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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원의 시 읽기(12)] 북촌 지나기/ 조정

시치 2011. 8. 5. 11:01

 

 

북촌 지나기

 

                 조정

 

 

  아무튼 수평선은 눈 시퍼렇게 뜨고 보았던 일에 대해 시치미 뗄 것

  아무튼 수평선은 평화를 외치며 두 팔 화알짝 펼 것

  아무튼 수평선은 알고 보면 흔들리고 있는 무르팍 들키지 말 것

 

  달여도는 우측에 있을 것

  신문지 한 장 바람에 매달려 날아갈 것

  분홍 찌르레기 도래한 제주 아열대 기후에 대해 하품할 것

 

  불편할 것 덜컹 경계에 감기는 체인 소리 까마귀 소리 벙어리 소리 아연실색 말 덜 배운 아이 소리 역시 불편할 것 외딴 자전거 내다보는 건물 모서리와 솔밭 또한 불편할 것

  분홍찌르레기 한 마리가 메뚜기 백오십 마리 순식간 쪼아 먹는 고비사막 소식마저 불편할 것 나는 시방 액자의 중심을 헛돌리며 달릴 것 안녕

 

  쏜살같이 빠져나올 수 없지 북촌을 아무렴 먼 배경에 청포 깔고 수평선인 척 평화인 척 별 일 없는 척 처억척 불어대는 바람 행자 손바닥이 꽤 깊거든

 

 

『우리詩 2011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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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원의 시 읽기(12)]

 

 

  * 팽팽한 수평선 위를 걷고 싶을 때가 있다. 절벽 같은 수평선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제주 북촌마을 너븐숭이에 가보라. 너븐숭이에 망연히 앉아 나를 주시하는 수평선을 이리저리 당기다보면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 지극히 사소했으며 괜한 눈물이나 흘렸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너븐숭이란 제주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이다. 수많은 돌무덤과 애기무덤이 산재하는데 이곳이 제주 4․3 민주화항쟁 당시의 참혹했던 북촌대학살의 현장이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실천문학사, 2007)에 수록된 「먼나무」에서 일찍이 제주 4․3사건을 다룬 조정 시인의 「북촌 지나기」는 이번 시편에서도 예사롭지 않다. “산불근해불근 새들은 찾아와/ 옛말 꺼냉 곱단 울멍도 갑디다” (4․3 당시 민간에 떠돌던 말로 “산에도 바다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옛이야기 꺼내어 말하다가 울고도 갑디다“라는 뜻)와 함께 ”그 여자/ 죽은 사내도 죽었고/ 죽은 사내를 죽인 사내도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 화냥화냥 옛일 들추며/ 기념물 15호 가시관 뽑아낸 머리가 뿜어내는/ 피 구슬 만 과!// 죽은 몸으로 쏟는 구슬은 사리가 아니다“라고 먼나무를 매체로 4․3 항쟁 을 일깨워준 바 있다. 옛 서귀포시청에 있는 먼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키 6.5m, 가슴높이 1.4m 정도라 한다. 1971년 8월 26일 제주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으나 몇 해 전 4․3의 재조명 일환으로 먼나무 기념식재의 의미가 사라져 기념물지정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원래 이 나무는 한라산에 있었으나, 4․3이 끝나가던 1949년에 무장대(서북청년단)를 토벌한 기념으로 제2연대 병사의 주둔지인 서귀포시청 자리에 옮겨 심었다 하니 당연히 삭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달여도는 북촌 앞바다의 작은 무인도이다. 지근거리에 위치하는데 그때 당시 몇몇 사람이 숨기도 했다한다. 달여도를 오른쪽으로 두고 성산에서 제주 방향으로 걷다보면 우리 군인들이 470여명의 살상을 벌인 북촌리라는 작은 마을에 당도하는데 그곳에 ‘너븐숭이기념관’이 있다.

 

  제노사이드(genocide), 암울한 역사의 희생자가 어찌 이곳에서 뿐이랴. 눈 시퍼렇게 뜨고 당시의 현장을 생생히 기억하는 너븐숭이나 달여도, 솔밭, 알고 보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흐느끼고 있을 수평선까지 아니, 별 일 없는 척 평화인 척 위장하는 위정의 시치미가, 62년 전의 학살현장으로 데리고 간다. 아열대기후의 첩자인 분홍찌르레기가 도래한 제주, 분홍찌르레기 한 마리가 하루에 메뚜기 150여 마리 이상을 먹어치우는 또 하나의 제노사이드와 함께.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아무튼 수평선은 평화를 외치며 두 팔 활짝 펼 것, 눈 시퍼렇게 뜨고 보았던 일에 대해 시치미 뗄 것. 제주 북촌을 지나며 그 누가 작금의 제노사이드에 편안하겠는가. 그릇된 역사로 희생된 영혼들이 또다시 허튼 바람에 찢기도록 외면할 것인가. 정치성에 침묵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시인들에게 가끔 정통 훅을 날려 치명타를 입히는 조정 시인의 역할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출처 : The Poet`s Garden
글쓴이 : 박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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