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계절이 왔네/허수경
지난 해 사과나무는 휴식을 취했네
그리고 올해
저렇게 많은 아이들이 사과나무에게로 왔네
가지에다 저렇게 수많은 방을 걸어두고
나무는 아이들을 기다렸었지
푸른 계절이 시작될 무렵, 나무는 나에게 말했어
방을 보았니?
텅 빈 햇살 안에 열린 잠든 방을 보았니?
그 방 안에 푸른 우물이 하나 있지?
그게 너야
손톱을 깎아줄 아이 하나 없는 너를 위하여
계절은 딱딱한 아이 하나를 데려왔어
사과나무 밑에 서면 먼 노래가 들리는 듯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한 노래가 이 지상에 남아 있다는 듯
푸른 아이들이 부르는 즐거운 노래
푸른 아이들이 즐기는 그리운 시절
스물에 버린 조갑지 같은 화장품갑에도
이런 냄새가 났으면 했어
푸른 머리칼을 가진 저 잎새들의 저녁이면
어둠도 푸른 물에 들었네
입술을 열면 당신의 혀가 내 입 안에 든 것 같아
사랑노래를 부르며 랄랄라
나는 딱딱한 아이를 위해 여린 손톱을 자를 준비를 했네
휴식을 취하고도 손톱에 분홍물 들여줄
아이 하나 없던 나에게도
방 하나 주시는 계절이 왔네
사랑이 먼 휴식을 취할 때 고단했던 몸도 푸르러져
만취의 햇살이 사과나무의 방을 빼곡히 채울 계절 뒤에
저 아이를 깨물면 나를 깨무는 거라서 거나하게
나의 몸으로 취할 계절이 오고 있네
《시인세계》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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