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원_ 자두
내 그림자에게
정호승
이제 우리 헤어질 때가 되었다
어둠과 어둠 속으로만 떠돌던 나를
그래도 절뚝거리며 따라와주어서 고맙다
나 대신 차에 치여 다리를 다친 일과
나 대신 군홧발에 짓이겨진 일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가정법원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너 혼자 울면서 재판 받게 한 일 또한 미안하지만
이제 등에 진 짐은 다 버리고
신발도 지갑마저도 다 던져버리고
가볍게 길을 떠나라
그동안 너는 밥값도 내지 않고 내 밥을 먹었으나
이제 와서 내가 밥값은 받아서 무엇하겠니
굳이 눈물 흘릴 필요는 없다
뒤돌아서서 손 흔들지 말고
가라
인간이 사는 곳보다
새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어린 나뭇가지에서 어린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는
한마리 새의 그림자가 돼라
- 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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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원의 시 읽기(13)]
* 2005년 가을, 스승이자 형인 정호승 시인의 그림자를 밟은 적 있다. 슬프도록 따뜻한 그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소주 한 병을 아끼듯 마시고, 형도 나도 그림자도 소주도 눈시울을 적신 적이 있다. 등을 토닥이며 단호하게 들려주신 말씀, '오늘부터라도 네 그림자를 버려라." 모두가 다 짙게 그늘진 내 그림자 때문이었는데, 사실 난 그때까지도 내 그림자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내 허물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지를 몰랐다. 형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를 포근히 안아주고 난 그날 이후, 내 그림자는 거짓말처럼 내 곁을 떠나갔다.
그림자는 나의 분신, 내게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나'.
내 그림자와 함께 밥을 먹고 돈을 벌고 진솔한 그림자를 만나 또 다른 그림자를 남기는 나. 내 그림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아주 엄격한 반성과 용서의 블랙박스이며, 이슬처럼 사라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남을 영혼의 그림자이나 채 짐짓 태연하다. 막무가내의 언행이 그 얼마나 많은가. 내 그림자 앞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먼지 끼고 악취가 나는 각자의 그림자를 시 쓰기, 시 읽기를 통해 서서히 지워 나가야 할 것이다.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되"고 싶은 정호승 시인의 그림자는 일찌감치 당신의 작품 『새』에서 "몸에서 사리가 나온 새"가 되었다. 하느님도 두 손을 든,『하늘의 그물』을 빠져 나간, <어미 기러기의 지고지순한 모성애>에서부터, '갈대 숲 검은가슴도요새'의 <수선화처럼 외로운 인간의 눈물>까지 보듬은 새. 오늘도 형은 어린 나뭇가지 위에 깃드는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되기 위해, 아흔이 훌쩍 넘으신 부모님을 수발하고 있는지 모른다.
불현듯 사라진 내 그림자가 나를 찾아올 때면, 나는 어김없이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펴게 된다. 가끔 전화를 걸어 투정도 부린다. 불쌍하게 죽은 내 그림자의 안식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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