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스크랩] 2009년 <실천문학>신인상 당선작 감상 - 박찬세/김은상

시치 2009. 10. 28. 22:46

<박찬세 시인)

 

<1>-Cold Bird/박찬세-

 

                                                   

북극곰이 서쪽 하늘에서 물개를 물어뜯습니다
허연 하늘이 핏물로 더럽혀집니다
자라는 종양을 보고 웃는 짐승을 본 적 있나요
새들이 허공에서 벗어나려고 퍼덕거립니다
물오리들은 얼룩진 강의 지퍼를 열고 동전을 꺼냅니다
꺼낸 동전을 꿀꺽 삼킵니다
내 애기 좀 들어 보실래요
뒤통수에 칼이 박히는 꿈을 꾸면 새가 된다는 전설을 금방 지어내 봅니다
  얘, 뒤통수에 칼이 박히는 꿈을 꾸면 새가 된대
  저 소름 돋는 부리 좀 봐
유리창이 나뭇가지에 내 얼굴을 걸어 놓습니다
걸린 얼굴 위로 새 한 마리 날아와 지저귑니다
이렇게 꼭 맞는 방은 처음입니다
문이 없는 방을 어떻게 나서야할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똑 똑 밖에 누구 없나요
  얘야, 문은 언제나 너였단다
뒤통수를 관통한 칼이 문이 되다니!
젖을 먹이는 새의 전설을 금방 지어내 봅니다
  얘, 젖을 먹이는 새가 있대
  저 깃털 사이에 삐죽 나온 젖꼭지 좀 봐
부리로 쪼아 먹는 젖에서 피 냄새가 납니다
엄마는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립니다
북극곰이 물개를 물어뜯습니다
허연 하늘이 핏물로 더럽혀집니다
나는 그녀의 내부였단 사실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2>-밤의 그네/박찬세-


  호랑지빠귀가 운다

  휘-----------이
  부리 끝에서
  휘-----------이
  부리 끝으로
  밤이 그네를 탄다
  너의 부리에서 태어난 바람이 나의 부리에서 죽는다 


   새의 울음 속에 갈피 된 편지를 펴 보는 밤이다

  산을 오르며 지내고 있어 산새에게 너의 안부를 묻곤해 미안,

돌팔매질을 했어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언제나 초록이라는 말 미안,

초록도 다 같은 초록은 아닌 걸 산에서 보았어

  밤에 그네를 타는 너의 울음 속에 초록이 돋고
  초록을 물고 날아가는 새의 부러진 발톱 속으로 명이 다한 별들이 몸을 숨긴다
  그믐달은 밤의 장단지에 찍힌 그네 자국이라고 너는 말한다
  기둥에 돌돌 말린 그네 아래서 그믐달이 제 그림자를 그린다

  이쪽과 저쪽으로 새들은 멀어져갔지만
  발자국은 부리 모양을 하고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3>-골목의 표정/박찬세-



딱딱해요 툭, 툭 부러지는 골목은
열두 시의 그림자에서 다섯 시의 그림자로 기울어져 가요
아직까지 골목은 소녀를 숨기고 있어요
툭, 골목이 뱉어 낸 비둘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가고
툭, 골목이 뱉어 낸 개가 비둘기를 날려 보내요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골목이 부러진 곳에서 사라져요
아직도 골목은 소녀를 숨기고 있어요
휴지조각들은 왜 잔뜩 찡그리고 벽 쪽으로 굴러가나요
발목이 부러진 소녀가 보는 하늘은 어제의 하늘
골목은 가끔씩 조용합니다
불행해지고 싶어요
골목이 숨긴 소리들은 간지러워서
어느 순간 빵! 하고 터집니다
창문들의 닫힌 입속으로 똑같은 풍경이 들어가고
커튼은 말이 없습니다
미칠 것 같아요
엄마는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말했지만
뽑아 버리고 싶은 건 나였겠죠
골목은 왜 같은 표정인가요,
골목이 소녀를 보여 줍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잠깐 숨기는 동안.
소녀가 단 한번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골목은 소녀 같은 표정이었을까요

 

<4>-냉장고 속 크레바스/박찬세-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전화기를 만진다
누군가 울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송신되지 못하는 말들이 손끝에서 우둘두둘 돋아난다

아버지가 크레바스 속으로 사라지던 날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 어머니는 밤새 이불을 덮어 쓰고 울었다
크레바스는 왜 비명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들썩이는 이불더미 속에서 냉장고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눈보라가 몰아치며 크레바스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발명가들은 물건을 만들 때 자신도 모르게 인간의 습성을 답습한다는 데
당신을 오래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젖은 눈 속에 뒷모습을 담아두는 건
말을 배우기 전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풍습이다
냉장고를 들어 낼 때면 웅크린 모습으로 남아 있는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았다

담뱃불도 촛불처럼 타오를 때가 있다
남극에서 날아 온 일기장에 적혀 있던 문장이다
문장 안에 도사리고 있는 크레바스의 깊이를 나는 아직 모른다
세상에 문장 하나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 인간이지만
문장을 하나를 건너는 데 꼬박 한 생이 걸리는 것도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멸종 될 때까지 시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세상에 남겨진 문장들을 떠올린다
생의 크레바스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
한 문장을 건너가고 있는 인간이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
별들이 젖은 눈으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건
아무도 크레바스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남극은 있는 것이다
크레바스에 몸을 두고 빠져 나온 비명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남극에서 불어와서 남극으로 불어간다
치밀어 오르는 열과 기침처럼 생각나는 얼굴들은 바람이 피워 놓은 모닥불이었다
이 순간에도 남극을 위하여 낙타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사막을 걷고 아마존엔 비가 내린다
그래서 남극에선 감기에 대한 농담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남극에 밤이 시작되면
암사자들은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어머니들은 이웃의 냉장고를 함부로 열어보지 말거라
냉장고 문을 자주 여닫지 말거라 가르친다
아이들은 발견되지 않은 문장을 찾아가기 위해 밤마다 냉장고 우는 소리를 엿들으며 자란다

냉장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밤은 냉장고를 열고 밥상을 차린다
눈보라치는 숟가락 속으로 뾰루퉁한 내가 거꾸로 담긴다
별들의 눈이 젖는다 

<김은상 시인>

 
<1>-고무외투/김은상-


사내가 구름장을 끌어 덮는다
공중을 터뜨리며 쏟아지는 함박눈
고무로 동여맨 하반신을 쓸어안는다
가르랑거리는 숨을 밟고
지나가는 단단한 굽 소리들
사륜 널빤지 아래서
깨진 구름조각으로 출렁거린다
양손으로 바닥을 당길 때마다
한 뼘 한 뼘 기우는 지평선 위
민달팽이 긴 발자국이
살얼음 까는 잔물결로 술렁댄다
상자 속으로 동전이 떨어질 때
반짝 성에 낀 속눈썹 치키는 사내
팽팽하게 일어선 검은 주름이
애벌레 등피처럼 꿈틀거린다
모였다 흩어지는 게 몸이라는 듯
종아리에 쌓인 살갗 흘러내려
외투 안쪽 절반이 떨어져 간 길들
덜컥덜컥 사내의 몸통을 휘감는다
늑골 속 눈발이 뒤척이고 있다
 
<2>-저수지/김은상-


아버지의 무릎에 물안개가 일렁거린다
손바닥을 대자 손톱에 담긴 달 잔물결에 빠져 현이 울렁댄다
물속에 머리채를 담그고 밤을 중얼거리는 수양버들처럼      
병상 위에 묶인 검은 맨발 고향 저수지를 서성 거린다
죽고 없는 친구들의 이야기 한참 허공에 풀어 놓다가도
댁은 뉘신지, 던진 말이 늑골 속 물수제비로 날아든다
낚고 싶은 기억 한 줄이 있어 내가 누구, 핏줄을 물어도
빈 잇몸으로 삐비꽃을 씹으며 젊었던 한때 둔덕을 헤맨다
몸속을 맴도는 나이테도 오래되면 멀미를 하는지
포르말린 향기 가득한 달의 요의 기저귀에 그려넣은 백발의 아기
엄마, 잠결에 흘러나온 가는 목소리 가랑잎 한 장으로 파문 속에 잠긴다
요강 같은 달무리 물의 지문을 지우고 수문 아래로 떠내려간다  
 
<3>-하늘로 흐르는 하지정맥류/김은상-


  벚나무가 파릇해진 길을 하늘로 밀어 올린다
  간밤 소나기에 어깨를 걸고 재잘대던 양철 지붕들
  모스부호로  초근목피를 간질였는지  가지마다  꽃망울이 돋아있다
  사내가 헐렁한 대문을 밀고 삐거덕삐거덕 걸어 나온다
  끈적거리는 그림자가 어깨를 당겨 기역자로 구부러진 등허리
  납작 고개를 수그린 집들과 엉켜 젖은 바닥 위를 꿈틀댄다
  몇 겹 접힌 양복바지를 무릎까지 추켜 올리자
  때묻은 소용돌이 종아리에 펼쳐진 검푸른 등고선을 흔든다
  벚나무 옆에 쪼그려 앉아 구겨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복사뼈 밑 그늘이  밑동에 흥건하게 고인다
  영등포역을 지나가는 열차 소리 덜컹덜컹  정맥 속으로 스며들어
  사내가 떠나온 길들 터질듯 부풀어 오른다
  처마 밑 폐지를 등에 업은 손수레가 들개처럼 주저앉아 몸을 말리는 아침
  골목의 하지정맥류가  비린 그늘들을 수혈한다
  사내가 벚나무에 등을 기댄다 흔들리는 꽃망울들 공중을 쓰다듬어 꽃받침 가득히 햇살을 채운다
  하늘로 파고드는 핏줄들 팽팽하다 
 
출처 : 시와 글벗
글쓴이 : yangg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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