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이 돌고 있다. 外 /송찬호
역병이 돌고 있다 멀리서 목탁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린다 모두들 서둘러 귀가하고
문을 닫아 걸고 귀를 막는다
병을 물리칠 수 있다면,
벽을 일으키고 그 절벽마다
칼에 힘을 주어 경을 새긴다
이윽고 얼굴을 깊이 가린 병자가 거리 저편에서 나타났다
얼마나 대가리를 쳤는지 눈 코 입이 문드러진
벌써 천 년 전에 유실되었던 목판본 얼굴
자기의 목을 쳐 내고 부처의 머리를 얹었다가 부처마저 쳐 내고......
그가 머리에 썼던 것을 벗었다
모가지가 떨어져 나간 혼 없는 육신의 목에 훤하니 달덩어리를 받쳐 얹고!
그가 옆을 지나갔다 달 가듯이!
칼을 뒤로 감췄다
멀리서 낭랑하게 경 읽던 소리
뚝, 그치고
그가 오늘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오늘 밤 그곳에도 달이 뜨리라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
외과 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
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
냉장고 속 냉동된 각 진 고깃덩어리의 식은 욕망과
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
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
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 서듯
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
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
미래는 죽었다 산 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
그 완성을 위하여
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
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풍성한 과일을 볼 때마다
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
여기 그가 잠들다
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머나먼 비단길을 구부려 낙타 등을 만들어 타고 가고
입 벌린 나팔꽃을 구부려 비비 꼬인 숨통과 식도를 만들고
검게 익어 가는 포도의 혀끝을 구부려 죽음의 단맛을 내게 하고
여자가 몸을 구부려 아이를 만들 동안
굳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고
오랜 회유의 시간으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놓았다
말을 구부려 상징을 만들고
달을 구부려 상징의 감옥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았다
달이 둥글게 보인다
달이 빛나는 순간 세계는 없어져 버린다
세계는 환한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오랫동안 말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것이 인간이다
말은 이 세계를 찾아온 낯선 이방인이다
말을 할 때마다 말은
이 세계를 더욱 낯설게 한다.
희망
쇳덩어리는 망치질 횟수를 기억하고 있을까
망치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내게 그런 조그만 권력이 주어진다면
희망은 국가와 법을 만들 수 있다
원한다면 어디든 희망구역으로 선포할 수 있다
희망구역에서 아지랭이처럼 나른하게 솟아오르는 지하생활자들
희망은 도처에 우글거린다 사제가 뚱뚱한 식당주인으로 보이고
그 식당의 밥찌꺼기를 핥으며
희망이 어떻게 사육되는가를 보았다
개새끼, 하고 대들어도 판사는 절망에게 희망을 선고하고
의사는 절망에게 희망의 진단서를 송부하고
긴 복도를 걸어오는 희망의 발자국소리
문을 노크하는 희망의 인기척소리
그 고문기술자의 가방 속에는 얼마나 많은 희망이 들어 있던가
한쪽에서는 기계를 세우고 공장을 점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식수와 전기를 끊고 통신마저 차단시켜도
그래도 희망은 인형공장 송사장 편에 있다
그는 오늘도 모처에 예쁜 인형들을 팔아넘겼다
이제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군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예비군복을 갖고 있다)
그 많은 산업예비군 중에서 내게 통지서가 날아왔다
나는 오늘 전선으로 떠난다 아직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며
역 한구석에서 나는 오래 보지 못할,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지금 한때 직업과 계급을 혼동해도 좋을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래도 이 거대한 도시에서 먹고 자고 일도 할 수 있는
이런 방이라도 하나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여자는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하며 가랭이를 벌렸다
하루 일을 마친 사내들이 어둠처럼 그 거리를 향해 몰려갔다
동백 열차
지금 여수 오동도는
동백이 만발하는 계절
동백 열차를 타고 꽃 구경 가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인 삼월의 신부와 함께
오동도 그 푸른
동백섬을 사람들은
여수항의 눈동자라 일컫지요
우리 손을 잡고 그 푸른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요
그리고 그 눈부신 꽃그늘 아래서 우리 사랑을 맹세해요
만약 그 사랑이 허튼 맹세라면 사자처럼 용맹한
동백들이 우리의 달콤한 언약을 모두 잡아먹을 거예요
말의 주춧돌을 반듯하게 놓아요 풀무질과 길쌈을 다시 배워요
저 길길이 날뛰던 무쇠 덩어리도 오늘만큼은
화사하게 동백 열차로 새로 단장됐답니다
삶이 비록 부스러지기 쉬운 꿈일지라도
우리 그 환한 백일몽 너머 달려가 봐요 잠시 눈 붙었다
깨어나면 어느덧 먼 남쪽 바다 초승달 항구에 닿을 거예요
병뚜껑
분명 저 여자는 그 동그란 입술을
재빨리 닫지 못했던 것 같다 삽시간에
그 육체의 더운 내용물이 흘러나와버렸으니
어느 목격자는 저 여자에게 갑자기 사슴이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급하게 숨을 곳을
찾기 위하여 그 사슴이 저렇게 피로 변했다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무지막지한 자동차가 함부로
저 여자에게 뛰어들었다고 생각할 순 없는 일이야
여자의 꺾여진 목은 유난히 희고 깨진
무릎 위로 하얀 레이스의 속옷이 얼핏 보인다
가슴 앞 단추들은 그 육체의 파탄에도
흩어지지 않고 여전히
가지런하고 완강하게 붙어 있다
그렇다 저 육체는 어떤 경우에도 저렇듯 품위와
자제력을 잃지 않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탄식의 연속인 것이다
저처럼 한마디 비명으로 삶이 끝날 수 있는데도
놀라움과 기쁨과 슬픔 따위의 육체의 서랍을
그토록 많이 달고 열어 보여줄 수 있으니
그리고 횡단 보도 밖으로 튕겨나간 저 하이힐을 보라 참 신기한
구름이기도 하다 조금 전까지 어떤 처녀의 발을
사로잡던 마술 상자였던 자신을 까마득히 잊은 듯
도로 옆 화단에 처박혀 콧등에
앉은 나비와 희희낙락하고 있으니
누군가 앰블런스를 부른다
우선 저 여자를 덮을 시트가 필요하다
얼굴만이라도 덮을 모자도 좋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
그 동그란 입술을 덮을 만한
병뚜껑이 운명의 손길이 닿는 곳에 있었어도......,
나는 그 병뚜껑만도 못한 시를 옆에 놓고 지나간다
기록
대체 서기(書記)된 자로서의 책무란 얼마나 성가신 일인가 언젠가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코끼리떼를 흰 종이 위로 건너오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숫자, 나이와 성별, 엄니의 길이와 무게, 무리의 지도자 습성, 이동 경로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들의 길고 주름진 코로 노획한 물건들 - 옷핀, 인형, 가발, 빈 콜라병, 탐정용 돋보기, 야구 사인볼, 샌들 한 짝, 담배 파이프, 테러리스트의 복면 등, 온갖 문명의 잔해들도 자세히 적었다
그들의 다리는 굵고 튼튼하다 포도주를 짓이겨 대지의 부은 발등에 붓고 거친 나뭇가지와 뿌리를 씹어 엽록의 공장을 돌리고 낫처럼 휘어진 거대한 비뇨기로 곡식을 베어 눕힌다
그들에게 실향이란 없다 황혼이 오면 그들은 목울대를 움직여 그들의 사랑하는 악기, 튜바의 삼각주로, 전 세계에 흩어진 천 개의 코끼리강을 부른다 달콤한 무릎 관절의 샘이 흰개미를 불러모으듯, 다이아몬드 광산이 총잡이를 부르듯,
홍해가 갈라지는 아침, 찢어진 범선 같은 귀를 펄럭이며 한 무리의 대륙이 새로운 길을 찾아 천천히 이동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칸나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하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항상
발갛게 목이 부어있는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낡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씩 몽롱 한 잔씩을 마셨소
몸이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숲이 휙휙 지나가버렸소
초록 기타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버렸소
삼류 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초로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이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침이 있었소
고양이
여기 경매에 내놓으려 하는 오래된 꽃병이 있어요
꺾은 꽃가지에서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 이제 그런건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그러니 누가 저 꽃병목에 방울을 달겠어요?
쉬잇, 지금은 고양이 철학 시간이에요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모서리 구멍을 응시하고 있네요
아마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냥 시대를 생각하고 있겠지요
우리는 모두 어둠과 추위로부터 쫓겨온 무리랍니다
한때는 방 안을 뒹굴던 털실 몽상가와 잘도 놀았답니다
현기증 나는 속도의 바퀴와 아찔한 연애도 해봤구요
요즘은 부쩍 네발 달린 것에 믿음이 가는가 봐요
네발 달린 의자에 사뿐히 뛰어 올라 털실이 떠나간
털실 바구니에 들어가 때때로 달콤한 오수를 즐기지요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 안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지고 없어요
다그쳐 물어도 종알종알 털만 핥을 뿐 모른다 도리질만 하네요
쫑긋 귀 동그란 눈동자……, 그토록 짧은 혀로 그것들 모두 어디다 숨겼을까요
겨울
이것은 겨울과의 계약서예요
죽은 정원을 하나 샀죠
그러고는 서둘러 실내로 뛰어들어 왔어요
겨울은 자라지 않는 이야기의 계절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씩 지금이 겨울임을
망각하고 이렇게 묻곤 하지요
우리집 풍자諷刺는 왜 키가 크지 않는 거죠?
겨울은 언제나 참으로 길지요
웃고 노래하고 떠들다 지쳤는지 아이들은
이제 눈트는 씨앗의 입구에 몰려가 있어요
창 밖 정원은 여전히 잠들어 있어요
나는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깊은 상념에 잠기지요
꽃피고 새 우는 상자,
이것의 손잡이를 어느쪽에 붙일까 생각해야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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