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김추인 시 보기 (3편)

시치 2010. 10. 14. 23:05

프렌치키스의 암호 (外)/김추인

 

 

우편함을 열어야 하는데요

뻐꾸기를 꺼내야 하는데요

길은 멀고 떨리거든요

그 여자 몇 개의 사구를 넘어

사막의 겨울을 건너가는 중인가 본데요

 

무릎 꺾일까 열 발톱을 세워 모래의 나라를 움켜

밟고 가는데요

 

당신들, 사막이 아름다운 까닭을 아실까 몰라

신기루 속을 내달려오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내 외사랑의 시

그의 홀로그램을 보는데요

 

모래폭풍 아니라도 눈이 먼 여자

그의 사랑 눈물 입술

입 속의 검은 잎*조차 훔쳐내고 싶은

관절을 꺾어서라도

비의(秘意)의 자모음 끌어내고 싶은

 

아무도 닿지 못한 프렌치키스를 위해

뻐꾸기를 꺼내러 가요

그의 우편함은 살구나무에 걸렸다는데

모래의 땅 그 너머에 있다는데

 

                                                       * 기형도 시인의 작품집 표제.

 

 

이소 (離巢)

 

 

 

문은 늘 샛강처럼 손짓했지

날마다 이소 하라 하라

뒤로 뒤로 새끼 치며 내빼며 나를 유인했지

 

어미 청호반새가 먹이를 물고

줄 듯 줄 듯 뒤로 물러서는 동안

새끼는 조금씩 더 멀리

날갯짓을 하지

어미를 향해서 문을 향해서

더 멀리 발을 떼고 어린 날개를 펄럭여 보는 동안 이소가 준비되는 거거든

 

노상 문은 시간 저쪽에 있다는 거

거리의 개념으로

좀씩 좀씩 물러앉는다는 거

넌 알고 있었니?

이제야 눈치채다니 나 바보 맞지

 

 

봄, 그 발긋거리는 것들

 

 

 

무희들이 돌아올 시각이다

이정표 하나

안전표지 한 조각 없이

무사 귀환할 수 있을까

하늘빛도 물빛도

파릇한 옹알이 눈치챘지만

자고 깨면 새로 당도한 풋것들의 북적거림에

덩달아 마음이 뜬다

취재라도 하듯

카메라를 치켜들고

봄의 경계를 쑤셔보지만

번번이 그들 착지시점을 놓친다

 

푸른 드레스 밑 흰 맨발이 보고 싶다

한밤중 세상의 잠 속을 빠져나가

가만가먼 서로를 부르는 소리 듣고 싶다

오늘밤 눈꺼풀 아래 초막을 치고 엿보면

푸른 족속들 흰 발꿈치가 보이지 않을까

춤추는 토슈즈 얼핏 드러나지 않을까

 

발 치고 울타리 치고

제 살비듬 하나도 들키고 싶지 않던 여자가

웬일로 웬일로

철 이른 뜰 앞에서

스륵 치맛말을 내린다

꽃무덤 둘, 라일락 꽃숭어린가 싶은데

깜박깜박 커서 비슷한 것이 뜨고 있다

내부로 가는 여자의 통로가

좀씩 열릴라는지

어쩔라는지

 

 

 

출처: 시집 『프렌치키스의 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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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인 / 1947년 경남 함양 출생.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8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온몸을 흔들어 넋을 깨우고』, 『나는 빨래예요』, 『광화문 네거리는 안개주의보』,『벽으로부터의 외출』,『모든 하루는 낯설다』,『전갈의 땅』,『프렌치키스의 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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