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고요/김인희
자신의 생을 요약한
색과
형태와
향기가
벌레에게 먹히지 않도록
기도해본 적 없다 꽃은
그 몸에 수없이 상처를 입히는 벌레들에게도
항거해 본 적 없다 꽃은
자신을 해석해 줄 모든 해석자들이 사라져도
아파해 본 적 없다
웃기만 하는 꽃
이유 없이 밟히면서도
하얗게 웃고만 서 있는 꽃은
자신의 생에 대한 해석을 원해 본 적이 없다
저 꽃
자신을 피워 준 그 꽃나무 지키며
그냥 그저 그 광야 지나가는 쓸쓸한 바람의 친구로 서 있다
자신의 품을 떠난 시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길목에 하얗게 웃고 서 있다
꽃은 생의 가장 높은 곳에 피는 것
자신을 피운 그 꽃나무 밑에
색을 묻고
향기를 묻고
형태를 묻고
그저 고요히 웃고만 서 있다 꽃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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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희 / 1947년 경북 봉화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수료. 199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아담의 상처는 둥글다』『별들은 여자를 나누어 가진다』『여황의 슬픔』『시간은 직유 외엔 그 어떤 것으로도 나를 해석하지 말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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