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꽃의 고요/김인희

시치 2010. 9. 26. 02:12

꽃의 고요/김인희

 

 

 

자신의 생을 요약한

색과

형태와

향기가

벌레에게 먹히지 않도록

기도해본 적 없다 꽃은

그 몸에 수없이 상처를 입히는 벌레들에게도

항거해 본 적 없다 꽃은

 

자신을 해석해 줄 모든 해석자들이 사라져도

아파해 본 적 없다

웃기만 하는 꽃

이유 없이 밟히면서도

하얗게 웃고만 서 있는 꽃은

자신의 생에 대한 해석을 원해 본 적이 없다

 

저 꽃

자신을 피워 준 그 꽃나무 지키며

그냥 그저 그 광야 지나가는 쓸쓸한 바람의 친구로 서 있다

자신의 품을 떠난 시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길목에 하얗게 웃고 서 있다

꽃은 생의 가장 높은 곳에 피는 것

자신을 피운 그 꽃나무 밑에

 

색을 묻고

향기를 묻고

형태를 묻고

 

그저 고요히 웃고만 서 있다 꽃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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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희 / 1947년 경북 봉화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수료. 199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아담의 상처는 둥글다』『별들은 여자를 나누어 가진다』『여황의 슬픔』『시간은 직유 외엔 그 어떤 것으로도 나를 해석하지 말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