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차주일
아이가 도화지에 처음 그린 얼굴
입이 없어 완벽하다
평생 살아내야 새길 수 있는 주름살 같은 선線은
다빈치도 그려낼 수 없는 입술을 감춰놓고 있다
아이 같은 마음에게만 그려지는 숨겨진 입술이 비칠 때
선은 주름의 본성을 드러내고 숨쉬기 시작한다
막, 선의 눈이 깜박여 체온을 부풀리고 있다
본디 도화지같이 평면이었던 내 얼굴도
누군가의 안에서 그려지는 대로 자리잡아 왔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연필이 무뎌진 흔적일까, 내 광대뼈는
한 사람의 사랑 고백을 부추겼던, 뺨의 홍조는
또 얼마나 많은 불면이 지우개가 문지른 핏빛일까
내 소리를 주리틀어 말[言]되게 했던 정신과
이곳까지 걷게 한 소멸로 짙어지는 것들, 모두
얼굴에서 주름살로 되살아난다
주름은 아래쪽으로 처져 있다
입 하나 달아맨 채 선禪에 들어 있다
나는 그 앞에 아무 것도 묻지 않기로 한다
아이가 숨겨 둔 미소 하나 들려나올 뿐이다
- <시평> 2005.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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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원의 시 읽기(7)]
* 세상 모든 사물이나 형상들의 이름을 지워본다. 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보통명사에서부터 형용사, 부사, 동사까지. 약속에 불과한 기호들(말)의 잔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네 삶은 얼마나 고단한가. 그것들이 지금까지 우리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심지어는 달짝지근한 사랑고백까지 하게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생략한 입과 입술이 좌지우지했을지도 모를 일. 아이에겐 그것들이 전혀 필요치 않다. 우리를 움직이게 했던 말의 뿌리로부터 아무도 비켜갈 수 없다. 입이 없어 완벽한 얼굴은 일원상(一圓相)이다. 즉, 우주의 근원이다. 아이에게 삼라만상의 이치가 다 들어있다. 아이가 곧 우주라는 이야기다.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스승이라는 이야기다. 척박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차주일 시인은 아이가 숨겨 둔 미소로써 순수하게 살기를 조용히 경고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흔적들이 아이의 손에서 완성된다. 역설적인 선시(禪詩)가 아니겠는가. 2005년 겨우내 내 속을 흔들어놨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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