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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0년 올해의 좋은 시 1000[98]호주머니 속 악어 - 강인한

시치 2009. 11. 3. 12:31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0년 올해의 좋은 시                           98     

 

호주머니 속 악 

 

 

                                   강인한

 

 

 


호주머니에 악어가 산다

 

볕 좋은 날 호주머니를 까뒤집고 탈탈 떨면
있다
구석으로 구석으로 숨던 땀나는 시간과
병든 사람의 기억처럼 헐떡거리던 섬모와
참을 수 없는 것들이 그리워
실실이 빠져나온 담뱃가루 속에

 

그 속에 있다
추분 가까운 어느 가을날
호주머니를 떨어내다가, 공기 속으로 떨어져나가는
은빛 빛나는 것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차마 꺼내기 어려운 고백의 첫 발음인지
몰라, 숨기고 싶은
추한 욕망의 한 자락인지 몰라

 

악어의 벌린 입 속에, 사내는
제 손을 넣었다가 한참만에 꺼낸다
악어의 벌린 입 속에 이번에는
제 머리를 넣었다가 한참만에 꺼낸다
어쩌면 사내의 위험한 저 행동의 끝에는
피 묻은,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예비되어 있을 것

 

내가 그대에게 결정적인 무슨 말을 하고 싶을 때
머뭇거리는 입술이 첫 음절에 매달려 목마른

호주머니를 뒤질 때
악어가 덥석 내 손목을 문다.

 

 

 

 계간 『문학· 선』2009년 봄호 발표

 

 

 

 

  

 

 

 

강인한 시인

 


1944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당선되어 등단. 1966년 첫시집『이상기후』를 펴낸 이후, 『불꽃』(1974),『전라도 시인』(1982),『우리나라 날씨』(1986), 『칼레의 시민들』(1992),『황홀한 물살』(1999),『푸른 심연』(2005),『입술』(2009) 등의 시집과 시선집 『어린 신에게』(1998) 그리고 시비평집『시를 찾는 그대에게』(2002)가 있음.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정수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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