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신기섭 시 보기(5편)

시치 2010. 3. 11. 00:51

 

울지 않으면 죽는다.外/신기섭

 1

  세상에 나올때 나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나를 때렸다고 한다 오늘은 보답하듯 나도 그녀의 가슴을 때렸지만

 

2

  당신이 기르던 새를 내가 맡았네 당신 박수 소리에 울음을 울던 새 내 박수 소리에는 울지 않는 새 가만히 보니 방전이 된 새 그 가슴을 열고 힘세고 오래간다는 심장을 넣어주네 딸깍, 피 한 방울 같은 붉은빛으로 새의 귀가 밝네 내 박수 소리를 듣는 순간 눈꺼풀처럼 핏빛이 깜빡이네

  귓속에서부터 몸속까지 울음의 시간을 전하러 스며드네 뱃속에 품은 알, 전구가 부화할듯 환해진, 새는 그러나 울지 않았네 울음 떠뜨리지 않는 갓 태어난 아기 때리듯, 새를 때렸네 그러자 다행히 파란 하늘을 건드리고 온 듯 점점 푸르게 밝아지는 새의 플라스틱 날개 그 두 눈 속에는 분홍빛 동공이 한 점씩 새겨지네 울음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 울음임을 알았을까 울음으로 꽉 잠긴 듯 환해진 새 다시, 박수를 치네 새를 울리네 또, 울지 않았네

 

 

분홍색 흐느낌

 

이 밤 마당의 양철쓰레기통에 불을 놓고

불태우는 할머니의 분홍색 외투

우르르 솟구치는 불씨들 공중에서 탁탁 터지는 소리

그 소리 따라 올려다본 하늘 저기

손가락에 반쯤 잡힌 단추 같은 달

그러나 하늘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검은색.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일순간

그해 겨울 용달차 가득 쌓여 있던 분홍색,

외투들이 똑같이 생긴 인형들처럼

분홍색 외투를 입은 수많은 할머니들이

나의 몸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이제는 추억이 된 몸속의 흐느낌들이

검은 하늘 가득 분홍색을 죽죽 칠해나간다

값싼 외투에 깃들어 있는 석유 냄새처럼

비명의 냄새를 풍기는 흐느낌

확 질러버리려는 찰나! 나의 몸속으로

다시 돌아와 잠잠하게 잠기는 분홍색 흐느낌

분홍색 외투의 마지막 한 점 분홍이 타들어가고 있다

 

 

 집착

 

인사동 cafe vook's앞에 서 있는데

제 의족을 빼서 머리에 베고

길에서 잠자는 사내, 흐린 하늘 꽝!

천둥소리 사내는 눈을 뜨고 다시

의족을 끼운다. 마음에서

잘라버린 덩어리, 나 잠시 거기 머리를 베고 눈

감아본다 새랑해, 너를 아직도!

막 퍼붓는 가을비 번개의 섬광!

빗물 들어차 소름 돋는 끽끽,

의족 소리 마구 들뜨는 마음,

활짝 펼쳐지는 내 검은 우산 속으로

들어오는 섬광 같은 덩어리 너의

몸, 오래도록 증오의

온도 속 상처는 썩어 물러져서

네 몸에 내 몸을 끼우는 것, 함께

내딛는 것, 우리 한 덩어리,

우산 속에 혼자 서 있는데

나의 한쪽 어깨가 젖는다.

 

 뒤늦은 대꾸

 

빈 방, 탄불 꺼진 오스스 추운 방,

나는 여태 안산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며칠 전 당신이 눈을 감은 아랫목에,

질 나쁜 산소호흡기처럼 엎드려 있어요

내내 함께 있어준 후배는 아침에 서울로 갔어요

당신이 없으니 이제 천장에 닿을 듯한 그 따뜻한

밥 구경도 다 했다, 아쉬워하며 떠난 후배

보내고 오는 길에 주먹질 같은 눈을 맞았어요

불현듯 오래 전 당신이 하신 말씀: 기습아,

인제 내 없어도 너 혼자서 산다, 그 말씀,

생각이 나, 그때는 내가 할수 없었던,

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

큰 소리로 해보는 대꾸; 그럼요,

할머니, 나 혼자도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치 없는

눈발

몇,

 

나무도마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화색(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약력>
1979년 경북 문경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詩 ‘나무도마’ 당선
2005년 12월 사망
유고시집 ‘분홍색 흐느낌’

 

'시인의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시하 시 보기(8편)  (0) 2010.03.11
문혜진 시 보기(7편)  (0) 2010.03.11
문숙 시 보기(13편)  (0) 2010.03.09
거미 시 보기(13편)   (0) 2010.03.02
박서영 시 보기(7편)  (0) 201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