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리의 불가지론/권혁웅
건널목을 첫 경험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를 닦다 불쑥 치미는 욕지기처럼
넘어오는 행인 가운데 아는 얼굴이 있을까
이 땅이 부용국(附庸國)임을 모르는
늙은 개들만 함부로 건너오다 2차원이 되지
납작해진 두 발과 평평해진 내장을
무심한 바퀴가 피안네 건네주지
번뇌에 사로잡힌 사람을 유루(有漏)라 불러요
누전이거나 누수가 있는 곳, 그곳이 차안이야
이를테면 욕을 하며 물을 끼얹으며
핏자국을 벅벅 닦아내는
저 청소부는 네거리의 외연을 넓히는 중이지
하나는 내가 온 길, 둘은 내가 선택한 길,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그 사람이 올 길인데
그게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지금은 비보호 좌회전이야, 시대가 그래
왼쪽으로 틀어도 좋지만 그건 불법이지
고개를 따라 도는 몸처럼 신호는 서서히 바뀌고
이쪽 건널목은 처음이 아니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해?
목적한 곳에 도달하는 걸 득달(得達)이라 불러요
나는 득달같아서, 거의 이르렀어
거의는 거기가 아니어서
네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숨긴다 마침내
눕기 위해 나는 집으로
그 아래 눕기 위해 그는 건널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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