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나무 그늘 아래 저녁 눈 내릴 때 (외3편)
박주택
이 거리, 노래가 되다만 빛들이
갈 곳을 잠시 잃어 가야 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과 섞인다
천천히 길들 나무들의 눈빛에 힘입어 길게 뻗어 있음을
자랑한다, 길을 노래하는 자 불행했다
기적을 기대하는 자 나무 그늘 아래 잎사귀에 덮이고
무엇이 되고 싶었던 자 모자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자신의 차례에도 입을 다문다, 저녁 눈 내리고
함부로 어깨를 부딪는 저녁 눈 내리고 이제 더 없이
자신을 불러줄 사람을 찾지 못할 때
어느덧 이것이 생의 하루가 아니라
생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길은 구부러진다, 이제 어디론가 향해 걸어가는 것은
길이 시작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시 돌아가는 그 길로 걸어갈수록
자신이 가야 할 곳과 가까워졌음도 깨닫는다
저녁의 함박눈 내리고 헤매임 가운데 만난
빛 하나 호흡을 불어 만든 눈빛을
물 위에 풀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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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황혼이 붉게 벽을 물들일 즈음
바람은 열쇠가 채워져 있는 저녁의 문 앞에 서서
잠시 침묵에 섞인다 어렴풋이 평온의 편지인 벽은
글자들을 떨어뜨리고
봄은 어금니를 느리게 움직여
잎사귀를 갉는다 사람들 사이로 글자들이 떠다닌다
그러나 바람 때문에 그 글씨는 크게 일그러졌다
공기가 금빛 즙을 흘리는 저녁을 보라,
이따금 사람의 그림자들 사이로 거품이 일고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에 서로의 말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턱도 있다
그리하여 바람 부는 날이면
말들은 그림자의 심장을 향해 따뜻한 손을
집어넣고 고여 있는 구름들은 황혼에서 피워
올린 사람을 향해 뻗는다 적막에
황혼의 그림자들 서로에게 섞이며 침묵의 편지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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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가 1
곳곳이 꽃이고 곳곳이 꽃인데
그냥 가시렵니까, 집은, 달은 저만치서 헤매이고
눈썹마저 강으로 던져버리면
아무리 저문 문틀이라지만 벌레 끼어 웁니다
그러니 덤불에는 눕지 마시고 꽃가지 꺾어
꽃잎에 섞여 마른 빛으로 나십시오
고르고 고른 마음 모진 어둠을 갉을 때
먼 곳으로부터 잠이 옵니다
이것이 이별을 위하는 것이라면 새벽을 달래
강에 적시겠습니다, 곳곳마다 꽃이어서
잔가지만 하더라도 수북이 여기에 있는데
다만 울음을 멈춘 벌레를 따르렵니다
달이 비추는 길에 서 계시는 하얀 옷자락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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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동공
이제 남은 것들은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만 바다를 그리워한다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 말 한 마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들이 그 위를 비추면
창백한 호흡을 멈춘 새들만이 나뭇가지에서 날개를 쉰다
꽃들이 어둠을 물리칠 때 스스럼없는
파도만이 욱신거림을 넘어간다
만리포 혹은 더 많은 높이에서 자신의 곡조를 힘없이
받아들이는 발자국, 가는 핏줄 속으로 잦아드는
금잔화, 생이 길쭉길쭉하게 자라 있어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때때로 우리들은 자신 안에 너무 많은 자신을 가두고
북적거리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잠이 휘다니,
기억의 풍금 소리도 얇은 무늬의 떫은 목청도
저문 잔등에 서리는 소금기에 낯이 뜨겁다니,
갈기털을 휘날리며 백사장을 뛰어가는 흰 말 한 마리
꽃들이 허리에서 긴 혁대를 끌러 바람의 등을 후려칠 때
그 숨결에 일어서는 자정의 달
곧이어 어디선가 제 집을 찾아가는 개 한 마리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별을 토하며
어슬렁어슬렁 떫은 잠 속을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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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택 / 1959년 충남 서산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이동건축」 당선. 시집 『꿈의 이동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사막의 별 아래에서』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시간의 동공』, 시론집 『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서의 복원』, 평론집 『반성과 성찰』『붉은 시간의 영혼』 등.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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