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에 누운 사람
묵은 신문지 끈 떨어진 해먹처럼 펼쳐놓고
그가 한 번 더 잡풀 속에 파묻혀 있다
어떤 생각도 다 가지고 누운 것 같으다
어떤 생각의 내용도 다 흘려버린 것 같으다
사랑이 열매였다면
저이는 싹쓸이 해거리하듯 아예 누워버린 나무 같으다
풀밭에 무거워진 저이에게
'作破'라는 아호를 짓고 휘파람 불며 가는 들길,
상갓집에서 버린 빈 조등 弔燈 속에
낯선 풀벌레들이 뛰어들어, 내 울음도 밝힐 만하다
뒤돌아서면
저이는 풀들의 아랫도리에 모로 누워 있고
나는 봉분을 다 짓지 못한 산역꾼마냥
저이가 덮은 광활한 하늘 이불이 서서히 저무는 걸 봤다
한순간 저이 위로 송장메뚜기 포물선을 덮었다
언제든 들고 나는 투명한 무덤이 지어졌다 언제든
바람을 끌어들여 풀들이 제 몸을 염(殮)하는 소리를
소름끼치며 온몸에 심는 사내가 있다
수련 농담 1
여름 끝물이다
그년 참 무더웠다
그곳 한번 더듬자니 속옷이 백여덟 벌이나 될 줄이야
초록 속곳치마만 늪물 위에 띄워놓고
매미 소리로 귀싸대기를 맞는다
속살 한번 더듬지도 못하고
늦여름은 나보고 청춘에서 손 떼란다
어중이떠중이 풋사랑도 진품이던 청춘이 물러가면
꽃 피는 것도 기술이어야 한단다
얼굴도 한번 보잤더니
얼굴도 참 뽀얀 속살이라고 낮에 오란다
손으로 펼칠 기술을 내려놓고
눈길로 샅샅이 더듬고 엉키다 오는 낮거리,
그년은 해질녘이면 얼굴도 문 닫아건단다
물빛에도 덥던 치마만 벗겨주고 돌아오는 길,
묵은 울음이 터졌다
내가 나에게 덥썩 안긴다
너무 고운 빛이 사랑을 앞질렀다
색(色)만 쓰다가 마음을 다 짓지 못했다니
아껴 먹는 슬픔
재래식 화장실 갈 때마다
짧게 뜯어가던 두루마리 화장지들
내 밑바닥 죄를 닦던 낡은 성경책이 아닐까
떠올린 적이 있다
말씀이 지워진 부드럽고 하얀 성경책 화장지!
외경의 문밖에서 누군가 나를
노크할 때마다 나는
아직 죄를 배설 중입니다 다시
문을 두드려주곤 하였다
바닥난 화장지, 어느 날 변기에 앉아
내 죄가 바닥나버린 허탈에 설사라도 나는
기분에 울먹인 적이 있다
그러나, 천천히 울어야지
저 문밖의 가을, 깃동잠자리 날개 무늬를 살필 수 있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리에 토란잎을 쓰고 가는 아이처럼
슬픔에 비 맞아 가는 것도
다 구경인 세상이듯이
때론 맨발에 질퍽이는 하늘을 적시며
무거운 꽃밭
늦가을까지 남아 있는 화단의
장미꽃 몇 송이,
저 가벼운 역사(力士)는
지금 얼굴이 붉게 물들도록
땅을 들어올리고 있다
장미꽃 뿌리가
움켜쥐듯 뻗어간 흙들은
저 가벼운 꽃의 향기에도
늘씬 들어올려진다 허공으로
날아가 장미의 가시에게로
모든 유혹이
이끌리기도 한다
겹겹의 붉은 장미 꽃잎이
떨어질 때서야
한숨처럼 화단의 흙들은
위험한 끝을
잠시 갖는다
시방, 꽃들이 들어올린 것은
흙 알갱이 하나 흘리지 않는 꽃밭의 전부
저 꽃들의 가벼운 탄성,
천만근처럼 무거운 가벼움이다
기침소리
씁쓸한 낮거리 얘기란다
그가, 한낮의 사창가를 거닐다가, 잡혀 들어가듯
한낮에도 밤인 그녀의 방, 배 위에 배를 얹고
아랫도리를 놀리던 순간, 신음 소리 뒤에
억눌린 잔기침 소리가 간간히 올라오더란다
섹스가 집중이 아니 되더란다 아래 사람의
잔기침 소리가 자꾸자꾸 귀청을 밟아와
무슨 꾸지람처럼 그의 몸으로 전해오더란다
그녀의 배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저 혼자
지구라는 땅별하고 홀레붙고 있는 것 같아
말없이 땀 흘리고 외로워지더란다
잔기침 소리를 지우려고 더욱더 거짓 신음 소리가
애쓰듯 기침 사이사이에 피어나더란다
일 마치고 환한 대명천지에 드러나 보이는
유곽이, 폐가된 꽃 대궐 같더란다 기침 소리
온몸으로 전해 듣고 나오니
화대가 아니라 약갓을 주고 나온 것 같더란다
어느새 봄꽃들 다 범하듯 덮어버린 초록 잎새들만
바람에 가랑이 벌렸다 오므리는 그 사이로
밭은 기침을 내보내던 앙상한 그녀의 아랫도리 같은
묵은 줄기가 못 볼 것처럼 자꾸 눈에 밟히더란다
모과 1
불뚱이처럼 서서 그가 주워섬기는 말을
침묵은 허공에게 건넨다
왕년에 한 주먹 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주먹보다 술에 더 길들어 있다
왕년의 주먹은 이제
술병을 아니 술잔을 드는데도 쉽게 떨린다
왕년이 다시 온다면
그 당찼던 돌주먹을 잠시만 가을볕에 매달아놓고,
보기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
창가에 골똘이 굄질해놓아라
상심한 당신 속내를 아무도 씹지 않으니
왕년은 갔다고 슬픈 주먹다짐은 마라
제자리서 천 년을 바위 묵어도
향기는 물러터지는 자의 순애보인 것,
그 색이 보이지 않아도 왕년은 살아 있는 것
주먹을 쥐고도
주먹을 펴 주위를 보듬는 향기여
탑
새벽에 상가 골목을 걸었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 열댓 개가
층층이 포개진 채
굵은 쇠사들에 묶여 있었다
의자 위에 의자가 앉아 있고
의자 위에 앉은 의자 위에 또 다른 의자가
앉아 있는 꼴이 계속 높아진다
의자가 제 안에 의자를 앉히는 것보다
사람이 제 안에 사람을 품는 것이 아득해서
새벽에 몰래 잠든 딸애를 안아본다
오래도록 빈 둥지였구나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마음을 채우는 것이 더 어려워
빈 의자나 상수리나무 빈 둥지를 볼 때면
하나같이 껍질처럼 포개버리기 일쑤였다
그래
비어 있는 것을 비어 있는 다른 것으로
끝없이 포개버리면 그 끝에
제일 처음 이슬 맞으며 마지막 포개지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 너무 많이
사람들을 포기해온 하느님의
하늘이 엉덩이를 내릴지 모른다
교우록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말 못할 것들이 흩날렸다
내리는 눈은
친구가 아니라서
바닥에 쌓이거나
행인의 발길에 밟힐 것이다
내리는 눈 속에서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문밖에 나와 있다
호랑이 한 마리 나타나 울부짖으면
내린 눈들이 화들짝 놀라
하늘 속으로 눈 내리러
다시 올라갈 것만 같았다
친구는, 내려오는 친구는
저렇게 하얗고 속절없이 많아도
다 내가 더럽혀야 할 눈이었다
내리지 않는 눈이
가장 순수한, 착한 눈이었다
친구는
죽은 친구가, 아직 만나지 않은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다
이미 치워진 눈과
치워진 눈 위에 밤을 새워 내리는 눈과
눈을 뭉치며 달아나는 친구의 뒤통수에 정확히 박히는 눈과
말없이 뒤란 그늘 속으로 숨어드는 눈과 함께
친구는,죽은 친구가 제일 착한 친구였다
비둘기
미사에 늦어 신부님의 강론은 반토막이다
가끔 농담이 흙눈처럼 섞인다
어디서 불은 면발을 거두고 있는 당신이 보인다
문득, 성령은 비둘기처럼 내린다, 고 하신다
나는 자꾸 흰 유화물감 같은 비둘기똥만 가려 떠올린다
경비대원이던 친구가 귀곡성처럼 떠올리던 교도소의 밤 비둘기소리만 불러온다
아이가 던진 과자 부스러기에 달려들던 발목 잘린 비둘기의 절뚝거림을 생각한다
신부는 재차, 성령은 비둘기처럼 내린다, 고 하신다
나는 자꾸 들고양이도 건드리지 않는 비만한 비둘기의 주검을 데려온다
신부는 더 이상 강론을 펼치지 않는다
평화롭다, 강론 끝낸 뒤의 하느님도 건드리지 않는 짧디 짧은 적막들
속에 흙눈이 잠시 젖은 눈을 반짝 떴다 감는다
어디서 남은 우동 국물을 들이키는 당신이 보인다
가끔은 비둘기가 없는 광장을 걷는다
하늘도 변두리가 있어
비둘기들이
그 변두리 하늘에다 소란을 좀 섞어주고 오는가 보다
공기가 다른 일요일을 저들도 잿빛 날개에 묻혀 오는가 보다
다시, 봄날은 간다
해장국집 찾으러 가는 사내의
늦은 토요일 아침,
차가운 봄비를 만난다
거리의 담벼락과 전봇대마다
심령대부흥회 포스터가 불온전단처럼 나붙고
문든 罪지은 일들
한꺼번에 꽃무더기로 피어나는
오늘은 近東의 벗꽃축제 마지막 날,
난 말 없이 비 맞아 가는
유순한 짐승 한 마리!
내 이름을 다시 지어다오, 이제금
내 사랑의 거푸집을 다시 짜고 싶은 해장국집
창가 식당에 앉아 이마에 돋는 땀을
이 빠진 투가리에 떨구며
前生의 짐승, 내 뼈마디 같은
돼지뼈를 핥아먹으며 쫓을 잊었다
아조아조 숨막히게 술땀을 쏟으며
이 봄이
빗속에 한 채 꽃상여로 떠나는 창밖을 본다
꽃을 팔아 한 몸의 생이
시작하는 어린 창녀의 손을 잡고
변두리 샛강둑 버드나무 밑에서
누이야, 세상엔 바람이 분다
말해주고 싶었다
누이야, 꿈 없이도 다시 봄날은 간다
수도꼭지
저녁이 온다
어딘가에서 나는 새고 있다
처음, 그 울음으로 시작하던 처음에
나는 조금씩조금씩 틀어져
여지껏 새고 있다
물소리, 들리락 말락
나를 두고 온 마음 곳곳에서
나는 눈물로 기억으로
얼룩진 환멸로 새고 있다
세면서
결코 단숨에 잠글 수 없다는 것을,
눈감고 잠든 사이에도
담금질한 꿈의 呪術로도
그것은 잠글 수 없다
마지막 단 한 번의 손길이
내 尿失禁의 목숨을
잠글 수 있을까, 죽음이
내 몸을 잠그는 순간, 영혼은
반대로 더 세차게
저 깊은 곳으로
틀어져 별처럼 쏟아지리라
계단 위에 죽어 있는 쥐
풀밭 너머의 강물을 다 퍼마시지 못하고
쥐는 계단 중간쯤에 죽어 있다 햇살이
이제야 쥐구멍을 다 볕들게 한 기분이다
죽음이 이렇게 넓은 곳에
쥐의 전생을 쓰러뜨려 놓고 있다
한없이 출렁이며 흐르는 샛강은
쥐의 귓바퀴를 소리로서만 돌아나가고
풀밭조차 건드리지 못한다 강물은
아득한 곳만을
꼬리가 먼저 흘러들고 있다
"나는 모든 몸통의 머리를 끝으로 봐왔다!"
봄 햇살이 내리쬐고
쥐의 털들이 오후 동안 따뜻해진다
식을 줄 모르는 것은 저녁이 아니다 저녁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 밑에 죽은 것들만
차갑게 내버려둔다
강의 버드나무들
쥐가 누운 계단 쪽으로 가는 바람을
쓰다듬어주고 있다. 계단은
푸른 둑방을 향해 박혀 있다. 사람 발길이 없어
어느 쪽으로도 올라가거나 내려오지 않는다.
쥐의 주검은 그 중간에 놓여 있다
정신병원으로부터 온 편지
가상이 내 몸에 알을 스는 밤, 이다
먼 기억엔 따뜻한 정신 병원에 쓸쓸함으로 갇혔던
누이가 있다. 그때 그녀는 정신 분열증이었으나
나는 정신 미분열증으로 고생하던 청춘, 이었다
그래서 지금 생각, 한다 모든
병명이 있는 입원은 행복하다 갇혀서
따뜻할 수 있는 자들의 夢幻이
구름처럼 떠다니다 낮잠에 빠지는 사람들 속에
어린 꽃잎 같은 소녀가 남몰래 내 몸에 편지를 숨겼다
문득 내 몸은 붉은 우체통이 되었다, 집에
전화 연락 한번 해달리 부탁한 그 쪽지엔
탈출보다 극심한 폐쇠의 속살이 얼비쳤다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온갖 것들의 세상, 그곳으로부터
아무런 편지 없을 때, 나는
오지랖 좁은 시들을 쓰며 그대 병동의 밤을
가끔 떠올린다. 이곳은 아직 수용되지 않았
을 뿐
증세를 다 호명할 수 없어 그냥 놔둔 露天
병원!
따뜻한 간호사가 필요하다, 아직
꽃나무들, 먼 새들과 함께 어떤 증세로든
살아 있어
무릇 야릇한 소음과 정적으로 희망적이다
누이가 앓고 있는 만큼 소녀가 꿈꾸는 세상만큼
세상의 얼굴은 더 늙어 보이고, 늙어서 고치는 것은
목숨을 다치는 일뿐, 누군가 아직도 식물의 맘으로
동물의 상처를 앓고 있다
비 온 뒤
놀이터 젖은 모래밭 근처에서
몸 낮게 도사린 고양이를 만났다
고양이는, 숨은
정적의 눈빛을 던졌다 재빨리
사라진다. 고양이의 눈은
정적의 힘으로 가득하다
어제 휘파람새는 아직 보이지 않고, 매미는
보이잖게 빗줄기를 통과시킨 허공의 용지 위에
울음으로 도트-프린팅한다. 버려진 항아리들은
깨진 조각으로 박살난 두개골을 부르고 그
두개골 안쪽엔 작은 기척에도 몸 둥글게 마는
쥐며느리들을 모으고 있다. 저 짙푸른 옥수수밭엔
거꾸로 매달린 사마귀가 수놈을 부르고 있는지 모른다
어디, 눅눅한 쥐구멍에도
당장 볕들 날이 필요한 건 아니다
내 안에 수없이 뚫린 쥐구멍들은 때로
서로에게 낯선 벽으로 맞서고 있다
모든 밑으로 빗방울들이 매달려 있는 시간,
나를 마지막으로 떨굴 수 있는 건
오직 환멸뿐이다
저녁의 제비
저물녘, 제비 한 마리가
하늘 높이 구름장 밑을 날고 있다
발밑에
조금씩 거칠어지는 씀바귀 하나
자꾸 날카로운 잎 끝을
가늘게 삐치고 있다 모든 처음이란 그렇다는 듯이
아욱 잎사귀 뒷면으로 숨는
풍뎅이 한 마리, 쇠울타리를 마악 타넘는
환삼넝쿨의 꺼칠한 덩굴손,
저녁을 들여다보는 우멍한 눈길!
제비는 다시 한 번 급선회를 한다
내게도 나를 타넘어가는 날렵한 날개와
몇 박자의 스텝에 내 영혼을 까무러치게 할
춤과 제비꼬리 같은 말솜씨가 있다면, 나는
불륜의 에덴으로 갔을 것이다
제비가 돌아갈 때, 강남은
내 안에서 不夜城을 이룬다
나는 텅 비어서야 미쳐버리는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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