直指

[스크랩] 무비스님의 直指 〈32〉제19조 구마라다 존자(鳩摩邏多尊者)-선·악의 과보는 메아리처럼 따른다

시치 2009. 12. 10. 16:02

선·악의 과보는 메아리처럼 따른다

〈32〉제19조 구마라다 존자(鳩摩邏多尊者)


第十九祖 鳩摩羅多 遇舍多得法 後至中天竺 有大士 名夜多 問曰我家父母 早信三寶 而常疾 凡所營作 皆不如意 而我家 久爲多羅行 身常勇健 所作和合 彼何幸而我何辜 尊者曰何足疑乎 且善惡之報 有三世焉 凡人 但見仁夭暴壽 逆吉義凶 便謂! 亡因果 虛罪福 殊不知影響相隨 毫不差 縱經百千万劫 亦不磨滅 夜多 聞是語已 頓釋其疑

제19조 구마라다 존자가 가야사다 존자를 만나서 법을 얻고 뒤에 중천축에 이르렀다. 마침 대사가 있었는데 이름이 사야다였다.

그가 묻기를, “저의 집의 부모는 일찍이 삼보를 신봉하였으나 항상 병고에 시달리고 온갖 하는 일들은 모두가 뜻과 같지 못하지만, 저의 이웃집에는 오랫동안 온갖 천한 일만 했으나 몸은 항상 건강하고 하는 일들은 뜻대로 잘 되니 그는 무슨 행운이며 저는 무슨 잘못입니까?”

구마라다 존자가 말하였다.

“어찌 의심을 하는가. 선과 악의 과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거늘 범부들은 다만 어진 사람들이 일찍이 죽고 난폭한 사람들은 오래 살며, 도리를 거슬려도 복을 받고 도리를 지켜도 흉한 일만 있는 것을 보고 곧 생각하기를 ‘인과라는 것도 없고 죄니 복이니 하는 것도 허망한 것이다.’라고 하여 인과와 죄와 복이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서로 따르게 되어 있어서 털 끝 만치도 어긋나지 않아서 비록 백겁 천겁이 지나더라도 또한 없어지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구나.”

사야다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그동안 의심하던 것이 한꺼번에 다 풀려버렸다.


범부는 인과라는 것 없고

죄와 복도 허망하다 생각



해설 : 불교의 가르침을 퍼센트로 대강 나누어 본다면 인과나 연기에 대한 가르침이 30퍼센트 정도 차지하고, 공(空)의 이치에 대한 가르침이 30퍼센트 정도 차지하고, 일심(一心)에 대한 가르침이 30퍼센트 정도 차지하고, 나머지 10퍼센트는 기타의 가르침이 차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공부 초기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연이나 연기에 대한 재미와 관심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불자들은 인과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실생활에서 보면 그렇지 못한 면이 종종 있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인과를 철저하게 믿지 않는 경향을 자주 볼 수 있다. 마치 이 글에서 사야다 존자가 생각하고 의문을 품고 있던 내용과 꼭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사야다는 오늘날 불자들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법구경>에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악이 성숙하지 않는 동안은 비록 악인이라도 즐거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악이 성숙하고 나면 악한 자는 온갖 악의 과보를 경험해야한다.

행복이 성숙하지 않는 동안은 비록 착한 사람이라도 악한 과보를 경험한다. 그러나 행복이 성숙하면 착한 사람은 온갖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 눈앞의 사정들만 보면 인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채소나 곡식이나 과일도 심은 지 1달이면 뜯어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으며 5, 6년이 지나야 겨우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도 있다. 사람이 지은 일에 대해서도 눈앞에 버러지는 일만 보아 인과가 없다고 할 것이 아니다.

인과에는 순현보(順現報), 순생보(順生報), 순후보(順後報)라 하여 사람이 지은 인과가 금생에 받는 것도 있고, 다음 생에 받는 것도 있고 먼 후생에 받는 것도 있다. 그리고 앞과 뒤의 문제도 앞에 지은 것이라고 반드시 먼저 받는 것이 아니다. 뒤에 지었더라도 중처편추(重處偏墜)라 하여 무거운 것부터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백장(百丈, 749~841)스님도 불매인과(不昧因果)를 말씀하셨다.

무비스님 / 조계종 전 교육원장


[불교신문 2506호/ 3월7일자]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文殊法供養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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