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는 나의 꿈 (외 3편)
박상순
내 꿈속에는
수천 개의 조약돌
미루나무 밑둥치를 싣고 오는 자전거
자루 없는 도끼
액자 속의 푸른 꽃
장롱 속의 좀벌레
들것에 실려간 여인
미루나무 개천가에 숨은 조약돌
자루 없는 도끼를 앞마당에 파묻고
둘러앉은 사람들
이제 몇 남지 않은 최후의 가족들을 위하여
도주의 시간을 묻던
푸른 손의 사람들
장롱 속의 좀벌레가
감춰진 내 외투를 사각사각 갉으며
수천 개의 돌이 쌓인
수천 개의 작은 방
그 닫혀진 방에 구멍을 내고
오늘도 내 꿈속엔 수천 개의 조약돌
미루나무 밑둥치를 싣고 오는 자전거
파묻은 도끼
푸른 잎에 가려진 얼굴
구멍난 풍경 속의 규칙들만 보이고
어디에도 내가 없는
내 꿈 속에도 내가 없는
나의 꿈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기차가 지나갔다
그들은 피 묻은 내 반바지를 갈아 입혔다
기차가 지나갔다
그들은 나를 다락으로 옮겨 놓았고
기차가 지나갔다
첫 번째 기차가 아버지의 머리를 깨고 지나갔다
두 번째 기차가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지나갔다
세 번째 기차가 내 눈동자 속에서 덜컹거렸고
할머니의 피 묻은 손가락들이 내 반바지 위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갔다
나는 뒤집힌 벌레처럼 발버둥 쳤다
기차가 지나갔다
달리는 기차에 앉아
흰 구름 한 점 웃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갔다
낱말
나도 한때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아침마다 햇살이 내 발목에 고리를 달아
창가에 걸어놓은 작은 화분이었다
너는 오늘도 아름다운 추억
아름다운 노래
약속을 품에 안고
꿈 밖으로 난 길을 따라가지만, 나는
꿈으로 다시 돌아올 너를
빛의 소음(騷音) 속에 영원히 묻어버리는
환몽의 정거장에 선
유령이 된다
Love Adagio
아직 덜 마른 목재들이 마르는 소리
――그의 무른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아직 덜 마른 그의 몸이 마르는 소리
――그의 불행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아직 덜 마른 짐슴의 살이 마르는 소리
――아직 눅눅한 그의 몸이 내 지붕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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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 1962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서양화 전공. 1991년 《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1996년 <현대시 동인상> 수상.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Love Ada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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