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

[스크랩] 구름의 장례식 (외 3편) / 김충규

시치 2010. 1. 11. 14:00

구름의 장례식 (외 3편)

   김충규

 

 

 

비를 뿌리면서 시작되는 구름의 장례식,

 

가혹하지 않은 허공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엄숙한,

날아가는 새들을 휙 잡아들여 깨끗이 씻어 허공의 제단에 바치는,

죽은 구름의 살을 찢어 빗줄기에 섞어 뿌리는,

그 살을 받아먹고 대숲이 웅성거리는,

살아있는 새들이 감히 날아갈 생각을 못하고 바르르 떠는,

하늘로 올라가는 칠 일 만에 죽은 아기의 영혼을 아삭아삭 씹어 먹는,

산 자들은 우산 속에 갇혀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만이 참여하는,

지상에 흥건하게 고이는 빗물에 살 냄새가 스며 있는,

그 순간 나무들의 이파리가 모두 입술로 변해서 처연하게 빗물을 삼키는,

손가락으로 빗물을 찍어 먹으면 온몸에 구름의 비늘이 돋는,

 

비를 그치면서 끝나는 구름의 장례식.

 

 

아무 망설임 없이

 

 

 

살얼음 같은 어둠을 쪼개며 나비가 날아왔다

그 틈새로 딱딱해지지 않은

액체의 어둠이 주르르 쏟아졌다

날개가 젖어서 나비의 비행이 기울었다

관을 열고 온몸이 얼룩진 시신이 나와

나비 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무 망설임 없이 관 속으로 나비가 들어갔다

펄렁임을 멎고 나비가 누워 눈을 감았다

쪼개졌던 어둠이 봉합되는 소리

미세하게 허공을 긋고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스르르 관이 닫히는 소리

시신이 관을 짊어지고 숲으로 사라졌다

질척한 흙길에 발자국 하나 남지 않고

고체가 된 어둠이 딱딱하게 숲을 감쌌다

쥐들이 다 죽어버려서 숲이 고요했다

 

 

석양

 

 

 

거대한 군불을 쬐려고 젖은 새들이 날아간다

아랫도리가 축축한 나무들은

이미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매운 연기 한 줌 피어오르지 않는 맑은 군불,

새들은 세상을 떠돌다 날개에 묻혀온

그을음을 탁탁 털어내고 날아간다

깨끗한 몸으로 쬐어야 하는 맑은 군불,

어떤 거대한 흰 혀가 몰래 천국의 밑바닥을 쓱 핥아와

그것을 연료로 지피는 듯한 맑은 군불,

숨 막힐 듯 조여 오는 어둠을 간신히 밀쳐내고 있는 맑은 군불,

그곳으로 가서 새들은 제 탁한 눈알을 소독하고 눈 밝아져

아득한 허공을 질주하면서도 세상 훤히 내려다보는

힘을 얻는다

 

 

모과나무 밑

 

 

 

부음이 왔다 뼈를 무너지게 하는 어떤 부음에 비하면 견딜만하다

모과나무에 모과가 열리지 않는다 백 년 동안이나

앞으로 백 년이 더 오기 전에 모과나무와 나 둘 중 하나는 사라질 것이다

내가 먼저 죽으면 모과나무가 가장 먼저 부음을 전해들을 것이다

고양이가 자주 모과나무 밑에서 밤을 보냈다

아침에 고양이가 머문 자리에 새털이 널려 있곤 했다

그 깃털을 모으며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까

그 무엇을 누구에게 줄까

부음의 주인에게 마지막 선물로 줄까

하룻밤쯤은 고양이를 품에 품고 잠들어보고 싶은 모과나무 밑,

고양이가 피 한방울 안 튀게 어떻게 작은 새를 처리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모과나무 밑,

그런데 고양이는 한 번도 그 광경을 들킨 적이 없다

고양이에게 날개가 달렸다고 믿는 아침이 늘어갔다

내 무릎 속에서 시큰시큰 앓는 새를 고양이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

그 새는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올 때면 더 심하게 앓아

그때마다 진통제를 먹어야 했다 다행히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올 땐 고양이도 모과나무 밑에 와

잠을 청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날은 새도 오지 않았으므로

나도 걸음을 걷는 게 힘들어 문을 꼭꼭 닫아놓고 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런 날 고양이는 어디를 서성거리는 걸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날개를 펴고 어둠 속을 날아다니는 걸까

새로운 부음이 왔다 뼛속에 먼지 한 점 얹히는 듯했으므로

뼈는 무사했고 내 무릎 속의 새가 앓는 소리 대신 퍼덕퍼덕 날개 펴는 소리를 냈다

모과나무 밑, 새를 품에 품고 고양이가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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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규 / 1965년 경남 진주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물 위에 찍힌 발자국』『아무 망설임 없이』.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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