란 벽시계에
나의 눈은 병상의 엄마에게
긴 복도를 따라 걷지만
복도와 두 눈을 맞출 수는 없다
일주일 사이 꽃이 졌다
여기저기 팡팡 사진이 터지고
맘껏 담배 연기를 품었는데
나는 왜 빠져나가지 않나
고장 난 시계를 어떻게 할까
혈관을 따라 울리는 피의 음악을 또 어떻게 할까
오래 전에 떨어진 머리카락이나 살비듬 같은 것을
내가 옷처럼 편안하게 입고 있는데
거울 속에는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있고
할머니도 아줌마도 아이도 아닌
엄마가 희미하게 손을 뻗는다
이백년 후의 차가운 잠에서 깨어나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다정한 연인이 되어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케이크를 푹푹 떠먹을까
환멸과 동정의 젖꼭지를 물고 거침없이
이 세계를 생산할 수 있다면
차가운 잠에서 깨어나
이끼/유종인
그대가 오는 것도 한 그늘이라고 했다
그늘 속에
꽃도 열매도 늦춘 걸음은
그늘의 한 축이라 했다
늦춘 걸음은 그늘을 맛보며 오래 번지는 중이라 했다
번진다는 말이 가슴에 슬었다
번지는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옛날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번지고 있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랑의 옛말,
여직도 청맹과니의 손처럼 그늘을 더듬어
번지고 있다
한끝 걸음을 얻으면 그늘이
없는 사랑이라는 재촉들,
너무 멀리
키를 세울까 두려운 그늘의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사랑이라는 옷을 아직 입어보지 않은
축축한 옛말이지만
만년청춘/김이듬
매년 이맘때면 터지는 폭죽소리 환호하는 사람들 발산하고 발작하고 발화하고 발포하고 발을 굴려요 실신할 때까지 그러고 싶으면
귀를 막아도 들리고 눈을 감아도 훤하다면 갈등도 없이 가고 있다면 축제는 돌아오고 장사는 끝날 줄 모르고 확성기는 꺼질 줄 모르고 아무리 소리 질러도
네가 그들과 같이 간다 해도
나는 떠나야 해요 세상 끝으로 끌려가기 꺼려지는 곳으로 거기도 축제라면 거기를 떠나야겠지만 어디로 갈까요 방방곡곡 축제장이니
부자고 젊고 똑똑하고 심지어 진보적이기까지 한 당신이 시를 쓴다면 콘서트를 연다면 소녀가 쓰러지고 성황이고 계단은 가파르고 초청가수는 보통 가수가 아니니까 노래를 멈추지 않겠지
노래 부르는 사람은 노래하고 음반을 사는 사람은 음반을 사고 그들은 불법음반을 사지 않을 거야 그림도 살 수 있겠지 살 수 있는 사람들만 살 수 있겠지 지금과 같다면
한번 시인은 영원히 시를 쓰고 일단 화가는 계속 화가고 화가 난 어중이떠중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게다가 넌 계단을 치우지는 않잖아 청소하는 사람은 청소를 하고 올라가는 사람은 계속 올라가고 옥상에는 비밀 화원이 있고 떨어지던 사과가 아직도 떨어지고 있다면 우리가 수줍게 키스를 나누고도 영원히 키스를 해야 한다면 웃는 사람들만 계속 웃는다면
만년청춘이라면
이토록 생이 아름답기만 하다면 순간순간이 축복이라며 눈을 돌리고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저 시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해도
이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른다 해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떠나야 해요 나는 거기가 어디든
더러운 그늘/김영승
더러운 그늘도
있을까 더러운
그림자도
즈믄강에 비친
만월처럼
폭우에 건너편
아파트 5층 높이 거대한 느티나무
빽빽한 숲 사이로
물이 콸콸콸콸 날다람쥐처럼
이 가지 저 가지 여자 타잔처럼
뛰어다니듯
쏟아지는 아침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권혁웅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찹쌀순대 2층, 순대 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그는 눌린 머리 고기처럼 얼굴을 눌러
눈물을 짜낸다
새우젓이 짜부라든 그의 눈을 흉내 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
연애의 길고 구부정한 구절양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빨래판에 치댄 표정이 되었지
융털 촘촘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빠져 있다
지금 마늘과 깍두기만 먹고 견딘다 해도
동굴 같은 내장 같은
애인의 목구멍을 다시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버릇처럼 애인의 얼굴을 만지려다 만다
휴지를 든 손이 변비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
반음계/고영민
새소리가 높다
당신이 그리운 오후,
꾸다만 꿈처럼 홀로 남겨진 오후가 아득하다
잊는 것도 사랑일까
잡은 두 뼘 가물치를 돌려보낸다
당신이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
몇 짐이나 될까
물비린내 나는 저 구름의 눈시울은
바람을 타고 오는 수동밭 끝물 참외 향기가
안쓰럽다
하늘에서 우수수 새가 떨어진다
저녁이 온다
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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