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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가 없는 나의 꿈 (외 3편) / 박상순

시치 2009. 11. 25. 17:10

내가 없는 나의 꿈 (외 3편)

   박상순

 

 

 

내 꿈속에는

수천 개의 조약돌

미루나무 밑둥치를 싣고 오는 자전거

자루 없는 도끼

액자 속의 푸른 꽃

장롱 속의 좀벌레

 

들것에 실려간 여인

미루나무 개천가에 숨은 조약돌

자루 없는 도끼를 앞마당에 파묻고

둘러앉은 사람들

이제 몇 남지 않은 최후의 가족들을 위하여

도주의 시간을 묻던

푸른 손의 사람들

 

장롱 속의 좀벌레가

감춰진 내 외투를 사각사각 갉으며

수천 개의 돌이 쌓인

수천 개의 작은 방

그 닫혀진 방에 구멍을 내고

 

오늘도 내 꿈속엔 수천 개의 조약돌

미루나무 밑둥치를 싣고 오는 자전거

파묻은 도끼

푸른 잎에 가려진 얼굴

구멍난 풍경 속의 규칙들만 보이고

 

어디에도 내가 없는

내 꿈 속에도 내가 없는

나의 꿈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기차가 지나갔다

그들은 피 묻은 내 반바지를 갈아 입혔다

기차가 지나갔다

그들은 나를 다락으로 옮겨 놓았고

기차가 지나갔다

 

첫 번째 기차가 아버지의 머리를 깨고 지나갔다

두 번째 기차가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지나갔다

세 번째 기차가 내 눈동자 속에서 덜컹거렸고

할머니의 피 묻은 손가락들이 내 반바지 위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갔다

나는 뒤집힌 벌레처럼 발버둥 쳤다

기차가 지나갔다

달리는 기차에 앉아

흰 구름 한 점 웃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갔다

 

 

낱말

 

 

 

나도 한때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아침마다 햇살이 내 발목에 고리를 달아

창가에 걸어놓은 작은 화분이었다

 

너는 오늘도 아름다운 추억

아름다운 노래

약속을 품에 안고

꿈 밖으로 난 길을 따라가지만, 나는

 

꿈으로 다시 돌아올 너를

빛의 소음(騷音) 속에 영원히 묻어버리는

환몽의 정거장에 선

유령이 된다

 

 

Love Adagio

 

 

 

아직 덜 마른 목재들이 마르는 소리

――그의 무른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아직 덜 마른 그의 몸이 마르는 소리

――그의 불행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아직 덜 마른 짐슴의 살이 마르는 소리

――아직 눅눅한 그의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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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 1962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서양화 전공. 1991년 《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1996년 <현대시 동인상> 수상.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Love Adagio』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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