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명(改名)
- 김경주
오래 전 문득
개명을 하고 작명집을 나오는 사람의 표정이 궁금한 오후가 있었다
그때 저녁은 빈 교실 칠판에 분필로 북북 흩어놓던 새 떼 같은 거
그때 기별은 점집 무녀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죽은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보는 거
오래 전 문득
가계(家系)에 없는 언어로 개명한 후
묵은 이름을 잊기 위해
그 이름을 구름으로 옮기고 있을 때
어느 문장 속에 떠오르던 내 무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무덤의 이름이 끝끝내 생각나지 않았다
그 곡해를
내 피로 흩어진 한 짐승의 동요(童謠)라고 불렀을 때
그때 그 동요(童謠)는
자신을 떠난 한 짐승의 숲이 되었다
저녁에 흰 뼈가 드러나는 바람과 함께
나는 묻힐 것이다 수십 개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단 하나의 곡마단을 생각해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잠든 날엔 저녁 무렵에만 깨어나기로 하고, 이 이름을 잊는 날엔 저녁으로만 만들어진 물병을 뒤집어 놓고, 발등에 그린 새의 피를 빼내다가 잠들기로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저녁의 개명은
분필로 혼자서 칠판에 북북 흩어놓던 새 떼의 분진 같은 거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바닥에 가루로 흘러내린
그 모래의 이름을 이제
나는 쓸 것이다
나의 가계엔 내 피가 안 통하는 구름이 있다
『창작과 비평』2009년 가을호
- 1976년 전남 광주 출생. 서강대 철학과 졸업.
2003년 대한매일(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극작가로 활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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