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스크랩] [박정원의 시 읽기(13)] 내 그림자에게/ 정호승

시치 2011. 8. 5. 11:00

 

  ⓒ 박정원_ 자두

 

 

 

 그림자에게

 

                 정호승

 

 

 

이제 우리 헤어질 때가 되었다

어둠과 어둠 속으로만 떠돌던 나를

그래도 절뚝거리며 따라와주어서 고맙다

나 대신 차에 치여 다리를 다친 일과

나 대신 군홧발에 짓이겨진 일은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가정법원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너 혼자 울면서 재판 받게 한 일 또한 미안하지만

이제 등에 진 짐은 다 버리고

신발도 지갑마저도 다 던져버리고

가볍게 길을 떠나라

그동안 너는 밥값도 내지 않고 내 밥을 먹었으나

이제 와서 내가 밥값은 받아서 무엇하겠니

굳이 눈물 흘릴 필요는 없다

뒤돌아서서 손 흔들지 말고

가라

인간이 사는 곳보다

새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어린 나뭇가지에서 어린 나뭇가지로 날아다니는

한마리 새의 그림자가 돼라

 

 

 

-  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

 

 

-----------------------------------------------------------------------------------

 

 

[박정원의 시 읽기(13)]

 

 

  * 2005년 가을, 스승이자 형인 정호승 시인의 그림자를 밟은 적 있다. 슬프도록 따뜻한 그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소주 한 병을 아끼듯 마시고, 형도 나도 그림자도 소주도 눈시울을 적신 적이 있다. 등을 토닥이며 단호하게 들려주신 말씀, '오늘부터라도 네 그림자를 버려라." 모두가 다 짙게 그늘진 내 그림자 때문이었는데, 사실 난 그때까지도 내 그림자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내 허물이 그렇게 가까이 있는지를 몰랐다. 형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를 포근히 안아주고 난 그날 이후, 내 그림자는 거짓말처럼 내 곁을 떠나갔다. 

 

   그림자는 나의 분신, 내게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나'. 

 

   내 그림자와 함께 밥을 먹고 돈을 벌고 진솔한 그림자를 만나 또 다른 그림자를 남기는 나. 내 그림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아주 엄격한 반성과 용서의 블랙박스이며, 이슬처럼 사라지더라도 마지막까지 남을 영혼의 그림자이나  채 짐짓 태연하다. 막무가내의 언행이 그 얼마나 많은가. 내 그림자 앞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먼지 끼고 악취가 나는 각자의 그림자를 시 쓰기, 시 읽기를 통해 서서히 지워 나가야 할 것이다.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되"고 싶은 정호승 시인의 그림자는 일찌감치 당신의 작품 『새』에서 "몸에서 사리가 나온 새"가 되었다.  하느님도 두 손을 든,『하늘의 그물』을 빠져 나간, <어미 기러기의 지고지순한 모성애>에서부터, '갈대 숲 검은가슴도요새'의 <수선화처럼 외로운 인간의 눈물>까지 보듬은 새. 오늘도 형은 어린 나뭇가지 위에 깃드는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되기 위해, 아흔이 훌쩍 넘으신 부모님을 수발하고 있는지 모른다.   

 

   불현듯 사라진 내 그림자가 나를 찾아올 때면, 나는 어김없이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펴게 된다. 가끔 전화를 걸어 투정도 부린다. 불쌍하게 죽은 내 그림자의 안식을 위해.(♣)

  

출처 : The Poet`s Garden
글쓴이 : 박정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