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개명(改名) - 김경주

시치 2009. 11. 3. 00:04

개명(改名)

 

                                - 김경주  

 

 

  오래 전 문득

 

  개명을 하고 작명집을 나오는 사람의 표정이 궁금한 오후가 있었다

 

  그때 저녁은 빈 교실 칠판에 분필로 북북 흩어놓던 새 떼 같은 거

  그때 기별은 점집 무녀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죽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보는 거

 

  오래 전 문득

  가계(家系)에 없는 언어로 개명한 후

  묵은 이름을 잊기 위해

  그 이름을 구름으로 옮기고 있을 때

 

  어느 문장 속에 떠오르던 내 무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무덤의 이름이 끝끝내 생각나지 않았다

  그 곡해를

  내 피로 흩어진 한 짐승의 동요(童謠)라고 불렀을 때

  그때 그 동요(童謠)는

  자신을 떠난 한 짐승의 숲이 되었다

 

  저녁에 흰 뼈가 드러나는 바람과 함께

  나는 묻힐 것이다 수십 개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단 하나의 곡마단을 생각해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잠든 날엔 저녁 무렵에만 깨어나기로 하고, 이 이름을 잊는 날엔 저녁으로만 만들어진 물병을 뒤집어 놓고, 발등에 그린 새의 피를 빼내다가 잠들기로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저녁의 개명은

  분필로 혼자서 칠판에 북북 흩어놓던 새 떼의 분진 같은 거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바닥에 가루로 흘러내린

  그 모래의 이름을 이제

  나는 쓸 것이다

 

  나의 가계엔 내 피가 안 통하는 구름이 있다

 

 

 

            『창작과 비평』2009년 가을호

 

 

             - 1976년 전남 광주 출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2003년 대한매일(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극작가로 활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