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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드럼 연주법 (외2편) / 김지녀

시치 2009. 11. 5. 20:33

드럼 연주법 (외2편)

   김지녀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

비로소 내가 쓸쓸한 가죽으로 누워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릇처럼 흰 속살을 드러내지 않아도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떨림의 속도와 강도를

나의 가죽으로부터 느낄 수 있다

나는 속이 텅 빈 종이에 가깝다

그때 내 성대는 나로부터 가장 멀리 멈춰 있다

밤새도록 굵게 비가 내려

두드려도, 희망은 열리지 않는 철문

철문을 뚫고 유령처럼 나를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을 때

다만 배가 고프다는 것

비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는 거의 동물에 가깝다는 것

그러므로 나의 소리는 얼룩져 있다

기린 표범 물개의 무늬처럼 어떤 패턴처럼

空白(공백)의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아름다운 가죽이 되기 위해

나는 꼭 다문 입술로

언제라도 비를 맞으면서 걸어 다닐 수 있다

어떤 무늬로든 소리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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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가얼룩말의 웃음소리

 

 

 

마지막 콰가얼룩말을 보고 있다

앞쪽은 줄무늬가 있고 뒤쪽은 없다

얼룩말이면서 말이기도 아니

얼룩말이 아니면서 말도 아닌

콰가얼룩말은 귀가 짧다

다리와 꼬리가 하얗다

콰하콰하 웃고

콰아콰아 운다

암컷과 수컷에게 물려받은 무늬가 반반씩 저렇게 정직하다니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뉴스에서는 일가족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완전히 찌그러진 자동차를 비추는데

목소리는 침착하고

한 가족이 지구에서 사라진 경위가 육하원칙 아래, 간결하다

아빠 엄마는 앞에 앉고 아이들은 뒤에 앉아

콰하콰하 웃었겠지

대(代)가 끊긴 사람들은 콰아콰아 울까

다음 소식입니다 제13호 태풍 실라코가……

아나운서가 사건을 옮기는 동안

나는 잠깐 아이들이 아빠 엄마를 반반씩 닮았으면 좋겠다

아빠이면서 엄마이기도 아니

아빠가 아니면서 엄마도 아닌

우리가 콰가얼룩말처럼

정직한 종족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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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타임

 

 

 

그때 우리는 남반구와 북반구의 계절이 교차하는 곳에서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 위를 달리고 있었다

다리 아래 흰 구름이 회전판처럼 돌아가면

너무 일찍 죽은 가수의 노래가 입속에서 맴돌다 흘러나오고

 

우리는 사선으로 날아가는 새떼인지 몰라

날개를 접었다 펴면서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호흡

그 호흡에 익숙해지기 위해선 공중에서 죽어가는 일에 대해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었지만

 

길은 난간 없는 나선형 계단처럼 구불거렸다 지나치거나 가혹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어떤 경계를 지나고 있었다

이를테면 1시 59분에서 1분이 지난 후에 3시를 경험하는 서머타임처럼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이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빠르게 옮겨갔다

 

여름이었다 겨울이었다 여름과 겨울 사이에 놓인 오후였다

뜨거운 바람 속으로 달리고 있었고 우리는

거식증에 시달린 여자의 목소리를 사랑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허기를 달래주어도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언제까지나 길고 높았다

가느다란 교각 위에서 떨어지지 않을 만큼 어지러운 장면을 함께 숨쉬며 가끔씩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한 토막씩 잘려 나가는 샛노란 태양

 

어쩌면 우린 거대한 시간을 통과한 건지 몰라

공중에서 추락하면서 질끈 눈을 감아 버리는 순간처럼 수많은 기억을 봉인한 채

이곳에 너무 일찍 도착했거나 지각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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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녀 / 1978년 경기도 양평 출생. 성신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7년 「오르골 여인」 외 5편으로 《세계의 문학》 제1회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시집 『시소의 감정』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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