尊者曰汝雖已信三業 而未明業從惑生 惑因識有 識依不覺 不覺依心 心本淸淨 無生滅 無造作 無報應 無勝負 寂寂然靈靈然 汝若入此法門! 可與諸佛同矣 一切善惡 有爲無爲 皆如夢幻 夜多 承言領旨 卽發宿慧 勤求出家 旣授具戒 乃付法 偈曰 性上本無生 爲對求人說 於法旣無得 何懷決不決 汝宣傳後學 言訖 入寂滅
구마라다 존자가 말하였다.
“그대가 비록 이미 몸과 말과 생각이라는 세 가지의 업을 믿고는 있으나 이 세 가지의 업은 미혹으로부터 생기고, 미혹은 의식으로 인하여 존재하고, 의식은 깨닫지 못함[不覺]을 의지하고, 깨닫지 못함은 마음을 의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음은 본래 텅 비어서 생멸이 없고 조작도 없으며, 과보도 없고 승부도 없다. 고요하고 또 고요하며 신령스럽고 또 신령스러우니 그대가 만약 이 법문에 들어간다면 가히 모든 부처님으로 더불어 동등하리라. 일체의 선과 악과 조작이 있음과 조작이 없음이 모두 꿈과 같고 환영과 같으니라.”
사야다가 그 말씀을 받들어 깊은 뜻을 이해하고 곧 본래의 지혜가 드러나서 부지런히 출가하기를 원하거늘, 이미 구족계를 주고 법을 부촉하며 게송을 말하였다. “성품에는 본래 생멸이 없는데 구하는 사람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법에도 이미 얻을 것이 없다면 해결하고 해결하지 못함을 어찌 생각하는가.”
“그대는 후학들에게 널리 전하라”라는 말을 마치고 적멸에 들었다.
부처가 지으면 佛業이며
보살이 지으면 보살 업
해설 : 구마라다 존자가 사야다 존자에게 일러주신 가르침의 연속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흔히 업이라고 한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모두가 업이다. 부처가 지으면 불업(佛業)이며 보살이 지으면 보살업(菩薩業)이다. 업이란 사람이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하는 일체의 짓이며 행위이다. 그 하는 짓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며 행복과 불행이 나눠진다. 그렇다면 그 업은 무엇으로부터 생기는가? 구마라다 존자의 가르침은 부처의 업이나 보살의 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의 업을 논하면서 업의 원인을 미혹이라고 하였다.
불교교리에서 혹(惑)과 업(業), 고(苦)라고 하여 삶은 고통이며, 고통의 원인은 업, 업의 원인은 미혹이라고 했다. 여기에서는 그 미혹의 원인은 의식이며, 의식의 원인은 깨닫지 못함(不覺), 깨닫지 못함은 마음을 의지 한다고 하여 더욱 세밀하게 밝혔다.
마음의 실체를 알면 깨닫지 못함이 해결되며, 깨닫지 못함이 해결되면 의식이 해결되며, 의식이 해결되면 미혹이 해결되며, 미혹이 해결되면 업이 해결되며, 업이 해결되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종극에 가서는 마음이 그 열쇠다.
그런데 그 마음이란 어떻게 생겼는가? 법문에서 밝힌 대로 마음은 본래 텅 비어서 생멸이 없고 조작도 없으며, 과보도 없고 승부도 없다. 또 고요하며, 신령스럽다. 이러한 것이 마음의 본체다. 이러한 마음의 본체를 꿰뚫어 보면 모든 업과 모든 고통과 모든 문제는 순식간에 풀린다. 이렇게 해결하는 것이 불교의 해결방법이다.
밖으로 보이는 모든 사물들도 그 본질을 규명해보면 텅 비어 없는 것이다. 다만 이런 저런 조건에 의하여 하나의 물질이 형성되어 우리 앞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마음도 사랑하고 미워하며, 기뻐하고 슬퍼도 한다. 그 마음의 작용은 너무나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본질을 규명해보면 마음이란 텅 비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모든 존재의 실상이다.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그 실상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 불교적 삶이고 진리에 맞는 삶이다.
그래서 달마대사도 “마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방법이 모든 수행을 다 포함하고 있다(觀心一法 總攝諸行)”고 하지 않았던가. 게송에서 말하는 성품이라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그 성품에는 본래 생멸이 없는데 생멸을 구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마음의 생멸의 입장을 말하게 된 것이다.
무비스님 / 조계종 전 교육원장
[불교신문 2508호/ 3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