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김덕규
만취해서 만추의 거리를 걷는 밤 이었어
길을 건너려는데 술에 취해 가눌 수 없는 몸을 가로등에 기댄 채 흐느끼던 앳된
여자애가 갑자기
허공에 대고 나직이 외쳤어
오빠,
이 얼마만의 다정다감한 우쭐한 호칭인가
오빠, 한때 전선에서 나라를 지키던 오빠, 학교에서 거리에서 정의의 진리를 찾아
헤매던 오빠,
어둑한 골목 끝에서 치한을 물리치던 오빠,
믿어라, 믿는다, 손만 잡아도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던 오빠,
그 오빠를 따라간 후로 감쪽같이 실종된 누이들, 결국 아무데도 못가고 오빠하고
사는 누이들아!
오빠가 없다. 전선은 여전히 팽팽하고
정의와 진리는 오리무중이고 치한과 도둑은 거리를 활보하는데
그때 그 오빠가 없다.
언제 어디서든 부르면 어김없이 달려오던 그 이름
오빠야,
지금 이 늦은 가을밤, 바싹 마른 낙엽처럼 곧 바스라질것 같은 저기, 길 건너
우리들의 빨간 물방울 원피스가 위험하다.
([신생]2009,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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