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문효치 시 보기(9편)

시치 2010. 11. 21. 17:57

시골집外/문효치  

 

뒤안에 늙은 감나무 한 그루 서있는데
허연 수염을 나부끼며 한 그루 서 있는데
잔기침 쿨쿨거리며 한 그루 서 있는데,


세어보면 천개 만개도 넘을 가지를 뻗어
세어보면 천개 만개도 넘을 감을 매달고
보채는 어린 가지와 감을 키우기 위해
수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서 있는데,


푸른 산 둘러리 삼고
높은 하늘 배경 삼고
침묵으로 버티어 서 있는데,


내가 어쩌다 시골집에 들르면
빈 집을 지키고 서 있는데.

 

시집  - 백제 가는 길 ( 1999년 문학예술)

 

 


사랑법1 

 

말로는 하지 말고
잘 익은 감처럼
온 몸으로 물들어 드러내 보이는


진한 감동으로
가슴속에 들어와 궁전을 짓고
그렇게 들어와 계시면 되는 것.

 

 


사랑이여 흐르다가 

 

사랑이여 흐르다가
물처럼 흐르다가


여울이 되어 소리도 내며 흐르다가
파도가 되어 몸살처럼 부딪다가


사랑이여
물처럼 거침없이 흐르다가
맑고 곱게 흐르다가


때로는 얼음처럼 꽁꽁 막히다가
다시 터져
속시원히 터져서 흐르거라
어허 사랑이여

 

 

 

다시 또 달빛에 대하여 

 

양수리 어디께 와서
달빛 한 마리 건져 올렸다.


아가미에 슨
검은 녹을 닦아내고
갈대들, 더운 입김으로
꽃을 만들어 올렸지만
피어오르는 것은
연기에 그슬린 검덩이었다.
 

저만치 언덕 기슭에
미국자리공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바람 앞에서

 


해 어스름, 구름 뜨는 언덕에
너를 기다려 서겠노라.
잎 트는 산가(山家), 옹달샘 퍼내가는 바람아,


알록알록 색실 내어
앞산 바위나 친친감고
댓가지 풀잎에 피리 부는 바람아,


꿈꾸는 이파리의 아우성을
하늘에 대어 불어놓고
보일 듯 말 듯 그림 그리어
강물에 들어가는 색(色)바람아,


감기어라 바람아, 끝의 한 오라기까지와
기다리며 굳은 모가지에 휘감겨
네 부는 가락에 핏자죽을 쏟아 놓아라


허물리는 살빛을
색(色) 바람아 감고 돌아
네 빛 중(中) 진한 빛의
뜨는 달의 눈물을 그려봐라.


너를 기다려 어두움에 서겠노라.
어디선가 맴도는 색(色)바람의 울음아,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서동의 기쁨 

 

 

두꺼운 구름을 떠밀고
나, 그대의 나라에 숨어들 때
선화여, 내 앞길에
하염없이 떠다니는 그대의 얼굴,


돌 같은 감자, 감자 같은 돌의 팔매질에
견고한 성벽도
물엿으로 녹아내리고
단내를 풍기며
나에게 걸어 나오시는 선화여.


전생의 질긴 인연이 옥빛으로 살아나
흘러들어오는 강물에
무수히 꽃피어 흐르는 그대의 얼굴.


그대의 알몸을 안고
내 마을로 들 때
감자밭은 황금의 동굴이 되고,


숲에서 바다에서
일제히 머리 들고 일어서는 빛,
풍장 치며 날으는 빛.


새롭게 열리는 하늘에서
땀을 닦느니.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허공에 태어나
수많은 촉수를 뻗어 휘젓는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될
온몸을 태워서

찬란한 한점의 섬광이 될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빛깔이 없어서 보이지 않고
모형이 없어서 만져지지 않아
서럽게 떠도는 사랑이여


무엇으로든 태어나기 위하여
선명한 모형을 빚어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 닿기만 해라
가서 불이 되어라

 

 


비천(飛天) 
 

 

어젯밤 내 꿈 속에 들어오신
그 여인이 아니신가요?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 있는
내 꿈의 문을 살며시 열고서
황새의 날개 밑에 고여 있는
따뜻한 바람 같은 고운 옷을 입고
 

비어있는 방 같은 내 꿈 속에
스며들어 오신 그분이 아니신가요?


달빛 한 가닥 잘라 피리 만들고
하늘 한 자락 도려 현금을 만들던

 

그리하여 금빛 선율로 가득 채우면서
 

돌아보고 웃고 또 보고 웃고 하던
여인이 아니신가요?

 

 

 

원촌의 저녁


 
저 너머 세상에서
건너 오고 있었다.


새들은 깃털에 붙어 있는
해 조각을 떼어 내어
감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다시 날아오르곤 했다.


나무는
저녁의 옆구리를 무너뜨리고 서서
한 송이 불꽃으로
어둠을 태우고 있었다.


연기 속에서
날아오르기와 내려앉기로
새들은
감나무를 몹시 흔들고 있었다.
화석처럼 굳어 있던
허무가 소리내며 타고 있었다.

 

문효치

1943년 전북 옥구군 옥산생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바람 앞에서」
196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산색」
시집 煙氣 속에 서서, 武寧王의 나무새, 백제의 달은 강물에 내려 출렁거리고, 백제 가는 길, 바다의 문, 선유도를 바라보며, 남내리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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