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나쁜 연애 / 문혜진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 거야
어린 시절 왜 엄마는 나에게
바람도 안 통하는
긴 플레어스커트만 입혔을까?
난 다리가 못생긴 것도 아닌데
회오리바람 속으로
비틀거리며 오토바이를 몰아 가는
불량한 남자가 좋아
머리 아픈 책을
지루한 음악을 알아야 한다고
지껄이지도 않지
오토바이를 태워줘
바다가 펄럭이는
바람 부는 길로
태풍이 이곳을 버리기 전에
검은 구름을 몰고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겠어?
註) 제니스 조플린: 27살에 요절한 여성 록가수.
그녀는 날것의 음성으로 노래한 최초의 여성로커였다.
시집 『질 나쁜 연애』(민음사, 2004) 중에서
시금치 편지 / 문혜진
나는 올리브 당신은 뽀빠이 우리는 언제나 언밸런스, 당신은 시금치를 좋아하고 나는 먹지 않는 시금치를 요리하죠 그래서 당신께 시금치 편지를 씁니다 내가 보낸 편지엔 시금치가 들어 있어요 내가 보낸 시금치엔 불 냄새도 없고 그냥 시금치랄 밖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지요 끓는 물에서 금방 건져 낸 부추도 아니고 흙을 툭툭 털어 낸 파도 아니고 돌로 쪼아낸 봉숭아 이파리도 아니고 숭숭 썰어서 겉절인 배춧잎도 아니에요 이것은 자명한 시금치 편지일 뿐이지요 당신은 이 편지를 받고 시금치 스파게티를 먹으며 좋아라 면발 쫙쫙 당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동네 공터에 개똥을 밟아 가며 당신을 위한 시금치 씨를 뿌리고 있답니다 시금치가 자라면 댕강댕강 목을 베어 버리겠어요! 그때......다시 쓰지요.
시집 『질 나쁜 연애』(민음사, 2004) 중에서
탕진 / 문혜진
가끔씩 난
똑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곤 해.
같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그러면 어떤지 알아?
하드보일드하게 지루하지 뭐.
전인권의 <행진>을 탕진으로 바꿔 부르는데
그것도 지루하면 펭귄으로 불러
그럼 정말 썰렁해지지.
전인권은 왜 행진에서 한 발짝 더 나가지 못했을까?
그러면 탕진이 됐을 텐데
스카이 라이프 광고에서 선글라스를 벗은 전인권은
애송이 개그맨의 폭탄 맞은 개그 같아.
펑크스타일로 뇌쇄적이야.
제대로 서글프다는 이야기지.
그 폭탄 머리를 만드는 데
노련한 코디네이터가 몇 시간을 주물러댄다지?
그의 선글라스를 벗길 수 있는 건
태양도, 비도 섹시한 허벅지도 아니야.
스타일리스트로 사는 것도
돈 앞에선 귀찮아진 거겠지.
하지만 누가 그를 비난하겠어?
탕진을 흥얼거리며 스니커즈가 닳도록 걷다가 문득,
지금 내가 부르는 이 노래는
원유를 잔뜩 부은 베트남 식 커피 같아.
하드보일드하게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지.
그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두 써버리겠어
아무 것도 아끼지 않겠어.
우리동네 미대사관 앞 전경 아저씨들도 탕진!
우리 삼촌을 닮은 과일가게 총각도 탕진!
붕어빵 파는 뚱뚱한 아줌마도 탕진!
피스!로 인사를 대신하던 시대는 갔어
아무리 외쳐도 평화 따윈 오지 않잖아?
탕진!
시집 『질 나쁜 연애』(민음사, 2004) 중에서
홍어 / 문혜진
내 몸 한가운데 불멸의 아귀
그곳에 홍어가 산다
극렬한 쾌락의 절정
여체의 정점에 드리운 죽음의 냄새
오랜 세월 미식가들은 탐닉해 왔다
홍어의 삭은 살점에서 피어나는 오묘한 냄새
온 우주를 빨아들일 듯한
여인의 둔덕에
코를 박고 취하고 싶은 날
홍어를 찾은 것은 아닐까
해풍에 단단해진 살덩이
두엄속에서 곰삭은 홍어의 살점을 씹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젊은 과부의 아찔한 음부 냄새
코는 곤두서고
아랫도리가 아릿하다
중복 더위의 입관식
죽어서야 겨우 허리를 편 노파
아무리 향을 피워도 흐르던
차안(此岸)의 냄새
씻어도
씻어내도
돌아서면 밥 냄새처럼 피어오르는 가랑이 냄새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밤
붉어진 눈으로
홍어를 씹는다
* <애지> 2007. 여름호
문신 / 문혜진
사람들은 죽겠다고 시를 쓰지
시에 대한 시가 얼마나 촌스러운지도 모르고
시를 천 편쯤 써서 여기저기 뿌려야
루이비통 가방 하나쯤 살 수 있을까?
시를 써서 부자가 될 수 없어
그것은 교복 입은 전인권과
자갈 언덕 위에서 섹스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다친 신경 세포 속 문신
토할 것 같아
죽을 것만 같아
나는 지금 문신을 새기고 있어
전기의자에 앉아 온몸에 침을 꽂고 고문당하는 기분이야
나부랭이들은 이걸 두고
'몸시'라고 하겠지
그래 나는 몸으로 시를 쓴다
그것도 '벌거벗고'
춤이라도 추고 싶군
파우스트가 빨래를 널고
백설 공주는 거울을 보며 면도를 해대고 있어
마돈나가 앉아서 아인슈타인의 검을 머리털을 젓가락으로
참을성 있게 뽑아주고
에미넴이 '나인 인치 네일수'로 뻑큐를 하다가
자기 코를 찔러 코피를 질질 흘리는 동안
당신은 뭘 했는데?
남 얘기가 아니지
이런 토할 것 같은 세상에서 도망쳐!
무거운 뇌의 하수인이 되지 말고
내치지 못한 지긋지긋한 그에게서 도망치자고!
그것만이 살길이야
표범약국 / 문혜진
청담동 표범약국에는 표범약사가 있지.
멸종된 줄로만 알았던 표범약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인터넷을 하다가
귀찮은 듯 인공눈물을 던져주지.
호랑이연고도 팔고
낙타거미의 독이 든 마취제도 팔지만
새끼표범 칩으로 만든 구강청결제라든가
호피로 만든 무좀 양말 따위는 팔지 않아.
인간의 육체를 포장해온 무수한 환상을 제거하고
오로지 생물학적으로만 본다면
인간은 맹수의 공격 본능으로 학살을 일삼고
모피를 찬양하며
발정제를 사러 약국에 가지.
청담동에는 루이비통이 있고
구찌, 프라다, 진도모피가 있고
표범약국이 있지.
이 겨울 다국적 패션거리에는
베링해 섬 출신의 북극여우털로 만든 자켓이 있고
덫에 걸리면 다리를 자르고 도망간다는
밍크쥐의 가죽을 수백 개 이어 만든 코트가 있지.
내가 만약 난파선의 선원으로
북극여우의 섬에서 겨울을 보내게 된다면
내 가죽은 도대체 어디에 쓰일 것인가?
물어버리기 위해
이빨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이빨이 없어서
물지 못하는 것이라고,
청담동 표범약사는
밤이면 긴 혀로 유리창을 핥으며
우아하게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비행 / 문혜진
이제는 영악할 법도 하여
쉽게 열정에 빠지지 않겠지만
어린애들은 시시하고
늙은 남자는 비린내 난다.
무엇보다 나른한 요즘의 내가
연유를 듬뿍 넣은 베트남식 커피를 마시다
주술을 거는 일은 특별할 것도 없다.
국경도 없는 구름 속
새벽 비행기 안에서
해가 지는지
뜨는지
구름은 온통 붉은 카펫처럼 뭉클뭉클한데
좁은 의자에서 몸을 구부려 잠이 들다가
비구니만 사는 고요한 절간의 깊은 계곡
새끼 낳다 죽은 천년된 고양이의 울음과
오래된 기와에만 산다는 푸른 이끼의 안타까운 전설
그러나 그런 전설쯤은
레퍼토리를 달리하여 어디선가 들어본 오래된 노래 같아.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만 찾아온다면
뻑뻑한 콘택트렌즈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순간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아 주겠어.
일생을 통해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 나는 또 고도 오만 피트의 구름 속에 있겠지.
아무렇지도 않게
안녕 하고 인사를 해야지.
문혜진 시인
1976년 경북 김천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한양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졸업.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질 나쁜 연애』.
「표범약사의 비밀 약장」외 49편으로 2007년 김수영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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