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박서영 시 보기(7편)

시치 2010. 3. 2. 15:03

극장 의자.외/박서영

 

 

나는 순정한 눈빛을 가진 짐승을 만나러 간다

영화가 끝난 뒤 맨 뒷자리에 구겨져 앉아 있을 때

 

음악은 초조하게 스크린 밖으로 흘러나가고 불은 성급하게 켜졌고

청소부는 너무 빨리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의자가 짐승처럼 나를 안아 줄 때

외로움은 잔혹하구나, 연인들이 하나 둘 극장을 빠져나간 뒤

맨 뒷자리 누군가에게 손목 잡힌 채 문득 생각한다

 

외로움은 극장 의자에서 시작되어

극장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극장 의자를 떠나는 것이라고

 

텅 빈 극장 의자들은 맹수가 아니라 착한 짐승이구나

어두컴컴한 방에서 무리지어 참 착하게 순하게 살고 있구나

이곳이 내 실존의 장소처럼 불안하고 평화롭다

 

뭉쳐진 먼지덩어리들

자막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청소부는 너무 빨리 상황을 정리한다

이곳이 내 이야기의 시작이면서 끝일지도 모르는데

스크린의 문장들이 도마뱀처럼 뛰어 달아나고 있다

 

 

포도밭 국숫집

 

 

 

포도밭 국숫집 평상에 앉아 국수를 먹네

흰 면발 한 가닥 한 가닥 양푼이 속의 국수

멸치와 김치가 발굴되고 계란과 부추가 발굴되네

반죽이 밀봉이라면 국수 가락들은 풀려나온 죄수들 같네

반죽이 침묵이라면 국수 가락들은 유령의 대화 같네

금방 사라지고 마는 투명한 대화

포도밭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평상에 앉아 국수를 먹네

햇살의 뼈를 끓이니 이리 부드럽고 쫄깃해

밀밭으로 도망친 죄수들을 붙잡을 수 있을 것 같네

유령의 대화를 받아 적을 수 있을 것 같네

포도밭을 눌러쓰고 찌그러진 양푼이 속의 국수를 먹네

여름은 짧고 포도알은 아직 익지 않아서 새콤한데

후루룩 먹은 한 다발의 길들이

태양을 묶어 내 앞에 잡아올 수 있을 것 같네

 

 

업어준다는 것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잇다

가끔 고개를 들어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

 

단풍 들다 



내가 뱉은 신음은 붉게 물들었다 그년, 지느러미가 참 곱군, 급하게 지나가던 바람이
화상 입는다 하혈을 끝내고 밑동을 자르면 드러나는 절개지의 슬픔, 상처는 깊었다
아무리 파헤쳐도 중심은 보이지 않고 엉켜있는 핏줄들만 환했다 그년, 속은 더 곱군
관절 가득 물을 채우고 쿵쿵 뛰고 싶었다 밤 12시. 응급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쏟아지는
피를, 온 몸의 盞을 비우고 싶었다 그러면 낯뜨거운 盞들 속으로 빛들은 몰려들 것이다
나는 생명의 피를 새로 수혈받고 참말 아름다운 아이를 가질 그날을 기다린다 몸 속의
피를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이 하혈의 끝, 산부인과는 오늘도 만원이다

 

생애전환기

 

 

의료보험 공단에서

생애전환기의 건강검진통보를 보내왔다

환승역에 닿아서 겨우 종이 한 장 받은 기분이다

겨우 몇 걸음 걸었을 뿐인데

어디로 갈아타야 할 지 모르는데

발부터 머리꼭대기까지 잔뜩 긴장해서

통보서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무서운 병명들이 빼꼭히 적혀있다

위꽃, 유방꽃, 자궁경부꽃, 당뇨꽃, 빈혈꽃, 폐결핵꽃, 정신질환꽃,

끝에 꽃을 붙이니

더 무서운 생각이 들어 정신이 번쩍 든다

꽃의 짧은 생애

붉고 아름다운 꽃의 투구와 방패를 뒤집어쓰고

생애전환기를 건너야 한다

건너는 것도 오르는 것도 갈아타는 것도

어쨌든 한 생애를 굴러다니는 일

무 자르듯 딱 생애전환기라니!

어떤 절벽에서 어떤 절벽으로 뛰어내리라는 건지

허공에서 바닥인지, 바닥에서 허공인지

그 경계를 지우느라

마음이 당신에게 달려가는 줄도 모르고,

1분1초가 내겐 생애전환기라는 것을

저 꽃이 다 아는데

저 새가 다 아는데

저 바람이 다 아는데

병(病)의 기원이 적힌 흰 종이 속의 꽃밭 

꽃과 고통의 얼굴이 서로를 통과하고 있다

 

빈집


댓돌 위에 나란히 놓인 신발 한 켤레,
빨랫줄엔 며칠째 걷지 않은 듯한 옷과 이불,
늦은 봄날 개복숭아 나무의 병실을 떠나
기어코 짓뭉개져 가는 꽃잎들,
들어가야 할 곳과 빠져나와야 할 곳이
점점 같아지는 37세,
시간의 계곡을 질주하는 바람,
더 이상 내게 낙원의 개 짖는 소리는 들려주지 마!
내용 없이 울어대는 새 몇 마리,
저녁이 검은 자루처럼 우리를 덮는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일몰 무렵이던가

   아이를 지우고 집으로 가는 길

   태양이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갔다

   그 후론 내 몸에 온통 물린 자국들이다

   칸나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칸나 잎사귀 사이의 투명한 거미집

   불룩한 배에 노란 줄무늬의

   거미가 천천히 허공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 불룩한 배를 터뜨리고 싶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물고 사라진다

   거미는 무거운 배를 끌어안고 천천히

   태양의 산부인과로 들어간다

   집게로 끄집어낸 태아들이

   여름대낮 칸나로 피어난다

   관 뚜껑이 열리듯 꽃이 피면

   내 몸은 쫙쫙 찢어진 꽃잎이 된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호안 미로의 그림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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