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의 꿈
정철훈
어느 날부터 나는 커피향이 스멀거리는 마포의
옥외 커피점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실내와 실외를 구분 짓는
그 어중간한 경계에는 아무 선도 없지만
내 몸이 그 선에 얹혀 있다는 게
커피 향과 더불어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기차 레일을 밟고 한없이 걸어 보던 어린 날의 발자국들이
그 보이지 않는 선에서 저벅거리고
기차가 달려와 나를 냅다 치받아도
아무 생채기 없이 다시 살아나는 그런 선이다
그 선에 걸려 푸드득거리다가 겨우 빠져나온
저 허공의 새떼들이나 알까
그렇다고 안과 밖을 통합하자는 야욕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하나의 점으로서
오가는 행인들의 이동을 내 몸에 묶어 본다
그들의 슬픔과 기쁨, 만남과 헤어짐, 열정과 냉정 같은 것들
그러면 내 몸을 당기는 무한한 선들이 생겨나
나는 그 선을 당겼다 늦췄다, 묶었다 풀었다 하면서
하루 같지 않은 하루를 그냥 보내는 것이다
나는 그 무수한 선을 뽑는 한 마리 누에가 되어
꿈틀대면서 환희의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무심코 선 하나를 내 쪽으로 당겨 보기도 한다
선이 선을 달고 딸려 오다가 뒤엉킨다
선들이 엉키면 엉키는 대로
아침은 아침대로 좋지만 오후의 때가 되면
커피 향의 질감이 조금은 무거워지고
내 몸에 묶인 선들도 조금은 낭창낭창 헐거워져 좋은
오후의 한때를 즐겨 보는 것이다
영혼 같은 게 있다면
영혼은 밝으면 별반 쓸모없는 게 되고 말 것이기에
나는 영혼이란 놈이 좀 어두컴컴하게 숙성되기를
그 옥외 커피점에 앉아 기다려 보는 것이다
— 웹진《문장》200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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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훈 / 1959년 전남 광주 출생. 국민대 경제학과 졸업. 러시아 외무성 외교과학원 수료, 역사학 박사학위. 1997년 《창작과비평》 봄호로 등단. 장편소설 『인간의 악보』『카인의 정원』, 시집 『살고 싶은 아침』『네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개 같은 신념』과 『옐찐과 21세기 러시아』『김알렉산드라 평전』『소련은 살아 있다』등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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