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손택수 시 보기(7편)

시치 2010. 9. 14. 02:32

송아지外/손택수

 

 

구들방 윗목 헌 가마니때기에선 두엄 냄새가 났다

두엄 속 씨고구마에 물을 주던 밤이었다

처마 밑 고드름이 한 자쯤 더 길어진 밤

할아버지 옆에선 송아지가 새근거리고 있었다

어미 뱃속에서 툭 떨어질 때 숨을 쉬지 못해

인공호흡을 시켰던 송아지

예정보다 일찍 나온 송아지는 유난히 야위어서,

방에서 사흘 낮밤을 꼬박 곤하게 새근거렸는데

어미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젖먹이

그 보드라운 털에 볼을 부비고 있으려면,

씨고구마 자줏빛 싹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고구마 싹처럼 송아지 머리에도 머잖아 뿔이 돋겠지

뿔이 돋으면 그도 어미소처럼

사흘같이 고구마 밭을 매러 가야 하겠지

눈꺼풀을 쓸어내리며 다독다독 지붕을 덮는 눈 속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노라면

잠 못 드는 어미의 쇠방울 소리에 답이라도 하듯

어메ㅡ물기가 많은 코울음 소리를 냈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명절 앞날 세탁소에서 양복을 들고 왔다

양복을 들고 온 아낙의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내 양복 주름이 모두

아낙에게로 옮겨간 것 같다

 

 

범일동 산비탈 골목 끝에 있던 세탁소가 생각난다

겨울 저녁 세탁, 세탁

하얀 스팀을 뿜어내며

세탁물을 얻으러 다니던 사내

그의 집엔 주름 문이 있었고

아코디언처럼 문을 접었다 펴면

타향살이 적막한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왔다

 

 

치익 칙 고향역 찾아가는 증기기관차처럼

하얀 스팀을 뿜어내던 세탁소

세상의 모든 구불구불한 골목들을

온몸에 둘둘 감고 있다고 생각했던 집

세탁소 아낙이 아파트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접혔다 펴지며 아련한 소리를 낸다

 

 

가슴에 묻은 김치국물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 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국물 한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방심(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나무의 수사학 (1)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 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던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먹는다는 것
도로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 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나무의 수사학(5) 

 

벚나무의 괴로움을 알겠다

꽃 피는 벚나무의 괴로움을 나는

부끄러움 때문이라 생각한다


퇴근길 지하철 계단 위로 벚꽃이 날린다

출입구 쪽에서 흩날리던 꽃잎 맛이

바람을 타고 계단에 날아와 앉는다


이 지하철 역 가까운 곳에서는 얼마 전

철거민들이 불타죽은 일이 있었지


계단 계단 누운 벚꽃을 밟고 오르며 나는 인어를 생각한다

떨어지지 않는 철거민 생각 대신

벚꽃 아래 사진을 짝던 여자들

종아리 맨살에 화르르 달라붙던 꽃비늘과

그이들 가슴에 익어갈 버찌.

버찌에 물든 입술처럼 푸르를 바다 생각에 젖는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다 도리질 도리질

언젠가부터 나는 꽃을 마음 놓고 사랑하지 못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춘투를 일고,

꽃향기 따라 닝닝거리는 트록 점포 앞에서는 유랑과 실업을 읽었다


벚꽃을 나는 이제 그냥 벚꽃으로만 보고 싶을 뿐인데,

어깨를 스치는 꽃비늘이 사라져버린 인어와

바닥을 씻고가는 물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도 같은데


여기는 불과 재의 시간을 지나온 먼지 한 점이 아직 눈을 감지 못하는 땅

숨결을 타고 들어온 먼지들이 쿨룩쿨룩 잠든 내 몸속을 하얗게 떠돌아 다니는 땅


꽃잎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구두 밑에서 으깨진다

절반쯤 으깨진 몸을 바닥에 붙이고

날아오를듯 말듯 들썩인다

푹 꺼진 계단 계단 제 몸에 찍힌 발자국을

들었다 놓는 꽃잎

 

 

나무의 수사학(6) 

 

 

  공원 화장실 옆에 신갈나무가 있다


  누구에게 머리채를 쥐어뜯기기라도 한 듯


  이파리 듬성듬성한,


  화장실 청소도구함 속에서 아낙이 밀걸레를 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하늘을 쓸고 왔나


  싸구려 파마기에 빠져나간 올올


  청소가 끝나길 입구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쩌다 아낙의 발뒤꿈치를 바라보는데


  해진 양말 밖으로 삐져나온 뒤꿈치가


  갈라 터졌다 속살이 다 보일 듯 불가뭄이 들었다


  저 마른 살에 바셀린 로션이라도 발라줘야 하는데


  아직도 세상 어딘가엔 양말 속에 축 나간 알전구를 받쳐 넣고


  수명이 다한 전구빛 살려내듯 실을 풀어내는 여자가 있지


  기운 양말을 신고 구석구석 방 소제를 하시는 어머니가 있지


  갈라진 발뒤꿈치에 찰칵, 들어온 불이 꺼질 줄을 모르는 화장실


  살갗 터진 나무도 꽃등을 켜들고 서선


  올 나간 머리카락 흐린 하늘을 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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