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추천,당선작

[스크랩] 신인문학상 수상작 모음

시치 2009. 6. 13. 14:17

 

2008《시와시학》가을문예 당선작

 

송현상회(외 4편) / 김명희

보나르의식탁 (외 4편) / 김명은 
 

 

 

송현상회 / 김명희

 

 

1
해장을 놓친 바람 하나 궁시렁, 평상에 앉는다.
간밤에 새로 붙은 동백아가씨를 안고서
늙은 담장은 오랜만에 화색이 돌고
깨진 유리창 끝으로 햇살이 걸려 칭얼거려도
구멍가게는 아침이 늦도록 열리지 않는다
어제 읍내 솜틀집 다녀온 엄마가 혀를 차더니,
진구네 엄마 자랑하던 양은냄비 계가 깨진 걸까


2
새마을운동을 눌러 쓴 동네 이장이
배급된 쥐약 몇 봉 들고 가게 입구를 기웃거린다.
하나둘 모여든 아이들은 제 몫의 만화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반공방첩 담장 밑으로 고여 들고
겨울태양은, 제 몫의 산아제한을 붙든 채
홀쭉해진 골목 끝으로 체적을 좁히는 삼거리 한낮
일그러진 반합과 탄통을 밀고 온 엿장수가 가게 안을
어슬렁 살핀다, 남은 꽁초만 비며 끄며 천천히 떠난다
뒷간 포비아 등은 대낮에도 한참을 붉게 흔들렸다
우리는 논 가운데서 참새 한 마리 더 허탕 친 후에야
버짐처럼 까칠한 가게 문이 열렸다


3
진구랑 진구엄마는 어디로 간 걸까, 우리는 머리 위에서
뱅뱅 도는 미원과 미풍처럼 한동안 서로 눈만 껌뻑였다
그 후 나는 몇 번 더 아버지의 거북선 심부름에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고 그때마다 미원은 하얀 제 속을
겨울햇살에 내어주곤,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다

 

 

 

귀걸이가 있는 풍경 / 김명희

 

 

소리의 방죽에 구멍이 뚫렸다,
전부터 미뤄 왔던 내 오랜 망설임이 무너지고
잠깐동안 양미간이 무너져 내리는 사이
나의 귓불을 몇 번 더듬적거리던 미용실 점원이 쿡,
소리의 한켠이 순간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바늘이 통과한 깊이만큼 다리를 절며 들어오는 소리들
귀를 뚫는 일은, 소리의 모서리에 이정표 하나 세우는 일이다
둑 이쪽과 저쪽에 일상의 오솔길 하나 내는 일이며
청각의 농사만 경작했던 곳에 작은 사찰 하나 건축하는 일이다
예리한 통증과 맞바꾼 장식물을 손끝으로 확인하며
꾹 다문 입으로 방금 뚫린 거울 속을 갸웃 살핀다.
화농의 깊이로 젖었다가 귓속으로 들어오는 소리들
상처를 통과한 소리들은 뾰족하거나 날카롭다
화끈거리는 귀 언저리에 연고가 발라지고
당분간은 덧나기 쉬운 풍경에 하루 두 번씩 소독을 해야 한다
아침마다 수화기 저쪽으로 방류했던 무료함이 단속되고
얼마간은 소리의 농사도 흉년이 될 것이다
내 부주의함이 아직은 덜 아문 설법을 건드릴 때마다
방심에 찔린 듯 거울 앞으로 황급히 다가설 것이다


입 안 가득 얼얼한 침을 천천히 삼키며
인화성 짙은 여름, 조금은 미묘한 화엄(華嚴)의 거리로 나선다.

 

 

 

요강 / 김명희

 

 

벼룩시장에서 운 좋게 얻어온 항아리 하나
그 속엔 아주 오래된 강물 하나 살고 있는지
밤이면, 오래도록 잘 젖은 물소리들 걸어 나오곤 한다
그런 날이면
내 몸 안에서 서서히 고개 드는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곤 했고
강물에 빠지거나 물을 엎지르곤 하는 눅눅한 꿈들에
나는 밤새 젖는 것이다
건너온 세월만큼이나 오래 묵은 이야기들로
거실 한켠을 지키고 있는 낡은 요강 하나
저 입구를 수없이 들렀다 갔을 이름 모를 불면들과
우리들의 배고픔을 수선하던 어머니의 오랜 뒤척임과
잔털이 돋기 시작한 오빠의 은밀한 성장들
그리고 언제부턴가, 요실금 같은 기억만 믿기 시작한
할머니의 슬픈 꽃잎까지도 요강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 밤, 밖에는 영하의 바람이 불었고
가끔은 겨울도,
그 안에다 육각형의 살얼음을 배설하곤 떠나갔다

 

 


백미러·2 / 김명희

 


북극성 하나 잠이 덜 깬 집 안쪽을 기웃거리고
한파를 이고 나온 새벽 뉴스가 거실을 뛰어다닌다.
아직 덜 끝낸 잠을 돌돌 말고 뒹굴던 소년기가 풀썩 깨어나고
마을입구 어디쯤 다다랐을 등교의 초침이 빨라진다.
한 장 남은 달력 앞에서 각질 같은 기억을 털어내다, 여자는
밖으로 나가 영하에 얼어붙은 자동차를 비틀어 깨운다.
희부연 그녀의 일상처럼
밤새 성에에 뒤덮인 유리를 말없이 긁어댄다.
겨울, 은색 살얼음을 들쓴 백미러는 즉석복권 같다
미끄럽게 넘어지던 빙판길처럼
착지점을 놓친 채 매번 아슬아슬하던 계절들이 있었다.
풀잎 같은 희망이 현란한 호기심에 미끄덩, 넘어지곤 하던
긁어도 긁어도 잡히지 않던 행운 저쪽의 낯선 숫자들
그런 날엔
동네의 개 짖는 소리도 홀수이거나 짝수이거나 꽝이었다.
머리 하나쯤 더 웃자란 아이에게
낡은 카셋 테이프를 건네는 그녀의 손은 무료하다
소년은
어릴적 문방구 한켠에서 익힌 익숙한 솜씨로
차가운 바람의 모서리를 재빨리 긁어대고
입김 때문이었을까, 유리에 붙은 은박의 세월 안쪽으로
동굴처럼 검은 구멍이 뚫린다.

마을 앞 삼거리를 실은 버스가 백미러 속으로 사라진 건
아주 잠깐이었고 돌아오는 길 코트주머니 속에는
지난 봄, 확인하지 못한 큰 아이의 입학금이 차게 구겨져 있다.


희망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늘 가까이에 있다.

 

 


빈곳을 말하다 / 김명희

 

 

몇 개 뭉툭한 위로와 사무용 슬픔들이 첨부된 후,
이름은 곧바로 삭제되었고
동사무소 직원의 손에서 내게 넘어온 서류는 헐렁하다.
한사람 몫의 이승이 지워진 서류를 들고서 2월의 거리로 나선다.
음력의 추억들은 겨울바람처럼 흔들리기 시작하고
쉽사리 높낮이가 변하는 그래프처럼 온통 혼란스럽다.
아버지는 더 이상,
구름을 몰고 다니거나 위급한 근심들을 안겨주지 못할 것이다.
주인을 잃은 슬픔들은
기억 한켠에 그늘 한두 개쯤 더 장만하게 될 것이고 나는 지금
습관처럼 그의 집에 전화를 건다
순간,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리듯 화들짝 깨어나는 기억
아버지는 없다
밤마다 위급함을 이끌고 중환자실을 통과하던 사연들과
눈물을 빌리러 그의 머리맡을 찾곤 했던 내 오랜 습관들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


아, 되돌릴 수 없는 먹구름들
오늘 이후 나는, 되돌아올 것들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
어떤 후회나 쓸쓸함은 모두 빈곳이 되었다
세상의 뒷면이 된 아버지는 깊은 산 속에 심겨졌고
이승의 휴일엔, 챙겨야 할 방문지가 하나 더 늘었다.
이제 내 안의 금요일쯤엔 폭설이 세상을 잠글 것이고, 빈곳은 한동안
고체처럼 단단해질 것이다.

 

 

김명희
1968년 경기 양평 출생. 2006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현재 한국서당문화협회 평택지부 사무국장,

 

 


보나르의 식탁 / 김명은

 

 

고마워요, 보나르
당신은 나를 위해 르 까테 마을에 그늘이 밀려나온 붉은 지붕 조그만 집을 샀죠
하얀 테이블보를 깔 수 있는 둥근 식탁을 들여놓았고
그 테이블보가 널려있는 빨랫줄이 길게 뻗어나가는 정원
정원 한 귀퉁이 연못에는 물옥잠화 밑으로 틸라피아가 헤엄쳐 들어가요 보나르
내가 있는 집으로 당신은 돌아오고
두근거리는 내 손이 하얀 문을 열어젖히자 주홍빛 벽에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요
 

그 소리에 나무로 만든 식탁의자에서 졸고 있던 고양이가 굴러 떨어질 뻔 했어요
당신이 강렬하고 진지한 얼굴로 들어서기 전까지
말라붙은 꽃무늬들이 당신이 그려놓은 크고 작은 과일들을 만지며 놀았죠
종려나무잎사귀가 당신이 껴안은 허리처럼 휘어졌어요
빛을 등지고 검은 스타킹을 벗는 남불 칸의 거리와 지중해가 보이는 르 보스크
지금은 해풍이 강하고 차가운 바다
푸른 입자 그 푸른 촉감 사이로 당신은 떠다녀요
함수초 샛노란 빛의 커튼 당신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문은 항상 열려있죠 보나르
아담한 우리 집 창문 밖은 그늘 진 숲이지만
당신 손에는 언제나 따뜻한 색, 눈부신 빛들이 가득해요


그 가득한 빛들이 하늘과 꽃을 마구 섞어버리면
황금처럼 쏟아지는 노을을 벽에 비스듬히 걸어둔 후 보나르
당신은 어두워진 바다를 담은 두 개의 커피 잔을 둥근 식탁 위에 놓으셨어요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얼굴 반쪽이 잘려나간 다음, 절반의 말이 사라져요
나머지 절반은 붓자국이 남아있는 청록빛
나는 당신 오른쪽에 앉아 당신의 옆모습을 바라봐요
꽃을 꽂은 화병의 붉은 뺨으로 유채색으로 빛나는 작은 숲처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 풍부한 표정으로
당신이 그렇게 거기 있는 동안

 

 

 

회기역10-1 플랫폼 / 김명은

 


그를 기다리다 베지밀을 샀어요
크로스 검은 가방 속에 나란히 누워있는 두 개의 베지밀


배낭을 진 중년 남녀 굵고 가는 연둣빛 소리가 섞이고
머리를 출렁이며 그들은 그들의 대화를 연신 쪼아먹고 있어요
한 남자가 건장한 몸을 가볍게 풀고 있는데
풀어 놓은 다리가 날개를 달고 수십 길은 오를 것 같아요


전동차가 통과할 때마다 사람들이 출구를 향해 빗겨가요
플랫폼 기둥에 기대어 건너편 사람들을 바라봐요
눈 마주치면 딱딱해지는 낯선 음식처럼
공기를 마셔도 숨이 막히고
겨우 남아있는 힘으로 고단한 그림자의 뒷모습이 역방향으로
그가 오고 있는 도시는 조명등 하나 없는 매복지대 같아요


가야할 방향을 향해 쭉 뻗어있는 선로
누군가는 그 방향을 틀어보기 위해 몸을 던지기도
손전등도 없이 지하세계로 내려가기도 해요
목덜미에 자꾸 달라붙은, 떼어내도 자꾸 돋아나는
푸른 잎사귀 같은 여자들이 걸어가요
개나리는 벌써 긴 팔과 목에 노란 리본을 매달기 시작해요


낡은 담벼락 뒤에 가려진 대낮에도 꿈꾸기 알맞은 방에서 나와요
지금 시간 오후 세시 반, 잠들지 말아요
배낭을 메고 어디로 가야하나
텅 빈 공간 삐거덕거리는 레일, 소리 들려요?
문이 열리면 첫걸음을 뗀 후 한두 걸음만 더 내디디면 돼요
투명한 것은 부딪치면 위험해요 가방 속의 두 개 유리병처럼
더 가야할 사람들은 창문에 뺨을 기대고 서 있고
나는 노란 정지선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직 따뜻한 베지밀 전류처럼 주르르 흘러들어갈 거예요
햇빛이 오른 쪽으로 기우는 동안 눈꺼풀은 시들고
바짝 말라붙은 바닥이 구둣발에 짓밟혀요
밀치지 말아요 쇠별꽃이 굴러오는 소리, 그가 오고 있어요

 

 

 

하이, 하이눈 / 김명은

 

 

담쟁이 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쪽으로 미소를 보낸다
대답은 필 없다 먹이를 찾은 눈빛이 빛난다


모두들 달려가고 있다 휑 전속력으로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 바삐 걸어와
좌회전신호가 직진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신호등 앞에 몰려있다
검은 헬멧을 쓴 퀵서비스 오토바이 빠른 행렬이 이어진다
부드럽게 곡선을 긋고 몇 대의 승용차가 우회전을 한다
나는 부드러움에 약하다
부드럽게 떨리는 그의 부름에 안전선처럼 얌전하게 서 있다


몸을 구부려 벽 속으로 들어간 벽화처럼
벽을 등지고 보이지 않는 사방 신호등을 짐작한다
서로를 쓰러트리고 포옹한 채 죽어가고 싶은 백주(白晝)의 결투
피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숨겨두기에 알맞은 크기로
그가 나를 접을 것이다 부드럽게 접혀 있는 하얀 손수건처럼
녹아내리는 몸을, 완벽한 슬픔을 빨아들이려는 자세로
온통 햇빛에 젖어 번쩍거리는


직진하려는 버스보다
내가 먼저 길 위에서 지워진다 차창 밖에는
휘파람을 불던 도시의 새들이 날아간다

 

 


도플갱어 / 김명은

 

 

당신은 너무 멀어요
비가, 빠르게, 따라와요


플라스틱 의자를 굴리는 바람
앞서거니 뒤서거니,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도 이미 늦었죠
속도를 흠뻑 늦춰요 한번쯤
함께 비에 젖고 싶었어요
창가에 서면 빗줄기 같은 긴 한숨이 만져지곤 했죠
당신을 붙잡고 서 있는 어둠은?
일제히 바람을 타는 괭이갈매기들은 애써 피하는 법이 없죠
속도에 치인 차들이 상처 난 몸을 만져요
찢어진 차바퀴가 제 속을 들여다보는 동안
더러는 문을 닫고 서둘러 피할 곳을 찾고
물은 물 위를 달려요 후다닥 뛰어가는 물발자국을 보세요
익사체처럼 퉁퉁 불은 물을 질질 끌고 나와요
내 속에서 최초로 눈을 뜬 여자, 당신을 처음 발견한
그녀가 껴안고 있던 당신의 목을 원해요
우리는 몸을 섞어도 왜 하나일 수 없나요
당신과 나의 거리는?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번지는 파문
내 한심한 잣대로는 잴 수가 없어요, 어쩌죠
거대한 태양이 시퍼런 물속에서 날개를 퍼덕여요
바다가 들썩여요 허우적거리는 수평선
두 날개 사이에서 하얗게 솟구치던 소리
오 이런, 벼락을 맞은 듯 유리창에 금이 가기 시작해요
머리가 깨친 거울처럼 젖은 당신이 마구 쪼개져요
모서리마다 날카롭게 포개져 있는
바닥에 쏟아진 퍼즐 조각을 맞춰요
오랫동안 참아온 부위가 얼굴을 붉히며
좁은 계곡 같은 깊은 틈이 조금씩 되살아나는지
톱니바퀴 툭 툭 끊어지는 소리가 지나가요
당신 같은 건 잊겠다고 버리겠다고
요동치던 물, 내 속에 차오르고 있어요


이제 물 위를 걸어
당신에게 닿을 수 있어요

 

 

 

완벽한 잠 / 김명은

 

 

반쯤 벗겨진 아랫도리
며칠 불면증에 시달려 너덜너덜 해진 거리
버스 몇 대가 성당 쪽으로 달려갔다
계단 옆, 그림자를 뉘고 잠든 여자
버스에서 내리던 여자들이
그 검은 구멍을 피해 달아난다
헤벌어진 입


군데군데 썩은 치아 사이에
고요한 한 세계가 숨어 있다
깊은 동굴로 들어가고 있는 꿈이 평온하다
축축한 곳
그늘보다 깊고 어둡다


그녀는 잠든 척 눈을 감고 그 실눈으로
세상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고 있을지 모른다
까맣게 모여든 파리 떼들
가늘게 내려쌓인 햇살 가닥가닥
낮잠을 파고드는 기억을 헤집어서
내게 불면의 손을 뻗치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도 그녀의 잠 속으로 끼어들 수 없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노르스름한 꿈이 익어간다
길바닥에 누운 저 달콤한 낮잠
거긴 안으로 잠긴
그녀의 완벽한 방이다


등나무아래 모로 누워 몸을 뒤척이던 낙엽들
신호대기 중인 사람들을 빗금으로 바라본다

 

 

김명은
1963년 전남 해남 출생. 천상병문학제 귀천문학상 수상.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빈터' 동인.

 

 

제10회 수주문학상 수상작

 

 

 

[대상]

새는, / 이향미 (본명 . 이시하)



 낡고 어두운 그림자를 제 발목에 묶고 생의 안쪽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었을 테지 비에 젖은

 발목을 끌며 어린 날개를 무겁게 무겁게 퍼덕였을 테지, 가느다란 목덜미를 돌아 흐르는 제 절박한 울음소리를 자꾸자꾸 밀어냈을 테지 여물지 못한 발톱을 내려다보며 새는, 저 혼자 그만 부끄러웠을 테지, 그러다 또 울먹울먹도 했을 테지

 어둠이 깊었으므로 이제,
 어린 새의 이야기를 해도 좋으리

 나지막이 울음 잦아들던 어깨와 눈치껏 떨어내던 오래된 흉터들을 이제, 이야기해도 좋으리 잊혀가는 전설을 들려주듯,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낯설고 차가운 이국의 신화를 들려주듯 이제, 당신에게 어린 새를 이야기해도 좋으리

 새는,
 따스운 생의 아랫목에
 제 그림자를 누이고
 푸득푸득, 혼잣말을 했을 테지
 흥건하게 번지는 어둠을
 쓰윽, 닦아내기도 했을 테지

 새는.


[우수상]

버드나무 장례식 / 이종섶



두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었던
동네 어귀 버드나무 한 그루
길을 넓히기 위해 베어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연고조차 없어 애를 태웠으나
밑동이 잘려 우지끈 넘어진 나무를
운구하기 알맞게 자르기 시작했을 때
하나 둘 나타나는 유족들
가족들의 뿌리였던 할머니 위로
든든한 기둥이었던 남편이 먼저 내려왔고
그 위에 있던 자식들도 차례로 도착했다
평생 살을 맞대고 살던 남편이
허공으로 뻗어가는 어린 가지들 뒷바라지가 힘겨워
노모를 돌볼 생각조차 못했던 아들과 딸들이
기계톱의 부음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잠시 후면 트럭을 타고 떠나갈 가족들
유품으로 남긴 나이테 편지를 읽었을까
언제나 동구 밖을 바라보며 살았던 할머니
떠나간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는
땅속을 헤집는 뿌리 끝까지 그리움이 사무쳤는데
자를 건 자르고 뽑을 건 뽑으면서
가족들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수습한 후
마침내 지상에서 그 흔적을 완전히 지웠다
움푹 파인 집에 남겨진 뿌리들은
간혹 할머니의 기억을 틔우기도 하겠지만
빈집을 헤매다 숨을 거둘 것이다




[우수상]

박새의 장례식 /  김우진



 벚나무 가지에 하얀점박이 새울음이 걸려 있다 요란한 울음에 꽃들이 화르르 무너진다 안절부절, 이 나무 저 나무를 콩콩 뛰어날며 마음을 땅에 내려놓지 못하는 저 박새, 품고 살아온 내 안의 통한 같은 긴 소리, 바람이 눈물을 지우려고 따라 다닌다


 벚나무 뒷담, 끈끈이 쥐약통에 붙은 수컷, 눈을 뜨고 죽었다 나동그라진 비명이 서늘히 식었다 허공을 박차던 힘찬 날개는 고요히 접혔다 곁을 맴도는 암컷, 마음이 다급하다 사흘을 굶은 저 곡소리, 벚나무가지가 철렁 내려앉는다 


 봄꽃들도 문상을 한다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이 새울음을 쓰다듬는다 조문객으로 끼어 든 봄비의 눈시울이 촉촉하다 


 해 질녘 꽃비 내리는 벚나무 아래 새를 묻는다 찌찌찌, 마지막 울음도 함께 묻힌다 그제서야 마음을 내려놓고 포르르 빗속으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 꽃잎이 새의 무덤을 덮는다





[우수상]

슈퍼맨의 꿈 / 최준영 (본명 . 김경선)



  하늘대학 항공과 졸업생, 그는 추락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약발이 다 떨어진 슈퍼맨 4년 째 악몽에 시달린다 휘날리던 망토는 가시나무에 걸려 궤도 이탈, 배터리는 바닥이다 또 한 차례 사막의 모래바람이 몰려온다 무릎이 푹푹 빠진다 삼각팬티 한 장이 전부인 슈퍼맨, 단봉낙타 등에 빨대를 꽂아 연명한다

  모래물결무늬 속에 바다가 숨어있다 죽은 물고기가 하늘로 튀어오른다 감금당한 바다가 사라지던 날 키 큰 선인장이 앞치마를 두르고 이젠 안 속아 붉은 눈으로 사막의 중심을 쏘아본다 미라가 사막을 벌컥벌컥 삼켜 버릴 거야 한 때 슈퍼맨을 지지하던 낙타가 짙은 안개를 변명처럼 게워낸다 붉은 여우도 길의 꼬리를 놓쳤다 사막을 폭식한 슈퍼맨이 달그락달그락 라면을 끓여 먹는다 퉁퉁 불은 달은 오래도록 차갑게 식었다

 천하무적 슈퍼맨 모래언덕에 빠졌다 푸드득 조개무늬가 순식간에 날아간다 숨어있던 나뭇잎 무늬도 팔랑팔랑 사라진다 모래바람 소리가 밤새 낙타의 등에 쌓인다 사막에서 건너온 뙤약볕, 미라의 몸에 균열이 생긴다 수북한 모래봉분 속으로 실종된 꿈이 덤덤하게 걸어들어간다

 무덤이 하나 더 늘었다 이제 아무도 슈퍼맨을 믿지 않는다 정보지 구인란을 훑어보는 슈퍼맨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다 쿵! 침대 밑으로 백수건달 사내가 굴러 떨어진다




[제10회 수주문학상 심사평]



 390명의 투고 작품 중에서 본심에 올라온 것은 모두 51명의 작품이었다. 투고된 작품의 양도 적지 않았지만, 본심에 오른 작품의 수준도 만만치 않아 이 상에 대한 신인들의 뜨거운 관심이 놀라웠다. 이 상이 10회를 거듭해 오는 동안 좋은 시인을 발굴하고 또 시에 뜻을 둔 사람들을 고무시켜 우리 시단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여 왔음을 반갑고 기쁘게 느낄 수 있었다. 원고에서 투고자의 이름을 모두 빼고 가능한 한 모든 선입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심사를 진행한 것도 이 상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데 기여했으리라 생각된다. ‘수주 변영로’라는 큰 시인의 이름과 10년의 전통과 심사의 공정성을 두루 생각한다면, 수상자나 투고자 모두 이 상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본심에서 선자들의 손에 끝까지 남은 작품은 「버드나무 장례식」외 4편(이종섶), 「박새의 장례식」 외 4편(김우진), 「슈퍼맨의 꿈」외 4편(최준영), 「새는,」외 4편(이향미) 등이었다.

「버드나무 장례식」외 4편은 일상적인 삶의 평범한 경험을 극적인 형식에 담고 있지만, 나뭇잎 지는 것을 “등 위에 벼랑을 만들어 한순간에 떨어지는 종소리”로 표현하는 것과 같이 그것을 드러내는 이미지는 평범하지 않다. 그 이미지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미적 감각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시에 삶과 세계에 대한 상식적인 깨달음을 담아  제시하려는 태도가 보여 아쉬웠다.

「박새의 장례식」외 4편은 삶이나 자연의 비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그것을 극적으로 엮고 압축해내는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이 시의 이미지는 밀도와 집중력과 긴장으로 내면의 부정적인 정서를 미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밀어내는 힘이 진정성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인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적 완성도를 의식하고 지나치게 잘 쓰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시적 완성도를 떨어뜨린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슈퍼맨의 꿈」외 4편은 우선 재미있다. 그 재미는 부조리하고 무거운 삶과 일상을 경쾌하고 가벼운 어조로 웃게 만드는 반어적인 유희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 유희는 삶을 억압하는 거짓과 모순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통쾌하게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러나 충분히 육화되지 않아 장난스러워 보이는 표현과 태도가 가끔 눈에 띄었다.

「새는,」외 4편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면적인 정서에 새겨진 상처를 위무한다. 이 시들은 화려하고 세련된 표현은 없지만, 삶의 경험을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고 객관적으로 응시하며 그것이 충분히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좋은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것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강력하게 밀어 올리는 에너지가 다소 약해서 시가 밋밋해 보인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겠다.

 논의된 네 분의 작품 모두 나름대로의 개성적인 특징과 함께 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작품을 단번에 고르기는 쉽지 않았으나, 결국 이향미씨의 작품을 대상으로 밀기로 하였다. 이향미씨의 대상 수상을 축하하며, 아울러 우수상을 수상한 세 분에게도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이가림ㆍ김기택) 

 

 

제12회 시와정신 신인상 당선작 / 섬외 - 안성덕

 

출처 : 그대는, 봄
글쓴이 : 묘묘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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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덕


소나기 뛰어간 하늘이 깊다
아파트 옥상에 조각구름 몇 점 떠있고
무료한 나는 등대처럼 하품이 잦다
친정 사촌오라비 댁 혼사에 간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다
퉁퉁 면발은 불고 베어 문 단무지가 조각배 같다
냉장고 속 열무김치를 꺼내 올까, 그냥 먹는데
텔레비는 자꾸만 자지러진다 저희끼리 낄낄거린다
하품하듯 한 번쯤 웃어줘야 할 텐데
도무지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재방송처럼 늦은 점심을 먹는 휴일
선풍기가 뚝뚝 목을 꺾다가
절래절래 고개를 흔든다
사무실 자판기 커피 생각 간절하다
내 잠든 뒤에나 막배로 돌아와 그녀는
널브러진 짜장면 그릇 두런두런 치울 것이다
아직 용돈이 남아있는지 아이들은
한 마디도 없다



가마우지 / 안성덕



아내가 묶어준 넥타이를 바짝 조이고
비상대책확대영업회의에 참석한다
목이 조여 파닥거리다가
돌아와 미수금대장을 패대기친다
한바탕 졸린 목을 푼다

물 말아 맨밥을 몇 술 삼킨 그가
사무실을 나서며 넥타이를 매만진다
끝내 사장의 행방을 모른다는 거래처 미스 박 면전에
미수금명세를 들이대며 콕콕 쪼아대다가
유난히 긴 그녀의, 목걸이도 안 한
허술한 V존을 흘끔거린다

아내가 기다릴 생일선물은 글렀다
스카프라도 한 장 둘러줘야 할 텐데
게워 줄 거라곤 아침에 넘긴 미역국뿐
잔고 없는 급여이체통장뿐

늦은 귀가를 한 그가 졸린 목을 풀어놓는다
내일 아침 아내는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며
허전한 목에 또 넥타이를 묶어 줄 것이다


* 가마우지 : 중국 계림지방 어부들은 가마우지 목에 끈을 묶어 낚아챈 물고기를 게워내게 한다.



빈 들판 / 안성덕



단위농협에 갑니다
잠뱅이 걷어붙이고 이슬 차던 그 길입니다
구시렁거리던 참새 떼도 사라졌네요
타타타타 콤바인 툴툴거리던 들판
허수아비 모르게 대출금 갚으러 갑니다
빈들을 질러 온 바람이 우우우
우황 든 소처럼 웁니다
터벅터벅 단위농협에 갑니다
발자국 소리에 송사리 떼 소스라칩니다
하늘이 유난히 시푸르네요

된서리에 고욤이 익어 갑니다
우물거리던 자잘한 생각들
가슴 속 먹먹하네요
코스모스 한들거리던 들길로 부러 돌아갑니다
씨앗 다 내려놓고 벌써 꽃잎으로 묻었군요
타박타박 단위농협에 갑니다
돌아와 저녁나절엔 남은 보리갈이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습니다
무국 달큰할 것 같은 저녁밥상에
두런두런 마주앉겠습니다




스위치백 / 안성덕



반백의 사내가 뒤로 걷고 있다
세상은 이미 뒤로 걸을 만큼 만만하다는 걸까
태백선 통리와 도계를 넘나드는 기차처럼
두 팔을 휘저어 크랭크 돌리며
빡꾸를 하고 있다

군말 없이 따라온 부르튼 발자국 때문일까
발부리에 차이는 돌부리 때문일까
제 몸뚱이로 밟아 온 헐거워진 발자국
그 발자국에 꾹꾹 눈길 쥐어박으며
지그재그 뒷걸음치고 있다
쉰에서 마흔쯤 한 세월 되돌리고 싶은
저 뒷걸음질
새 발자국처럼 화살표 뒤로 찍고 있다
흐물흐물한 허벅지에 안간힘을 넣고 있다

뒤로 걷는 반백의 사내가
뒷걸음치며 앞으로 가고 있다
행여 되돌아가는 길 걸려 넘어질세라
함부로 찍어온 제 발자국 거둬들이며
쉰에서 예순으로 가고 있다


* 스위치백 : 태백선 통리와 도계 구간에서 4분쯤 기차가 뒤로 간다. 높은 산을 한 번에 넘을 수 없어 지그재그로 산을 넘어간다.




소리꾼 / 안성덕


자, 골라 부담 없이 골라
사철 입는 츄리닝이 단돈 만 원
남부시장 골목 그가 사철가를 한다
스을 슬 목을 푼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척척 앵기는 소리에 귀 밝은 이 두엇 기웃거리고
기다렸다는 듯 얼씨구, 원단이 참 좋네!
그의 마누라 추임새를 넣는다
가는 사람 어쩔거나 사람들아 가지 마라
골라골라 엄마도 골라 이모도 골라
목이 풀려 제비 노정기를 중중모리로 뽑는다
마수걸이 지폐 한 장 마빡에 붙이고
북 치듯 손뼉 장단을 친다
골라골라 아줌마도 골라 아저씨도 골라
흑운 박차고 백운 무릅쓰고 아무나 골라
자진모리 휘모리로 몰아간다
시장바닥에 피는 몇 동이나 토했나
잘 삭힌 똥물 몇 동이 마셨나, 얼핏 듣기로 명창이다
순댓집 갸웃한 창틈으로 떡목 몇
멱따는 소리 새어나오고 상설할인매장 건너
그가 귀명창 불러모아 판을 키우고 있다
흥보네 박통처럼 전대를 불리고 있다
바글바글 게거품 무는 저 사내
거칠고 쉰 수리성이다


2008년 제 15회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작 / 모래내 그림자극外 4편 - 박준

 

모래내 그림자극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본 골목은, 왼편 담벼락과 오른편 옹벽처럼 닫혀있다 막 올려다본 하늘이 골목처럼 어두워지고 있다 어느 하루처럼 환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외등을 보면 사람의 몸에서 먼저 달려 나오는 것이 있다 오늘도 골목에서 너는 그림자였고 나는 신발을 꺾어 신은 배역을 맡았다 서로 다른 시간에서 유영하던 그림자들이 한 귀퉁이씩 엉키고 포개지는 일은 몸의 한기(寒氣)를 털어내려 볕 아래로 모이는 일과 같다 집시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자극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나와 처음으로 스친 그림자는 담에 널린 담요를 걷어 한쪽 다리가 없는 비둘기를 감싸 안고 다닌 적이 있다 그림자는 비둘기를 날려주고 담요를 다시 널어놓았다 그 그림자는 옆으로 걷는 것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다음 그림자는 비디오 테잎의 같은 장면을 서른두 번 돌려보고 집에서 나오는 길이다 열한 번 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는 울었고 스물여섯 번 째 같은 장면에서 그림자가 사정을 했다 내 그림자가 길게 따라 가고 있는 그림자는 언젠가 버스 옆자리에 함께 앉고 싶은 그림자다 그 그림자는 말더듬는 일을 즐겨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골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두운 골목, 사실 사람의 몸에서 그림자보다 먼저 튀어 나오는 것은 노래다, 울지 않으려고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은 하나 같이 고음(高音)이다 노래가 다음 노래를 부르고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를 붙잡는 골목이 모래내에는 많다

 

 

 

 탑


  삼남매의 손을 탄 종이인형 같네,
  목이 곧잘 앞으로 꺾어지는 당신
  주름은 무게와 무게가 서로 얽혔던 흔적이라
  적어두고 나는 오랫동안 진전이 없었네
  보조바퀴처럼 당신을 따라 다니네
  양은냄비 뚜껑에 배추김치가 올라앉는 무게,
  밥상의 무게를 밀어두고 무게를
  뒤집으면 팔월, 무주공산에
  뒤집으면 삼월, 홍싸리가 피네
  오늘 저녁 즈음엔 귀한 무게를 만난다는 괘를 싣고 길가로 나오네
  무게의 내력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은
  내 생에서 절망이 아닌 것들을 골라내는 일
  당신은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종이만 주웠으므로
  시간당 한 번 꼴로 나는 노트에 적어 두었네
  ‘날지 못하는 새는 있어도 울지 못하는 새는 없다’
  길가 담벼락, 온몸의 무게를 들어
  버려진 쥬스병을 당신이 꺼낼 때 나는 은유를 꺼내네
  황달 앓는 막내들 같아, 수레에 잔뜩 실린 골판 골판들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는 골목을 돌다
  갑자기 그 수레를 만나면 누구라도 ‘탑’하고 걸음을 멈출 수 있었네
  그 탑을 조심스럽게 피해 돌다 보면
  사면으로 쌓인 골판과 골판 ‘사이’에
  오늘의 결정(結晶)같은 쥬스병이 맺혀 있었는데
  수레를 쫓으며 속기한 내 노트에는 ‘사이’가 ‘사리’라고 오기되기도 했네
  언덕을 내려가는 당신의 몸이 뒤로 젖혀지네
  무게를 잊고 처음 바람을 읽는 어린 새 같아
  어둠보다 높이 오른 탑의 꽁지가, 막 들썩이기 시작했네

 

 

 


유성고시원 화재기

 


 출입구 쪽 벽면을 제외한 3면이 옹벽 또는 내력벽으로 된 경우에도 가로균열은 사소한 겁니다 ‘실내에서는 정숙해 주세요’ 표어를 끼고 돌면 고시원 총무실이 있었죠 총무는 멸망의 법문들을 속기하고 있었습니다 느리게 발톱을 깎는 것은 일종의 예비행위로 보여지는 바, 이 앞을 지나는 고시생들은 소음, 진동규제법 개정시행령을 되새깁니다 슬리퍼는 절대로 끌지 아니 합니다 재산권을 일부 상실한 호주(戶主)로부터 걸려온 전화에서는 누룩내가 났습니다 일몰 후로 기억합니다 저는 짐을 꾸렸습니다 이번 달은 창이 없는 호실로 갑니다 짐을 운반하는 도중, 과실로 법전 제27페이지 내지 제32페이지의 일부를 손괴하였습니다 접착 테이프를 빌리러 총무를 찾아갔을 때 별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총무는 채점을 하다말고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매년 이차에서 떨어졌던 그도, 탈출해 나왔다면 내년쯤에는 아마 이등병이 되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왜 결핍의 누대(累代)에는 늘 붉은 줄이 그어졌는지 알고 계실까요? 3층에 사는 목덜미가 허연 여자들이 이차를 마치고 돌아온 듯했습니다. 공동주방실에서 부치는 달걀냄새가 온 방실을 점유하고 있었죠 스탠드등이 나가고 소방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습니다 누전이나 방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단지 그동안 울먹울먹했던 것들이 캄캄하게 울어 버린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중                략-

 

 위의 사람은 유성고시원 화재사건에 관하여 이와 같이 진술하는 바이며 진술내용이 목격 사실과 다를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휴일
 

  단감 깎아 먹으며 추석특집으로 보던 써커스
  몸통이 반 잘려나가도 방글방글 웃는
  우리 동네에도 있지 삼거리 빵굼터 지나 꿈 의상실을 끼고
  곡예 하듯 우회전하는 3번 마을버스
  핸들을 잡고 상반신만 그을음을 옴팡 뒤집어 쓴 사람
  자전거를 몰고 지하집모기처럼 냥냥대는 여자를 피해
  그의 휴일은 시작되고
  미니슈퍼마켙에서 베지밀을 산다
  그와 베지밀 종이팩 사이
  살구색 빨대가 배차시간처럼 팽팽하다
  베지밀이 딸려 올라오는 중인지
  그의 체액이 흘러나가는 중인지
  흡입, 아직은 알 수 없다
  달 번지(番地)의 길들이 모이는 곳에 버스차고지가 있다
  에어콤푸레샤 소리를 비집고 나오는 운행과장 목소리
  자전거 바퀴는 자글거리고
  휴일을 맞은 그의 어깨가 폐범퍼처럼 압축, 된다
  폐달을 밟자 바지 자락이 힐끔힐끔 추켜 올라간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그의 하체가
  오드리 헵번처럼 희다
  팽창, 하는 근린공원의 휴일
  회차해서 돌아오던 자전거가 넘어진다
  무릎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오십년만에 처음 넘어진 그가 웃는다
  배기, 콸콸

 

 

 

 찌그러진 곳 펴드립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들은 저마다의 길에 흰 구름 같은 문양을 흘리고 왔다고 해요 쌍방과실  의 사고현장에서 털썩 주저앉는 것은 습작기에나 하는 짓이라나요, 해를 등지고 반셔터를  누르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들은 드로잉만으로 나 2594와 08 다 5673의 찰나의 만남을 원숙하게 표현했다 합니다. 갓길에서 연락처를 주고받은 그들이 일제히 뒷목에 손을 대고 사라지는 모습은 이 길의 커튼콜일까요
  굴다리 밑 ‘찌그러진 곳 펴드립니다’ 보다 나 2594를 완벽히 복원한 작품은 302호 병실 옹벽에 붙은 <그 벽에 그 맨드라미>(종이에 크레파스, 257×364mm, 2006)였습니다. 남자와 여자 맨드라미와 아이 그리고 원근법을 철저히 무시한 채로 나 2594가 존재하는 이 그림은 마티즈가 십이지장 수술을 받은 후 그린 회화들처럼 불명확한 이미지들이 균등한 공간 안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나 2594의 뒷범퍼는 원래 찌그러져 있었던 거죠
  어쨌든 나는 이곳의 회화를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영양식 식단에 딸려 나오는 우유만 있으면 그들은 혼자 밥을 먹는 일에도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원재료명들과 공장주소와 식품의 유형과 이 제품은 재정경제부 소비자 피해보상규정에 의거 교환 또는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의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떼어 맞춰보면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불러볼 수도 있었죠 아침에는 넷이 모여 낄낄대고 저녁이면 셋이 모여 낄낄대는 것은 넷 중 하나는 야간 발 택시드라이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흰 구름 같은 문양이 있는 길로 정확히 돌아갑니다 혹 동신교통이나 개미운수 동인 집단을 만나면 버릇없이 방이동, 연신내, 구로역 따블이라 외치지 않기로 해요 저 길들의 형상기억 예술가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요 댕댕하게 펴진 철판들이 여름 볕을 튕겨 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죠

 2008년 중앙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시 당선소감“꿈에 그리던 별 따다가 내 방에 걸어”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ilg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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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3주년 중앙 신인문학상

    그림자는 아무도 기대지 않은 벽에서 몰려와 잡풀 무성한 골목 안에 슬며시 몸을 풀어 놓고 갔다. 그런 날 밤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친구의 고층 아파트를 찾아가곤 했다. 나를 달로 화성으로 북극성으로 날라다 줄 것 같던 사각의 방. 한 번도 눌러 보지 못한 비밀의 버튼은 꽤나 높은 곳에 매달려 반짝였다. 별을 딸 수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올라탈 수 있던 공중의 꿈들.

    그런 반짝이는 꿈들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당선 통보로 즐거운 나의 일상 하나를 잃게 되었지만, 별 하나 따다가 내 방에 걸어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낙선을 반복할 때마다 시 쓰기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펜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머니의 유언에 있었다. 어머니와 마지막 순간 꼭 좋은 시인이 되겠다고 약속한 지 7년 만에 당신과의 약속을 절반 지킬 수 있게 되어 기쁠 따름이다. 하늘에서 얼마나 흐뭇해하고 계실지, 그 미소가 오늘 밤 계속 아른거린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 아직 너무도 부족한 나에게 시 쓰는 것을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끝까지 살아남는 시인이 되리라는 약속과 함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이토록 반짝이는 언어의 빛들을 처음 알려주신 양승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게으른 나를 항상 뜨겁게 채찍질하시며 시에게 목숨 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박주택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열심히 쓰라고 언제나 따뜻하게 격려해 주신 김재홍, 김종회 선생님과 이문재 선생님, 그리고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신 최상진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경희대 국문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린다. 끝까지 함께 시 쓰기를 약속한 재범·은기·규진·진명·은지·현진을 비롯한 여러 경희문예창작단 선후배 여러분과 문학도로서의 삶에 나침반이 되어 준 현대문학연구회의 선배님들께도 감사드린다. 또한 하늘새재 선후배들을 비롯해 따뜻이 관심 가져준 국문과 선후배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이 밖에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은 분들이 너무도 많지만, 지면이 작은 것을 핑계 삼아 차후에 일일이 감사함을 전하겠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임채순님을 비롯한 온 가족과 함께 이 기쁨을 누리고 싶다.

    시 심사평
    “사물을 보는 시선 삶 전체로 향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을 하게 되어 있다. 낙선한 한 사람으로 이 글을 읽을 것이다. 최소한 유심히 읽을 만한 사람은 그 낙선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심사소감에 동의할 사람은 없을 듯싶다. 실은 심사소감처럼 상투적이고 설득력 없는 글도 없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이 바뀌어도, 심지어는 응모된 작품들의 경향이 그렇게나 변해도 예나 지금이나 초지일관 심사소감은 새롭지 않다거나 아니면 유행을 탄다거나 낡은 전통에 매달려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떤 시를 쓰라는 말씀인가! 대안의 예를 제시해 주시든지….이렇게 투덜거릴 것이다. 심사위원 당사자들의 시나 글을 새삼 떠올리면서, 지적사항에 가장 많이 해당하는 자가 바로 당신이지 않은가! 그 원성이 들려온다(맞다! 모두가 선후에 서서 고투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상투적인 심사평을 계속해서 늘어놓자면, 그럼 왜 그럴까. 새롭다고 느껴졌던 시가 바로 낡아지는 것을 볼 때가 흔하다. 유행을 타는 시다.
    평론가들이 많이 언급하는 시인이 고전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 소치이다. 젊은 문학도의 조급증은 눈앞의 물결을 수평선으로 착각하는 셈이다.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온 낡디낡은 주문이 있다. 과연 스스로에게 시는 진실(眞實)과 진심(眞心)의 뗏목인가에 대한 되물음이다. ‘우선’ 그것이 아니어서야, 그것이 느껴지지 않아서야 이 하찮은 ‘언어 상태’는 어디에 기댈 것인가. 그 되물음이 깊고 익어서 ‘방법’을 낳고 ‘파괴’를 낳고 다시 익을 때 ‘개성’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엄밀히 신인에게 개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진실한 발성인가가 그 가능성의 초점일 수밖에 없다.

    잘 쓴 분들로 삼십여 분이 넘어왔다. 그중 어렵지 않게 세 사람으로 압축이 되었는데 임경섭·조율·이우성 제씨가 그들이다. 모두 삶을 감싸 안으려는 생각의 두께가 다른 응모작들보다 치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율 씨의 시는 생활의 이면에 있는 풍경들을 촘촘히 살피고 선명하게 내면화하는 매혹이 있었다. ‘골목의 무릎’이며 ‘빨래방’ ‘세탁기’ 등의 제목이 말해주듯 거창하지 않은 세목들이 거뜬히 시가 되었는데 일정한 패턴화가 단점이었다. 이에 비해 이우성 씨의 시들은 훨씬 언어미학적으로 경쾌한 맛이 있었다. ‘어쩜 풍경이 멈춰 있다고 생각했을까’ ‘평생 먹을 수 있는 잎사귀가 정해져 있다면’ 같은 시는 군데군데 알 수 없는 이미지의 돌출이 걸리긴 해도 삶의 풍경을 파악하는 감각이 새롭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전체 응모작이 한 작품을 잘라 나열한 것이라 해도 될 만큼 각 작품에 초점이 모아지지 않았고 뒤쪽에 배열한 소품들은 서툴렀다. 가령 ‘오후의 냄새를 떠올리는 내일의 분주함’같은 구절은 치명적이다.

    임경섭 씨가 당선자가 되었다. 잘 썼다. 응모한 여섯 편의 시가 모두 고르다는 데 우선 점수가 주어졌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초점을 잃지 않고 삶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말이 세련되지 않은 것은 장점이자 단점인데 진지하고 끈덕진 면으로 보면 장점이고 필요 이상 시가 길어져서 여운을 빼앗는 점에서 단점이다. ‘잘 썼다’는 것은 오래 습작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뜻인데 그것이 자신을 묶고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 주길 바란다. 이, 외진 오솔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한다.

    위 언급한 외에 유병록·김상혁·남민영·이해강 씨의 시들이 아까웠으며 더불어 결심에 오른 모든 작품은 심사위원이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한 좋은 시들임을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

    ◆심사위원=나희덕·장석남 ◆예심위원=강정·김선우·권혁웅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제9회 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자 [중앙일보]

    시 임경섭 소설 김성중 평론 이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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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43주년 중앙 신인문학상 제9회 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자가 결정됐다. 올해도 중앙 신인문학상 담당자 앞으로 5000편이 넘는 응모작이 쇄도했다. 분야별 예심과 본심으로 이뤄진 엄정한 심사 과정을 통해 시인과 소설가·문학평론가가 탄생했다. 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자는 등단의 영예와 함께 각각 1000만원(단편소설 부문), 500만원(시·평론 부문)의 상금을 받는다. 시상식은 다음달 24일 서울 상공회의소 대회의실에서 미당·황순원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열린다. 중앙일보 창간 기념으로 진행되는 중앙 신인문학상은 LG그룹과 중앙m&b가 후원한다. 아래는 당선자 명단.

    ▶시:임경섭 ‘진열장의 내력’

    ▶ 소설:김성중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

    ▶ 평론:이학영 ‘물의 에피파니 혹은 심연의 자화상-한강론’

     

     

    제 6회 문학수첩 신인상 당선작 / 통조림외 - 황수아

     

    제6회 《문학수첩》신인상 당선작 _ 황수아

     

    통조림 (외 4편)


      황수아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나는 얕은 방의 깊은 곳으로 발자국을 찍는다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나는 밤의 비린 쪽 음영으로 눈물을 전송한다

    나는 굽어진 세상에서 상하게 될 좁은 것들을 궁리한다

    그리하여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정든 물건들을 내 발바닥에 싣는다, 떠날 채비를 한다

    세상의 깡통들이 곧 신호를 보내올 것이다


    네가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이를테면 방바닥에 구멍을 뚫는다

    아니, 나는 그저 내 구멍으로 들어가는 푸른 정어리다


     

     


    불꽃




    텅 빈 라이터 속에는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

    있을 법한 불꽃을 숨겨두던 젊은 날

    수상한 연기가 어디 있냐고 묻는 이에게

    다만 여기에 없다고 대답하던 시절

    나는 간통보다 부적절한 누명을 쓰고

    담배를 끊고도 무심결에 라이터를 줍는 연애를 한다


    그리하여 공명을 다쳤노라고

    푸른 불꽃 속에 상처를 관통하던 연기의 영혼

    꿈을 꾸는 꿈, 불을 끄는 불, 기억하는 기억을 보고 난 뒤에야

    없는 곳에 비로소 있는 그대에게 안달이 났다

    결국 영영 닿지 못할 것처럼


    무릇 젊음을 향해 찍은 발자국도

    정처 없이 떨어진 담배꽁초도

    누가 볼까 숨겨두던 이별도

    대책 없이 벌어진 일이다


    이제 남은 일은

    텅 빈 라이터로 불꽃을 점화하며

    그대에게 연기를 빌리는 일


     

     


    잠원동 미세스 롯데캐슬




      틈만 나면 내 가랑이를 파고드는 당신이 오늘은 식도로 넘어왔어. 목구멍이 칼칼하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냐. 꼬챙이처럼 내 몸에 찔러 넣은 당신이 나를 싹 다 해먹는 동안, 천만에 발광하는 몸을 다시 자라나게 하는 고루한 명품관이 있는걸. 그런 줄 모르고 심심한 몸의 맛을 견디기 위해 노란 불빛이 새어나는 거대 빌딩이란 소스에 나를 찍어먹는 당신. 이 아리따운 몸의 토핑을 한번 봐. 당신이 파고들 때마다 척척 달라붙는 A급 드레스를 입고, 나는 가장 싱싱하게 늙은 퐁듀. 이봐, 좀 더 맛있게 먹어줄 수 없겠어?


     

     


    서른 해




    결국 비가 내린다

    기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럴 땐 이름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

    버려진 내 이름으로 누군가 허기를 달래리라

    우산을 들고 걷는다

    웅덩이마다 첨벙이는 기억

    감광액에 담긴 후 인화되는 발자국 몇 개


    잊지 않기 위해

    내 가장 순한 청춘을 암실에 말린다

    젖은 말로 묘사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을


    우산을 버리고 버스를 타면

    다시 나는 젖는다

    몇 개 사막을 지나면서도 우산을 버리지 못하던 날들

    언젠가 떠올릴 후회의 시편을 사막의 모래 위에 적으며 그렇게

    흠뻑 더럽고 싶던 20대를 끝냈다

    버스는 우기의 종착지로 달려가고 있다


     

     


    토네이도




    한때 나에게 진지했던 남자가 찾아왔다

    토네이도가 몰아친 날이었다

    우리는 깊고 비린 카페로 숨어들었다


    한때 나에게 진지했던 남자가

    바람 소리보다 가벼운 담배를 물었다

    그동안 섹스한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귀에 익은 교성이 찻잔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는 마주 앉았고

    한때 나에게 진지했던 남자가

    절정에 다다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토네이도는 문틈에 자신의 성기를 넣고 있었다


    찻값을 계산하면서 그에게

    어디로 가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카페에서 나와

    서로 다른 돌풍 속으로 빨려들었다

     



    ■ 당선소감 ■

    시는 진주조개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이제 나는 울면서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게 시라고 생각해왔다.

      당선소식을 듣고 천천히 돌아봤다. 만일 그때 내가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시인이 될 수 있었을까. 대신 아파 주고 싶은 시간을 건너오지 않았다면, 당신 때문에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마냥 행복했더라면.

      시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는 말을 믿는다. 그러므로 진주조개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앞으로 나는 기꺼이 고통 받으리라.


      제 시를 처음으로 숨쉬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말로 다하지 못하는 감사를 전합니다. 정우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창수 선배, 재훈 선배, 03년부터 함께 한 중앙문학연구회 멤버들, 스무 살 때부터 저를 길러주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선생님들, 기쁨을 함께 해준 찬이,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신 부모님, 어여쁜 감성을 물려주신 할머니 할아버지, 내 동생 주원이, 그리고 절망을 희망으로 기록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 황수아 / 1980년 서울 출생.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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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사평 ■

    경험적 구체성 속에 살아난 심미적 미감



      2008년 〈문학수첩신인상〉 시 부문에는 2,60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작년에 비해 괄목할 만한 응모 증가가 눈에 띈다. 오랜 시간의 노력이 녹아 있는 시편들 덕분에, 심사위원들은 즐겁고도 보람 있는 시 읽기를 경험했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우리 《문학수첩》이 메이저 매체로서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아직도 우리 시대에 시를 향한 열망이 마르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물적 사례라고 생각된다. 응모자들의 시편은, 담론적 집중성을 보이는 경향보다는, 각자의 경험적 구체성을 바탕으로 개개의 언어 미학의 완성을 꾀하려는 의욕을 두루 보여주었다. 편차가 심하기는 했지만, 읽을 만한 시편들이 많았음을 기록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이 개성과 완결성의 황금 분할을 통해 우리 시의 미래를 개척해 가려는 젊은 언어들의 긍정적 면모라고 생각되었다.


      예심을 통해 올라온 분들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분들을 가나다순으로 밝히면, 김재홍, 오세광, 전형주, 최빈, 황수아 씨 등이었다. 김재홍, 오세광, 전형주 씨의 시편들은 유려한 언어 구사와 함께 매우 안정된 시상을 보여주어 여러 모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었다. 말의 호흡을 이끌어가는 힘과 이미지 조형에서도 일정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더러는 작품들 사이의 균질성이 떨어지고, 더러는 미적 완결성에서 미더움에 이르지 못하고, 더러는 신인으로서의 새로운 언어적 패기가 모자라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합의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최빈 씨와 황수아 씨의 작품에서는 일상의 활력 속에서 가장 근원적인 생의 상처와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품과 격이 매우 미덥게 관찰되었다. 최빈 씨의 작품들은 이미 작년에도 역량과 가능성을 한껏 보인바 있는데, 이번에도 감각의 밀도가 정제되어 수준작으로 평가되었다. 황수아 씨의 작품들은 신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잘 보여주었는데, 특별히 경험적 구체성 속에 심미적 감각을 살려 재생하고 배열하는 언어적 힘이 밀도 있게 관찰되었다. 이분들의 시편은 우리 시의 다양한 미학적 충동과 방향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주어, 심사위원들로서는 어느 분이 당선자로 뽑히더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만큼 작품의 성취가 균질적이고, 충분한 습작 시간을 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심미적 감각과 경험적 구체성이 어울려 있는 황수아 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합의하였다.


      심사위원들로서는, 앞으로 더욱 젊고 패기에 찬 젊은 언어들이 우리 《문학수첩》에 관심을 가지고 도전해 오기를 바란다. 이번에 당선되지 않은 분들도 더욱 정진(精進)하기를 바라고, 당선자에게는 초심을 건강하게 견지하면서 활달한 자기 갱신을 이루어가는 신인으로서의 정진을 새삼 부탁드린다.


    * 심사위원 : 김재홍, 김종철, 유성호

     

    2008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시부문 수상작

     

     

     

    <대상>

     

    침엽의 생존방식 / 박인숙

                       

    활엽을 꿈 꾼 시간만큼 목마름도 길어
    긴 목마름의 절정에서 돋아난 가시들
    침엽은 햇살도 조금 바람도 조금
    마음을 말아 욕심을 줄인다


    대리운전하는 내 친구 금자
    밤마다 도시의 휘청임을 갈무리 하는 사이
    보도 블록 위에 포장마차로 뿌리 내린 민수씨
    그들은 조금 웃고 조금 운다
    바람 속에 붙박혀 시간을 견디는 일이
    침엽의 유전자를 가진 자들의 몫이므로
    뾰족이 가둔 눈물이 침엽의 키를 늘이고
    세월을 새겨 가는 것


    그들의 계절에는 극적인 퇴장
    화려한 등장 따위는 없다
    한가한 날 고작 흰 구름 몇 가닥 바늘 끝에 걸쳐두거나
    흐린 겨울 하늘이 너무 시릴 때
    눈꽃으로 피사체를 만들어 보거나


    혹한의 계절에도 홀로
    숲의 푸른 내력을 지키는 건 침엽이다
    그들의 날카로운 생존방식이 숲을 깨우고
    바람의 깃털을 고른다
    햇살도 이 숲에선 금빛으로 따끔 따끔 빛난다

     

     

    <은상>

     

    은행나무의 안부 / 김택희

                     

                                  
    우편배달부는 내가 사인을 하는 동안에도
    흰 봉투에 새겨진 길을 살피느라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건네 준
    은행잎으로 만들었다는 푸른 알약들
    안부를 묻는 지인의 손길처럼 싱싱하다
    몸 속 오지의 좁은 길까지
    큰 혈관으로 혹은 미세혈관으로
    길을 터준다고 했다


    요즈음 나는 가끔씩
    자주 다니던 길 위에서 헤맬 때가 있었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했다


    굽은 길 위에 서 있던 우편배달부도 돌아간 어둑 저녁
    은행나무 아래에 선다
    푸들푸들 바람 비벼 나누는 인사
    잎 잎으로 뻗은 손 흔들고 있다
    동서남북 흩어진 지구인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져
    이 저녁 나는
    키 큰 한 그루의 여름 은행나무로 선다

     

     

    <은상>

     

    바람의 본적 /  류명순


                              
    바람의 신경은 온통 깃발에 쏠려 있다
    모든 걸 흔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바람의 입이 물고 흔들어대는 저 초록의 산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날개들이 있다
    벼랑 끝에 서서 암 덩어리처럼 뭉쳐진 소나무를 보았다

    전신에 바늘이 박힌 채 하늘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몇 만 번의 흔들림으로 나이가 먹었을 그 소나무
    수많은 바늘을 꽂고 호젓이 저물어 갔다
    바람의 본적을 묻고 싶다
    내가 모르는 어느 별에다 호적을 두고 온 것인지
    히말리아보다 몇 배의 습곡이 되었을 바람의 역사
    나의 날은 늘 흔들림의 날들이었다
    낮달처럼 그림자도 없이
    그렇게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망치도 없이 등이 휜 여자의 늙은 뼈에
    수 천 개의 구멍을 뚫은 바람
    나도 오래된 무처럼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본적이 어디인지도 모를 그 바람을 쫓아
    어석어석 살아가야만 했다

     

    <동상>

     

    봄날, 코스모스를 심다 / 최연숙


    텅 빈 봄
    안개 넘어 한 줄기
    기다림의 빛을 끌어당기며
    오늘 코스모스를 심는다
    더디게 이파리들 키워
    꿈이 되지 못한 커다란 생명들
    위로처럼 왔다가고
    지글거리는 한낮을 숨죽여
    우주의 시계가 세시쯤 되면
    가는 목 세워 바라볼 하늘에
    둥글고 빛나는 그것과
    눈 맞출 수 있어야한다
    뚫린 가슴에
    바람이 둥지를 틀 무렵이면
    작은 저것 어쩌면 제 몸만큼
    작은 내일로 피겠지
    기다림으로 피겠지

     

    <동상>

     

    붉은 칸나가 피는 이맘 때 /  신현임

     

    햇빛을 한 잔의 맥주처럼 단숨에 들이킨
    붉은 칸나가 길섶을 휘휘 저으며 비틀거리고 있다.
    누군가 뜯다 내버린 붉은 칸나 꽃잎이
    상처에서 흘린 핏빛처럼 처연하다.


    그는 앞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의 목소리는 빙글빙글 돌아 공중으로 분해 되었다.
    자꾸 붉게 올라가는 꽃대만 망연히 바라보고 싶었다.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는 대신 꽃의 주름만 만지작거렸다.
    소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지상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 생에 단 한번뿐일까? 골똘히 나는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붉은 칸나는 꽃 위에 꽃을 더 자꾸 피워 올리고 있었다.


    온몸으로 화들짝 감각이 불타올랐다.
    잊은 지 오래된 정념의 깃발도 다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불혹의 나이에 난파된 배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이려니 수긍하기로 했다.
    내가 흔들리다 부서지기 전에 그는 날개를 달고 떠났고
    나는 그를 더 이상 흔들지 않기 위해 침묵했다.
    붉은 칸나가 피는 계절이 오면
    오래된 이야기 가슴에서 비워내지 못해
    한 잔 술에 거나해서 거리를 갈지자로 걷는다.

    붉은 칸나를 만나면 꺼이꺼이 울기도 한다

     

    <동상>

     

    커피는 희랍어로 말 걸어온다 / 서희자

     

                                  
    몇 주, 가뭄 든 정서에 가랑비가 내리더니
    감색 숄 걸친 나무 한 그루의 분위길 깔고 있다
    저리 곱게 물들려면 얼마큼 내공을 쌓아야 할까
    삶의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가지끝 바람이 차다
    마술 주전자가 딸깍 딸깍 연기를 뿜어 올리자
    안개 속의 여객선 한 척! 내게로 온다
    블랙박스를 구호품인 양 챙기는 사이
    맨하탄 시가지가 떠오르면서 티파니의 아침은
    몇 모금의 환유처럼 달콤했다 역마살 낀 그 시절도
    알고 보면 고뇌를 우려 낸 커피 색이다


    어느새, 검게 물들기 시작한 지중해
    내 고달픈 여정도 정박을 꿈꾸는가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든다
    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피라밋!
    그 슬픈 신화를 넘기는 순간
    뜨겁게 달군 일상이 금세 식어버렸다

     

    <가작>

     

    옥탑방 애벌레 /  장선희

     

                           
    행거에 걸린 아침 햇살
    트럭에 실려온 짐처럼 칭얼댄다
    창문 앞에 더께 놓은 해진 보따리
    숨기지 못한 가파른 호흡이 여기저기
    소금꽃 피워 물고 있다
    벽에 핀 곰팡이가 눅눅해져야
    옥탑방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오래 묵은 어둠이 부르튼 손가락처럼
    휘휘 라면을 젓는다
    창문 흔들며 안부 전하는 겨울바람
    아득한 옥탑방 사람에게만 밤은
    액정화면 같은 창문에 별문자를 찍어보낸다
    칠 벗겨진 뿔테안경 벗으면
    듬성듬성 흐릿한 아랫마을 불빛
    밤에만 생기는 옥탑방 정원이다
    라면 국물로 데워진 온기 속으로 몸 구부리는 사내
    사다리 타고 하늘로 오르는 꿈을 덮은
    두 겹 세 겹의 홑이불 속에서
    동그르 말리는 그의 몸
    멀리 날아갈 날개를 만들었는지
    자고 일어난 허공 한 쪽이 둥그스름 부풀어 있다

     

     

    시 부문 심사평 - 김후란 , 오세영

    시 부문 전체 응모작 11,101편 가운데 기초심사와 예비심사를 거쳐 본심에 회부된 작품은 모두 26편이었다. 이를 놓고 깊이 있는 정독과 진지한 토론을 거쳐 발표 내용과 같은 입상작들을 결정하였다.

    전체적으로 투고작도 많았고, 작품의 수준도 높았다. 어느 문학상 응모작에 비추어 보더라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특히 대상을 받은 작품이 그러했다. 기성 시인들의 수준을 능가한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듯 하다.
    여성분들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생활에 관한 시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삶에 대한 아름다운 시선과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돋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건강한 세계관, 섬세한 감수성, 세련된 수사와 미의식 등이 조화롭게 형상화된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대상 수상작인 “침엽의 생존방식”은 활엽수와 침엽수의 특징들을 날카롭게 대조시켜 삶의 존재론적 의미를 제시한 우수작이다. 진솔하지만 반짝거리는 미학적 수사를 곁들인 언어 운용, 주관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통어할 수 있는 인식 능력, 지나치게 비약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친근하지도 않은 상상력의 제시와 그 구성의 완결성 등은 이 시인의 문학적 재능을 충분히 드러내 주는 이 시의 특징들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지적해야할 것은 이 시가 단순히 미학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 어떤 인생론적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시란 이렇듯 미학과 철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은행나무의 안부” 역시 군더더기의 어휘를 과감히 배제하고, 절제된 언어와 감각적인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 잘 형상화된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이 시의 매력은 두 개의 상상력을 마치 비단을 직조하듯 가로 세로 섬세하게 엮어 놓았다는 점에 있다.
    그 하나는 우체부가 골목 골목 따라 편지를 배달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삼킨 알약이 혈관을 따라 이동하는 이야기인데 이 상반하는 두가지 상상력들이 “은행나무”라는 사물에 결합됨으로써 커다란 정서적 반전을 일으킨다. 본질적으로 시가 상상력에 초대하여 쓰여 진다고 할때 이 시인이 지닌 이같은 장점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바람의 본적”은 감각적 표현이 남 다르다. 당연히 이미지의 구사력이 돋보인다.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이미지 등이 마치 운동회날 육상 경기에 나선 선수들의 경주와 같이 화려하다. 그러나 감각적 표현에 지나치게 집착하다보니 직유법이나 소유격형 은유 등이 다소 빈번하게 등장하여 함축미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약화되었다는 점 등이 아쉽다.
    “봄날 코스모스를 심다”는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이는 작품이다. 시상의 전개가 논리적이며 사물화 된 감정의 제시가 돋보인다. 진술이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으나 그 함축된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우주의 시계가 세시쯤 되면 / 가는 목 세워 바라 볼 하늘’과 같은 시행에는 인간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엿보인다.

    “붉은 칸나가 피는 이맘 때”는 여성만이 지니는 생리적 정서를 아주 섬세하게 그리되 단순히 그리는 것으로서 끝낸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사물로 객관화 시킨다. 칸나를 중년의 여인으로 대비시킨 상상력의 직관이 남다르다. 다만 진술이 다소 사변적이고 이미지들의 집중성이 조금 모자란다는 것이 다소의 흠이 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가능하면 수식어의 사용을 절제하기 바란다.
    “커피는 희랍어로 말을 걸어 온다”는 화사한 감각의 이미지들이 아름답다. 한폭의 잘 그려진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이다.
    자유연상의 기법이라고나 할까.
    이미지가 이미지를 따라서 자유롭게 항해하는 정신의 여유로움과 그 미적 유희가 신선한 즐거움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훌륭한 시란 그 이상의 것어어야 한다. 아쉬운 것은 이 아름다운 시를 통해서 시인이 진정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앞에서 밝힌 바이지만 이상 입상작들은 기성 시인들의 그것에 결코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지금과 같은 자세로 꾸준히 노력하시면 분명 우리 시단의 새로운 별들이 될 것임을 믿는다.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2008년 하반기 당선작 / 이이체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2008년 하반기 당선작 / 이이체


    나무 라디오


    잎사귀들이 살고 있는 스피커, 한쪽의 귀가 없다.
    나이테가 생기는 책상에 당신은 앉아 있다
    주파수를 돌리자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허공은 종이를 찢어 한쪽 소리를 날려보낸다
    나무로 된 음악은 숲을 기억한다.
    모든 음악은 기억이 부르는 것
    당신은 그것을 씨앗들에게 달아준다.
    소리 없는 나뭇가지들,
    뿌리들의 유쾌한 휘파람.
    계절을 돌며 노래를 주파수를 녹음(錄音)하는 나무 라디오

    뛰는 심장을 어루만지곤 했다
    절벽에 뿌리를 내린 나무도 그와 같지
    그것이 당신의 절규하는 첫 발음, 굽은 음색의 첫 싹
    고사목 같은 목소리들이 자정을 알린다
    스피커에서는 시퍼렇게 늙은 소리들이 절벽을 뛰어내렸지
    소리를 채록하는 것은 나무들의 오랜 습관이라는 것을 알아야
    라디오의 청취자가 되는 거지

    전파가 흘려주는 자유는 꼭 구부러져 있었네.
    숲을 이루지 못한 소리들이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조용한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지 녹음하지 못한 울음들이 당신에게 갈 때,
    스피커가 아닌 라디오를 끄지

    절벽의 나무로 만든 스피커가 채록한 소리들은
    다 휘어져 있지
    기억해. 모든 소리들은 떨어지는 것들이야.


    소규모 감정 공작실 


    어제 잊어버린 문장이야말로 완벽한 것임을 믿는다.
    하얗게 질린 천장 아래로 기둥 하나가 내리뻗어 있고,
    당신과 수작업으로 만든 감정들이 둘러앉아 있다.
    나는 그것들은 내 눈의 무늬로 새긴다.
    감정들을 만들고 전시해온 시간들이 지문을 닳게 했다.
    담배를 피웠던 흔적도 남아 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해 물러 보이는 감정들과, 너무 오래되어 상해 버린 감정들 사이사이의 바닥에, 바닥에 세상에선 볼 수 없는 검은 꽃으로 흐드러진 담뱃재들이 내게 안녕 안녕 인사한다. 당신이 버려둔 담배도 있다. 담배를 끄려고 길게 비벼댄 자국들이 희끄무레하게 끌려간 주저흔의 골목길 같다.

    일찌감치 잃어버린 웃음이 어떤 감정 위에 아로새겨져 있다.
    저 똑바르게 각진 웃음들. 웃을 수 있느냐 너는 웃을 수 있느냐.
    다른 감정들은 울음이나 일그러진 눈두덩이나 씩씩거리는 입술로 무늬를 갈음한 상태다.
    기둥에 맞닿은 바닥은 너무 깊은 교접에 무너질 리도 없다.
    벽에 없는 창문이 불러들이는 구름들
    문장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잊어버리는 것은 나의 새로운 고질병,
    나는 언제나 불모지에서 문장을 잃어버리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의 차이를 세공하는 버릇이 있다.

    지문이 묻어나지 않게 되었으므로 수작업이 훨씬 수월하다.
    새로운 감정들이란 퍽이나 밝은데 당신이 없다.
    당신이 버려둔 담배는 오래 전에 넘어져 있다.
    기둥이 되지 않겠다 기필코 쓰러지겠다.
    말을 목구멍 아래로 넘긴다.
    무늬가 없다는 건 올바른 일이지만 무늬가 없는 것일수록 삼키기 쉽다.
    벽이 없는 창문에서 햇살이 들어온다.
    빛의 줄기들은 창문을 찾는데 오래 걸렸을 것이다.
    눈동자의 문신이 되어 상상하는 감정들을 본다.
    내일은 빛이 돌아가는 순간에 있을 것이다.


    공룡 스티커 박스


    방바닥으로 바퀴벌레의 주검이 떨어졌다. 그 주위로 장례식을 치르듯 옷가지들이 모여 앉아 있지만 뼈에 맞는 옷가지는 없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동대문 쇼핑백들 끝으로 시선을 지나친다. 네모진 박스들로 쌓아올린 첨탑의 아랫도리, 초라한 귀퉁이에서 공룡 스티커들이 다닥다닥 붙은 어느 박스와 눈을 마주한다.

    박스의 네모진 틈에서 뼛조각들의 썩은 냄새가 근조화환처럼 피고 있다. 바퀴벌레의 장례식은 나와 공룡 박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된다. 죽은 바퀴벌레는 차갑지만 나는 만지지 않는다. 체온을 유지한다는 것처럼 지루한 건 없다.
    공룡이 냉혈동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뼈를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
    선풍기는 공룡 박스 냄새의 부고를 퍼뜨린다. 바람에도 모기들은 곡(哭)을 하며 현관문으로 향하고
    살아서 걸어 들어오는 신발들. 뼈를 하얗게 내놓고 다니는 사람들.

    뼈와 살은 서로를 옥죄는 상부상조
    탑은 본시 먹구름 아래에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불현듯 박스들이 탑보다는 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현관문 저 편에서 소리가 죽는다. 뿌연 창문 뒤엔 애도하는 조기가 후두둑 물기를 떨군다. 거리가 한산하다. 박스 덩어리들 중에서 유독 공룡 박스가 높고 크다. 공룡 스티커의 탓인가, 그렇지만 공룡 박스의 밑은 바닥이다. 탑은 높을수록 좋은 법이다. 오래 전에서 공룡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룡들은 왜 뼈만 남겨두고 사라졌는지 묻고 싶으나 그만큼 늙고 오래된 것들은 없다.(실은 모두들 늙었다.) 바퀴벌레가 유일하게 그만한 노년이었으나 이미 죽었지 않나. 종신형의 고생물이 끝맺자, 나는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개어놓으며 죽음을 피한다. 뼈를 내놓고 멀뚱멀뚱 널브러져 있는 신발들을 가지런히 눕힌다. 공룡들의 임종은 적요하다.

    살짝 열린 현관문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기를 보며 관뚜껑을 닫는다.
    바깥에서 장례식의 만취한 망자가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
    절그럭거리며 내 뼈들이 일어나 현관으로 간다.


    자각몽(自覺夢)


    밤처럼 흘러내려온 영화관의 말석을 마주보며 스크린이 깔렸다
    자막은 나의 피부였다
    본 적 없는 꿈이 영사기 바깥에 있었고 눈 먼
    나에게 꿈은 이미 음악이었다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야말로 가장 음악적이었다

    노랫말이 끝날 무렵에야 나는 내가 살아온 날들이
    감정 이상이고 내가 살아갈 날들이란
    인생 같은 영화 한 편일 것임을 깨달았다
    보이는 것만을 믿어 온 세월이 죄악이었고
    나는 조조할인만큼도 용서받지 못했다
    유배지에서는 자막을 읽을 수 없었음에도 나는 죄의
    삯으로 눈이 보이는 순간들을 부여받았다
    장면들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갈 때마다
    음악들은 각자의 면죄부를 흥얼거렸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까지, 나는
    한 마디 대사조차 듣지 못했지만 노랫말은 존재했다는 걸 알았다
    참으로 죽음 같은 장면들이었다
    피부를 갖지 못한 음악들이 꿈을 꾸었으며
    꿈속에서만 매진된 영화로 스크린은 피범벅이 되었다
    용서받지 못한 이들은 면죄부를 연주할 수 없었다


    이산(離散) 


    나비의 날개에서 봄이 접힌다. 휘몰아치는 나선계단의 말미에 붉게 빛나는 대문이 있다. 등(燈) 대신 피를 밝혀 놓은 문설주, 바닥엔 낮잠을 깨운 기와(起臥)가 즐비하다. 열린 문틈으로 노랗게 익은 마당이 펼쳐지고, 원근법으로 늘어진 시절이 덩그러니 누워 있다. 지붕 아래 과년한 나무들을 베어 지은 툇마루에 기녀들이 앉아 꽃잎들이 날아가는 쪽으로 눈길을 흘린다. 가장자리에서 가만히 타오르는 무화과나무, 불꽃이 몰래 살고 있는 나무의 후생이 푸르게 타오른다. 태양 대신 점점이 번쩍이는 꽃송이들이 하늘하늘 날아간다. 최후의 종교가 사랑방에서 단잠에 빠져 있다. 기녀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날개 같은 부채를 휘둘러 불꽃을 시들게 한다. 불현듯 별채에서 순례자들이 바람결에 통곡을 반주한다. 서까래가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어느 계절, 어느 시절인지 분간할 수 없다. 순례를 가득 진 등짝들이 몰려간다.

    이이체(본명 : 이재훈) / 1988년 충북 청주 출생.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휴학 중.

     



     

    |選後感|

    200여 분의 응모자들 가운데 예심을 거쳐 열 분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전체 응모자의 수나 전체적인 작품의 수준이 모두 예년에 비해 낮았다. 그러나 본심에 오른 열 분들은 모두 우리 시의 평균적인 수준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개 이십대에서 삼십대 초, 중반의 젊은 응모자들이었는데 이 현상이 《현대시》에만 국한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젊은 응모자들의 투고가 부쩍 많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본심에 오른 열 분은 가나다순으로 강동완, 김원옥, 김지율, 김환, 김효은, 박송이, 유민재, 이동규, 이이체, 조영민 씨들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작품을 통독한 후 이 가운데 김환, 이동규, 이이체, 조영민 씨들의 작품을 놓고 최종적으로 논의하였다. 이 중 김환 씨는 최근 젊은 기성 시인들의 답습과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점, 이동규 씨는 과도한 관념의 노출 등이 지적되어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최종으로 남은 이이체, 조영민 씨를 놓고 다시 논의를 했다. 조영민 씨의 작품은 분출되는 시적 에너지와 유연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인 비유의 사용이 거슬렸다. 그에 비해 이이체 씨의 작품은 다른 응모자들과 견주어볼 때 개성과 만족할 만한 시적 수준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젊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때문에 잠시 망설이기도 하였으나, 논의 끝에 이이체 씨를 새로운 시인으로 시단에 소개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조영민, 김환, 이동규 씨도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채(異彩)로운 이체(異體)들

    이이체 씨를 추천한다. 이이체의 시는 문화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혼잡스럽게 뒤섞이는 특이한 풍경을 보여준다. 스피커에는 잎사귀들이 살고 있고 책상에는 나이테가 자란다. 그러니까 이 인공물들에는 자연의 세목들이 정령들처럼 뛰어놀고 있다. 뛰어논다고 했지만 그 역동성은 물상들 각각의 것이고 이질적인 물상들 사이에는 치명적인 어긋남이 변함없이 지속되어 그 활발한 움직임 자체를 의미 상실의 지속, 즉 죽음의 음울한 무도로 바꾸어버린다. "바퀴벌레의 장례식은 나와 공룡 박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된다"라는 구절이 지시하듯이 말이다.

    이이체 시는 이렇게 '죽음처럼 어긋나버린 상황'과 '흥분된 움직임' 사이의 온갖 관계에 대한 성찰 및 실험에서 특별한 정서체들을 생산한다. 그 정서체들은 이미지이기도 하고, 이미지에 대한 운동화 된 상념이기도 하며, 또한 그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이기도 한데, '좌우지당간에'(!) 그 정서체들 안에는 동화와 이질성의 미묘한 변증법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생각해 보라. "자막은 나의 피부"라니! 세계는 자막을 통해서만 읽혀지는데, 그 자막은 나의 피부로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매우 이채로운 젊은 시인을 만나서 매우 기쁘다. (정과리)

    늘 드리는 상투적인 말씀이지만, 본지에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리며, 당선자에겐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하신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 원구식, 정과리, 박주택, 오형엽

     

     

    2008 전태일문학상 우수작 / 김밥말이 골목 - 최일걸

     

     

    <2008 전태일문학상 우수작>

     

    김밥말이 골목 / 최일걸

     

     

    암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따개비모양

    봉제공장들이 저를 단단하게 오므린 채 거꾸로 서서

    수천대의 재봉틀로 하루를 돌린다

    자꾸 달아나는 시간을 노루발로 고정하고

    아찔한 곡선박기로 내일을 꿈꿔보지만

    어김없이 되돌아박기가 여공들을 꿰매버린다

    햇빛 한 점 안 들어오는 지하 공장은 먼지로 포화상태,

    재단사의 가위질은 쉼 없이 여공들의 꽁무니를 베어내지만

    그래도 김밥말이 골목은 그녀들의 꼬리뼈에 매달려 있다

    재단사의 줄자가 정오를 휘감으면

    봉제공장 거리의 봉합선이 뜯기고

    여공들이 한꺼번에 밥알처럼 쏟아져 나와

    한 땀 한 땀 김밥말이 골목으로 향한다

    양은냄비보다 먼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여공들은

    수다를 첨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지만

    김밥말이로 돌돌 말아 한통속이 된다

    라면 다발과 함께 풀어지는 그녀들의 일상이

    식당 아줌마의 손길을 거쳐 김밥에 뒤섞인다

    식당 아줌마가 손으로 김밥을 꾹꾹 누를 즈음이면

    그녀들은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다

    접시에 담긴 김밥을 묵묵히 바라보며

    그녀들은 옆구리가 터진 김밥처럼

    네팔로 필리핀으로 소말리아로 연변으로

    38선 이북으로 삐져나간다 

    굶주린 가족들을 생각하면 일용할 양식도

    독약처럼 치명적이어서

    김밥을 목구멍에 넘길 수 없다

    목구멍이란 얼마나 질기고 처절한 골목인가

    과연 김밥 한 줄로 그 골목을 통과해도 되는 걸까

    그녀들은 막막하고 까마득하다.

     

    2008 진주신문 가을문예 시 당선작 / 아버지의 연필 -전형관

     

     

    아버지의 연필 / 전형관 

     

    풍구의 회오리가 가슴께를 후려친다
    갈탄의 낭자한 선혈 사이로
    피 맛을 본 강철이 달아오른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강철연필은 학력편차가 크다
    몇 자의 비문만 학습한 경우가 있고
    공덕문을 줄줄이 암기하는 실력파도 있다
    까막눈 돌쟁이는 단지 내장된 글자들을
    강철연필로 파내는 것뿐이다 
    거북이나 두꺼비를 만나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환절기에는 떠나는 사람들 많다
    해마다 반복되는 덕분에 그의 한문 실력도
    지명이나 이름자에 두각을 나타냈다

     

    담금질로 단단해지는 것은 강철뿐
    돌쟁이의 가슴은 반비례로 물렁해졌다
    구부리는 법을 터득한 까닭에 굽실거렸어도
    칠십 평생 부러지지 않았다 그만큼만
    각을 세우는 기술 덕분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 적 있다

     

    아버지는 물푸레나무들과 뒷산으로 올라가
    겨우내 돌아오지 않았다
    강철연필들은 처음으로 주인의 이름을 새겼고
    얼어붙은 산 밑 저수지에서 떵떵
    망치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찬물에 손이라도 씻는지 지난 봄에는 물푸레
    푸른 물이 내려오기도 했다 오늘도
    녹슨 강철연필들만 벌겋게 복습 중이다

     

    旌 旋 全 公 重 鉉 之 墓

     

     

     

    시당선 소감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아버지는 일제시대 소학교만 마치셨다. 내남없이 어렵던 시절 우리라고 별 수 있었겠나. 아들 하나 딸 셋 데리고 부모님은 서울로 올라오셨다. 서울서 얻은 막내딸까지 일남사녀 오르르 머리맡에 요강 놓고 자랐다. 학식 없고 기술 없이 자식 가르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천수답만도 못한 일이다. 평생을 할석공(割石工)으로 보내신 아버지는 저녁마다 정을 벼리셨다. 강철을 부러지지 않을 만큼 담금질하는 기술은 숱한 체험에서 얻으셨으리라. 이 나이 되도록 아버지 음덕에 얹혀산다. 아직 아버지의 그것만큼 적절한 강도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남기신 연필을 다 쓰기 전에 온전한 내 연필을 마련하겠다. 그 연필로 세상의 각질을 벗겨내고 싶다. 이 몸의 살과 뼈를 아버지가 주셨다면 내 시의 살과 뼈는 심사위원 선생님께서 주신 것이니 친부(親父)와 다름 아니다. 부자(父子)의 예를 갖춰 올바르게 쓰겠다는 다짐 올린다.

    나무가 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 시 또한 현실로부터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사소한 존재들과 내 이웃의 안색도 살피겠다던 다짐을 이 기회에 다시 명토 박는다. 주변의 사물과 정황들은 진심이 아니면 절대 속내를 털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네들과의 대화가 캄캄했던 적 많았다. 이 또한 내 귀의 깊이가 모자란 탓이고 자상한 눈길을 유지하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까지 시 비슷한 조각글을 쓰면서 가족의 온기를 내다팔고 부모의 고단함을 손쉽게 우려먹었다. 퇴근 후 저녁마다 식탁에 앉아 모니터만 보는 남편이 뭐 그리 살가웠겠는가. 어린것들 딴에는 주말마다 시집만 파고 있는 아빠가 얼마나 서운했겠는가. 이참에 고맙다는 마음 전한다. 어머니를 포함한 우리 가족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도 없을 거라 확신한다. 짐짓 모른 척, 커피 한 잔 놔주고 자리 피하던 아내에게 오늘의 맨 앞자리를 양보하겠다.

    문우들과 함께하던 온라인 토론과 삼겹살집 소주가 떠오른다. 유려한 시를 보며 질투하기도 했고 한 달 가까이 고민한 습작시가 성토당할 땐 늪보다 깊은 절망에 빠졌었다. 이제 오늘을 기준으로 쉼표 하나 찍는다. 잠시 숨을 다듬고 그들과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겠다. 장성혜, 정현옥, 서채영, 김옥전, 박기동, 서동인, 김은경, 노운미 등등 우리 공부방 시인들에게 따뜻한 저녁 한 끼 대접하련다. 내게는 시형(詩兄) 다름 아닌 유종인 시인과도 새벽까지 할 이야기가 많다. 소설가 윤정모 선생님을 비롯한 윤사모 식구들께도 짐벙지게 한 상 마련해야겠다. 향우회처럼 이물 없는 수필드림팀 필진들과도 환한 웃음을 나눌 참이다. 아울러 여기까지 참고 와준 내 자신도 격려한다. 습작 1,000편을 채우기 전에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일련번호 528번째에 이렇게 큰 인연을 만났다. 1,000편까지 300편 남았다. 두렵다고 하진 않겠다. 앞길을 장담하기보다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새긴다. 두루 모든 분들께 고맙고 심사위원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예를 올린다. 올 가을은 짧았지만 내겐 참으로 깊다.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뼈를 깎겠다.

     

    전 영 관
    충남 청양 출생
    2007 토지문학상 수상
    2008 진주신문 가을문예 당선.

     

     

    시 심사평 '허허벌판에 詩匠이 되길'

     

    기술은 있되 장인정신이 없는 삶은 망해버리기 마련이다. 장인정신은 어제 써먹은 기술을 오늘 아침에 쓸모없다 버릴 줄 아는 성정머리가 있어야 좋겠다. 누가 보면 꼭 벌어먹기에 좋은 짓거리를 하는 사람 말이다. 광명의 획득은 그런 짓거리 끝에 얻어지는 것 아닐까.

    보자, 본심으로 넘어온 편수는 모두 160편. 단 응모자의 이름은 모두 빠져있고 응모 번호만으로 대체 되어 있다.

    '섬망'외 9편이 우선 눈에 들었다. 의식과 무의식을 종횡무진 오락가락하며 쓴 정신주의 시라고 할까. 그 장대한 사유가 정진, 또 정진해서 우주의 깊이, 우주의 가락을 터득했더라면, 놀라운 대시인의 출현을 알릴 뻔 했다. 재기는 살리되, 너무 이른 이상이 되지 말고, 세계의 고전들을 탐독하여 자기화하는 노력의 대가인 이상이 되길!

    '빙어'외 7편이 또 눈에 들었다. '빙어'에서 노숙자의 신세를 "라면 몇 가닥 보이는 내장을 비워냈다"고 본 것이나, '동해(凍害)'에서 "내 어머니 배에 튼 자국은 더 깊어진다"라고 아름답고 섬세하게도 세필화를 그렸다. 하지만 딱히 이 당돌한 시대를 업고 갈 뜨거운 힘과 맞선 찬 지성이 동시에 보이지는 않는다.

    '아버지의 연필'외 8편이 가장 나중에 눈에 들었다. 음, 돌쟁이 생부의 생사를 잘도나 그리고 있군. 돌 속의 부처를 석공이 불러낸다고 않던가, 돌쟁이의 강철연필이 죽음을 펄철 살아있는 돌 육신으로 불러냈구나!

    모든 시인은 강철연필로 죽음을 불러내는지 모른다. 하여, 가장 믿음직한 시인을 세상에 내보낸다. '새로 쓰는 계곡(史)'의 "밤꽃이 허연 눈썹으로 바라보던 식구들 저녁이 있다" 등등 또 다른 시편들이 믿음을 더했다.
    혹,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허허벌판 시장(詩匠)이 되길!

     

    서정춘 선생 약력

    1941년 전남 순천만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죽편', '봄, 파르티잔', '귀' 등
    <박용래 문학상><유심 작품상> 등 수상

     

    2008 59회 문학사상 상반기 신인문학상 당선작

     

    59회 <문학사상> 상반기 신인문학상 당선작

     

     

       가장 뜨거운 씨앗 외 4편 / 정미정(鄭美貞)

     

         내 말에 심지가 느껴지십니까

         그럼 불을 붙이세요

         백열등을 켠 당신의 눈동자에

         활활 타오르는 나, 바짝바짝 혀부터 마르네요

         언제 가슴 밑바닥을 헤집었나요

         벼린 이빨 사이 야무지게 장전한 16연발탄

         서로의 급소에 맞춤인 걸요

         햇살이 머릴 박으며 뛰어드는 당신의 단도

         잽싸게 내 머릿속을 갈가리 찢어놓자

         꼬리에 불붙은 양 날뛰는

         짐승 한 마리

         벌겋게 달군 긴 혀로 당신의 목을 휘감아 절벽 아래로 내던졌어요

         악착같은 당신도 질세라

         날 선 혀 안에서 서슬 퍼런 기관총을 마구 쏘아 올렸죠

         웃을까 말까 하던 당신과 나의 관계,

         확실하게 찢어져 버린 거죠

         악!

         떨어진 살점들이 사이렌처럼 울고 꺾인 팔다리가 구급차를 부르네요

         - 뻣뻣하게 굳은 혀를 절단해야 합니다

         - 피가 엉긴 시간들도 잘라내야 합니다

         날콩 같은 비린 물내가 두 볼을 타고 흘러요

         낭자한 말의 탄피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당신 손바닥 위

         미안해,

         그 작고도 여린 씨앗 한 알

         이제 떨어뜨릴까 해요

     

     

       베토벤바이러스 / 정미정(鄭美貞)

     

                  코끝에 앉은 말랑말랑한 공기가 견디기 힘들다면 주저하지 말고 옷을 벗어 봐

         처음이라는 듯 알몸을 모로 세우고 엄지발가락 꼬물꼬물 파고드는 두려움의 길 따윈

         이젠 접어 버려 남은 네 개의 발가락 위로 가지런히 시선을 떨어뜨려 봐 팅팅 소리가

         나게 묶어 봐  너의 뒤로 와서 아는 내 몸이 차갑다면 울어 봐 서 있는 것이 어색하다

         면 누워도 좋지 내 목에 목도리인 양 안겨 바이올린처럼 울어봐 너를 읽는 내가 가빠

         지잖아 포르테 포르티시모 프레스토

     

                  바삭하게 구운 햇살이 배를 깔고 누운 11월 오후란 말야 귓볼에 맞닿은 허공이

         말이야 흘러내리는 바람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 집어넣어 만지는 체취란 말야 발

         야 발가벗은  내 영혼에 소소히 소름이 서리처럼 앉으면  도드라진 실핏줄 여덟 개만

         묶어 봐 발목을 당기면  낮은 레로 웃고  손목을 잡으면 파 하고 웃겠어 내 혀가 내는

         소리에 너조차  여든여덟 개의 이빨을 열고 웃어제끼는  순간은 말이야  가장 완벽한

         피아니스트의 연주이거든

     

               커다란 나무일수록 딱딱한 껍질 속에 부드러운 속살이 맨발로 춤추고 있음을 너

         는 알까 아주 부드러운 혀로만 조율되는 내 커다란 호두나무피아노,  주저 말고 너를

         벗어 봐

     

     

       뱀장어스튜 / 정미정(鄭美貞)

     

         새로운 요리법 하나 소개하죠

         만만치는 않을 겁니다

         자, 소매부터 걷어 볼까요

         일단 오르고 싶은 산 앞에 서세요

         그런 다음 뚜껑을 열어

         빼곡히 들어찬 비늘 같은 나뭇잎들

         측선물결운동으로 기어오르는 길에 자신을

         집어넣으세요

         꼬불꼬불 길을 따라 몸을 풀면 늑골 사이 호흡이 아코디언 연주를 할

          겁니다

         슬슬 온도를 올려주세요

         아마 당신의 비점등에서 요동을 치게 될 겁니다 이때

         참으세요

         참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답니다

         그 다음부터는 온도를 중불로 낮춰 뭉근하게 끓이는 거지요

         가끔 벌깨덩굴 향초롱 솔솔 뿌려 넣고

         저만치 쪼르르 달려가다 돌아오는 청설모 맑은 눈도

         집어넣으세요

         베제비꽃이 작은 소리로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서

         땀구멍 숨구멍 다 열어놓고

         끌어안아주세요

         당신이 담긴 모든 것들과 소통하게 될 때

         비워지고 없는 나, 비로소 느낍니다

         딸그락달그락

         수다스런 냄비뚜껑 사이로 퍼지는

         구수한 당신의

         맛,

         한번 느껴보세요

     

     

       가장 강력한 접착제 / 정미정(鄭美貞)

     

         막,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

         연약한 부리에 물고 산등성이 너머로 숨기는

         저 새의

         힘

     

         땅땅, 제 몸에 못을 친 목련

         보안 알몸을 걸어

         속 부신 깃발이 되고야마는

         힘

     

         아직은 시려

         열어두지 못한 창 너머 베란다

         환장하게 피어난 철쭉

         따라 실실 웃을 수밖에 없는

         힘

     

         수맥을 찾아

         끝없이 길을 나선

         막막한 지난 시간 도르르 말아

         하늘님 야윈 손가락에

         노오란 가락지 기꺼이 되는 구례 산동마을 산수유

         그 힘

     

         봄이다

     

     

       병천아우내순대 / 정미정(鄭美貞)

     

         주인아지매 농익은 입담처럼 잘도 터진 순대는

         비린내를 갖은 양념으로 재웠다는데

         고소한 육즙은 오리지널이라는데

         가늘고 부드러운 소창이 뭉텅뭉텅 입맛을 확 당기는데

         관순아! 관순아! 내 말 들리나

     

         장터 국밥 가마솥에 한 김 오르면

         등짐 부린 사내들 툭툭 어깨 털며 아무렇게나 마주앉아

         식구처럼 매운 눈빛 쓰다듬으며 후후 시린 삶 불어가며

         서로 입김을 나누느라

         더운 열기에 붕대처럼 싸여 지워져가는 줄도 몰랐다는데

         관순아!

         선지 같은 긴 어둠에 박힌 뼈 속까지 쩌렁거리는 너의 앙칼진 외침

         아우내 어느 마룻장 밑에 펄럭이고 있단 말이냐

     

         오백구십 페이지 한국사의 이해

         단 한 줄도 널 이해하지 못했구나

         무명저고리 치마로 일제의 총알 받아냈더니

         참말로 무명이구나

         관순아! 관순아! 내말 들리나

     

         유전되지 못한 네가

         유악약고 비굴한 네가

         독한 소수가 아니면 불러내지도 못하는 너를

         막소금에 찍어 삼키고 있다

         갈가리 찢어진 네가

         땅켜에 잦아든 검붉은 네 심장이

         한 끼 주린 허기 위해 들어선 후미진 골목식당

         뒤돌아서 본

         신장개업 간판 위에 떨며 서 있구나

         관순아!

     

     

        

    다채로운 현대시단에 꼭 더하고 싶은 시인

    시부문 심사평

    심사위원(유안진 시인, 김유중 문학평론가>

     

       문학 특히 詩가 우리 시대에 어떤 매력을 갖게 하는지, 이번에도 총 213명의 응모자들이 각기 열 편의

    작품으로 응모했으나, 심사위원 한 사람이 최소한 1060여 편의 작품을 심사한 셈이다. 농경 시대에 감성

    에서부터 가 본 적 없는 미래로 데려가 주는 상상력을 보여 준 작품에 이르기까지,광대하고 아득한 시간

    과 공간을 연출해 주는 응모 작품들은 다양하고 다채로웠다.이처럼 다양하고 다채로운응모 작품 중에서,

    지금의 우리 현대시들과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게 해 주고 싶고, 당당하게 앞세울 수 잇는 참신하고 깜짝

    스럽고 재치로 무장한 작품을 선정하고 싶었다.예술은 사기다. 경련이다 발작이고 반란이고 놀라움이고

    진실이고 감동이다.... 등등의 무수한 개념도 물론 고려되었으리라.

     

       오랜 내공의 낌새가 내비치는 작품, 오랜 연마의 과정에서 시에 대한 안목과 발상과 구조화 및 표현 기

    교 등에서 깊이와 크기가 가늠되는 작품을 뽑고 싶었다.정식으로 등단한 시인 수만도 2만이라는 현재, 그

    렇고 그런 작품을 뽑아서 新人이라고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우리 시단에 팽배해 있으니까.

     

      따라서 우리 시대의 시가 지향하는 방향에 대한 감각이 느껴지는 작품, 최소한 열 편의 응모작들이 일관

    성 있게 비슷한 방향을 지향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심사한 결과,  6인의 작품이 예심을 통과했다. 최종심

    에 올라온 6인의 작품을 두고 3인의 심사위원이 의견 일치를 본 결과, 정미정 씨와 김성신 씨의 작품이 남

    게 되었다.김성신 씨의 <히말라야 물고기> 외의 작품들은 나름대로 일관성 있는 시세계의 흐름으로 상당

    기간의 습작기를 거친 흔적이 엿보였고,정미정 씨의 작품은 어조에 감춰진 은근한 힘을 확인하게 해 주는

    작품이라고 판단되었다. 특히 전달하려는 시 세계에서 무게감이 느껴졌고,  짜임새에서 다소 불안감은 있

    으나, 전체적으로 발상이나 구조화 및 기발한 표현과기교 면에서 김성신 씨보다 재치 있고 참신하다는 의

    견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정미정 씨의 <가장 뜨거운 씨앗> 외 네 편을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정미정 씨는 <써지지

    않는 봄><고흐와 사이프러스 1/2>에서 기발함과 발랄함이 참신하며,  슬픔과 아픔 이상의 감동을 느끼게

    했다. 따라서 우리 시단에 내세울만한 新人다운 능력을 갖춘 것으로 판단되었다.

     

        안타깝게도 김성신 씨의 경우 <히말라야의 물고기><아버지 등에 도배지를 바르다><화성 탐사 로봇>

    <하늘엔 수천 개의 연탄이 타고 있다><나비처럼> 등은  정미정 씨의 참신함에  못 미친다는 것이 중론이

    었음을 알려 드리고 싶다.  시는 언어를 다루는 언어 표현 예술임을 염두에 두기 바라며, 다음을 기약하길

    바란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 한다.

     

    정미정(鄭美貞)

    1966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제9회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제9회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오이비누 외 2편 / 서화

     

    거울 앞에 놓인 오이비누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는
    비누의 속내를 따라가 본다


    어떤 얼룩도 그에게 닿으면 스르르 풀어져
    손길 스칠 적마다 오이향 풍기며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데


    모든 기억은 거품일 뿐이라고
    날마다 제 몸을 줄여가는 여자
    지워질 때마다 제 이름을 확인하려고
    생각 더욱 깊어지는 여자
    가끔은 일탈을 꿈꾸며
    낯선 손등을 따라 나서지만
    두고 온 몸을 잊지 못해 서둘러 돌아서는
    마른 오이꽃 같은 여자


    마지막 한 점의 근심까지도 제 몫으로 품은 채
    형체도 없이 사라지려고
    수돗물 틀 때마다 오이향 풍긴다

     

     

    부석사에서 / 서화

     

    부석사 안양루 돌계단에 쭈그려 앉은 노파
    플라스틱 바구니를 지키고 있다
    맨 처음 초록이었을 바구니 속 강정 몇 개를 끼니와 바꾸려고
    노파는 아까부터 웃는 연습 중이다
    간간이 다녀가는 바람이 유일한 참배객인 수상쩍은 한나절
    안양루 지붕 위에 뒹굴던 햇살이 흥정을 한다
    만져보고 눌러보고
    강정은 이내 눅눅해진다
    바삭거림이 사라진 강정은 아무도 사가지 않는다
    뒤적이던 햇살도 슬며시 물러나고
    하품을 깨물며 졸기 시작하는 노파
    손가락 드나들기 좋을 만큼 듬성한 머리숱과
    주르륵 눈물 흘려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골진 얼굴에
    만개한 저승꽃


    저렇게 천천히 부석사 뜬 돌을 닮아 보려고
    노파는 강정을 핑계로 졸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천천히 떠오르는 연습 중인 노파
    점자를 읽듯 강정 바구니를 더듬으며 저린 다리를 편다


    어디서 음복을 끝내고 왔는지
    벌건 얼굴로 강정을 집어드는 노을 한 점

     

     

    자동세차장 / 서화

     

    해저동굴처럼 캄캄한 자동세차장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상어 한 마리 지느러미를 흔들며 기다리고 있다
    화려한 꽃밭으로 위장한 상어의 입 속
    무수한 촉수들이 흔들린다
    나는 통째로 삼켜진다
    한 끼 식사를 위하여 뿌려지는 물줄기
    알맞게 반죽한 나를 맛보는 상어의 감촉에
    온몸에 오스스 소름 돋는다
    무수한 꽃들이 피어난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진한 사랑에 까무룩 정신을 놓는다
    차가운 입술이 천천히 살결을 더듬는다
    격렬한 사랑으로 찢어진 지느러미를 흔들며
    빠르게 뱃속의 물체를 뿜어내는 상어,
    심하게 기침을 하며 물러난다

     

    소나기 멈추고 무지개 섰다
    사랑을 버린 길이 넓고 차다

     

     

     

    서화

    1960년 영월 출생.

    상지영서대 문예창작과 졸업.

    시동인 '가릉빈가', '시치미' 회원.

    (사) 한국편지가족 강원지회장.

     

     

     

    꽃 옆에 서있는 돌 외 2편 / 정수경

     


    풋내가 사방으로 번지는 봄 끝물
    철쭉꽃 배시시 붉은
    입술 벌어지는 소리에
    감감하던 화강암
    온몸을 열어 귀기울인다

     

    초식공룡의 발소리 잠재운 불 속
    암반이었던 바닷속 어느 모퉁이
    옛 기억이 불씨로 박혀 있다

     

    자꾸만 뜨거워지는 열기
    벗어나려 할수록 허물어지던 날
    몸을 털어 불길 밀어내면서
    더 굳어지던 몸피

     

    뼛속 깊이 숨겨 두었던
    검은 파도소리 토해낸다, 한 번 데인
    마음은 더 이상 금가지 않는다고
    누가 그러던가
    붉은 꽃 필수록 바닷속 일렁거리는 기억
    핏빛 불꽃으로 타오른다

     

     

    / 정수경

     

    가구 배치 바꾸느라 장롱을 옮겼다
    한쪽 발 꽉 물고 놓지 않는 십 원짜리 동전
    장판에 새긴 제 기억


    물고 있던 이빨 헐거워질 때마다
    발꿈치 치켜들고 버텨온 시간
    장롱의 무게보다 불빛 없는 방안
    캄캄한 무게가 더 무거웠다

     
    밤마다 틈이 벌어지는 소리 들렸다
    속 헤집고 그림자만 있는 아이들이 들어가고
    침대 중앙으로 흐르는 냉기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갔다

     
    산부인과 출입문 여닫는 횟수만큼
    벌어진 틈 메워졌다
    삐걱거릴 기미 보이면 발꿈치 더 높이 들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처방전으로
    이식된 뿌리
    발 뻗느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장롱을 떠받치는 동전의 힘줄 단단해지고 있었다

     


    딸꾹질 / 정수경

     

    어머니가 택배로 뽕잎을 보내주셨다
    말린 뽕잎 물에 불려 알싸한 기억 우려낸다


    가시랭이 일어 피 묻은 손가락으로 몇 번씩
    묶어 보낸 얼룩진 뽕잎 봉지
    누에고치 실 풀듯 푼다
    뽕잎에서 사각사각 빗소리 들린다


    나와 다섯째는 뽕잎이 모자라
    어머니를 갉아먹고 섶으로 오르던
    먹성 좋은 누에였다 뽕잎에 묻어온
    허기진 시간들 지우던 어머니
    의 뭉개진 지문이 명치에 걸린다


    파랗게 놀란 횡경막 경련을 일으킨다
    딸꾹, 어머니
    깎지 않아도 짧기만 한 손톱의 내력 딸꾹
    밥줄 가는 곳마다 사방
    딸꾹 딸꾹, 가래톳 같은 멍울이 선다

     

     

    정수경 (본명 정영숙)

    1960년 경북 문경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

    '비유와 상징' 동인

     

    15회 동양일보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 - 휠체어 달리기 / 김봉래

     

    휠체어 달리기 / 김봉래

     

    신체의 일부가 되기 전에는 단지 고철에 불과 했지만
    운명처럼 필요와 용도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 쇠붙이,

    어쩌면 저 두 개의 바퀴는 생전에 불도저였었는지도 몰라
    그저 보행 보조기로서의 역할만 담당하기에는
    넘쳐나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어
    저렇게 속도를 즐기고 있으니까 말이야

    강력하게 추진하는 좌우의 은빛 휠 위로
    터질듯 솟아오른 이두박근이 태양을 향해 꿈틀 거리고
    질주하는 전차의 엔진은 무리한 펌프질에 목이 타지만
    이 정도의 트랙은 사막도 아니지

    치기어린 한 때, 경계 지은 하얀 선을 무심히 넘나들다
    과속트럭에게 두 다리를 모두 주고난 후에도
    규칙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질서였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을 허비 해야만 했어.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져 코너를 돌다
    다시 힘차게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바퀴들에게
    생의 고비가 직선의 레인 일 수는 없는 거라고 위로해 봤자
    그것은 아주 궁색하고 초라한 구호품 정도인 게야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력을 다하는 나머지 생 앞에
    순위는 그저 순위일 뿐 각 주자의 결승점은 각자에게 있는 것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기록과의 경쟁이지

    신체의 일부가 되어 필요와 용도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운명 같은 저 쇠붙이.

     

     

    [당선 소감]

     

    시를 통해 희망을태우는 작은 촛불이 되길

     

    전혀 기뻐할 상황이 아닌 경황 중에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몇 번의 딸꾹질이 불규칙하게 일어나더니 다시 잠잠해 졌다. 나에게는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다. 기쁨의 정도가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이와 같은 증세가 어김없이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꼭 일 년 만에 전화를 받은 셈이다. 작년 이 맘 때쯤에도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전화기를 그야말로 이십사 시간 휴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슴 졸이던 결과는 심사평에 겨우 이름 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 날 바로 재수를 결심했다. 돌이켜 보니 포기하지 않은 그 때의 결심이 결실을 맺게 한 것 같다.

    대학시절, 처음 습작을 시작할 때부터 문학의 사회 참여는 사회제도의 개선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조명이어야 한다라고 줄곧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어둡고 그늘진 곳에 시선을 두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대우 받지 못하는 시작에 대한 나름대로의 당당한 명분이었다.

    이제 그 명분에, 특히 좋아하는 용어인 그 당당함에 명실상부한 자격을 부여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좀 더 적극성을 가지리라 다짐하며 미약하나마 나를 태우는 작은 촛불이 되고자 한다. 이마저도 안 된다면 촛불의 길잡이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를 읽음으로서 조금이라도 희망의 불씨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시를 쓰는 사람이고 싶다.

    이룬 것 없이 한 해를 누이던 중 이토록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심사위원께 감사의 큰 절로 새해 인사를 대신한다.

     

     

    [심사평]

     

    두다리를 잃고 난 다음 세상을 바라보는 눈 이채

     

    지난해의 응모작(453편) 보다 금년에는 응모작(623편)이 많고 예년에 비하여 수준작들이 보다 많은 반면 상투적이고 유행성 짙은 작품이 줄어든 점은 이를 극복하려는 시대정신의 발로라고 하겠다.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루었던 작품 중에서 최종심까지 남은 작품으로는 윤이산의 ‘으음, 고등어’와 이월란의 ‘수선집 여자’그리고 김봉래의 ‘휠체어 달리기’란 작품이다.

    윤이산의 ‘으음, 고등어’란 작품은 고등어를 통하여 삶의 시점에서 가족의 의미를 복원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평이한 일상어로 언어의 조직이 처져있다. 이월란의 ‘수선집 여자’에서 바세도우씨병에 걸린 수선소집 여자의 삶을 오밀조밀하게 내보이고 있다. 할 말을 다해야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절제에 유념하기를 바란다.

    당선작으로 뽑힌 김봉래의 ‘휠체어 달리기’란 시는 치기어린 한 때 경계 지은 햐얀 선을 무심히 넘나들다 두 다리를 잃고 난 다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이채롭다. 신체의 일부가 되기 전에는 단지 고철에 불과 했지만/운명처럼 필요와 용도가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 쇠붙이. // 강력하게 추진하는 좌우의 은빛 휠 위로/ 터질듯 솟아오른 이두박근이 태양을 향해 꿈틀 거리고 그 때 보았던 세상을 감지하는 또 하나의 눈을 갖고 있다.

    쇠붙이에 불과했던 휠 위로 질주하는 발이 되었음 그 자체가 삶을 일깨워 냄이다. 자기 언어로 엮어내는 능력을 보았다. 휠체어가 신체의 일부가 되어 없어서는 안 될 운명 같은 쇠붙이로 일깨워 내고 있다. 앞으로 사물을 다룸에 있어 ‘시는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초월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기 바란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계속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정 연 덕(시인)

     

    제 8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 각목외 / 백상웅

     

    [제 8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각목 / 백상웅

     


     광목으로 옷을 만들어 시집을 왔다는
     어머니의 말, 각목으로 알아듣고는
     나는 옹이가 빠져 구멍이 난 저고리를
     생각했다, 그땐 각목이 귀했을지도 몰라
     옆집 창고에서 빌려왔을지도 몰라
     각목을 절구에 찧어서 질긴 실을 뽑아냈을지도
     몰라, 생각하면서 나무 속을 기어다니는
     딱딱하고 팍팍한 누에 한마리를 떠올렸다
     각목을 광목으로 바로 알게 된 후에도
     나는 누에게 각목 속에 터널을 뚫는다고
     믿었다, 다리 부러진 의자가 되면서도
     젖은 밭이랑에 박혀 서서히 삭아가면서도
     때리는 놈의 손아귀에 붙잡혀서도
     널따란 천을 짜고 싶어할 각목을 떠올렸다
     어머니 같으면서도 때론 아버지 같은
     각목에 녹슨 못을 박아 바지랑대를 만든다
     물레를 돌리다가 두꺼운 주름을 쿵쿵 접을
     누에, 각목을 길게 뻗어 빨랫줄을 치켜올렸다
     지금 각목은 광목처럼 펄럭이고 싶은 것일까
     말라서 주름진, 이제 쉽게 부러질 것 같은
     각목, 나는 각목으로 광목같이 펼쳐진
     눈 내린 들판을 후려칠 수 있을까

     

     


     백년 동안의 소풍

     


     백년 전엔 없던 물렁한 언덕이었어
     나무들이 천막을 치니 꽃그늘이 통째로 빨래하러 가는 거야
     눈곱 떼던 복숭아 꽃망울도 저수지 쪽으로 기어가던 참이야

     

     벌떼가 꽃송아리를 하늘에 꽁꽁 꿰매어놓아도 꽃잎이 세상에 분홍주름을 자꾸 만드니까,
     흑염소떼가 뿔을 세우고 쇳소리 내며 몰려왔어

     

     백년 만에 봉봉세탁공장 천막이 세워졌어
     안과 밖이 헷갈리는 투명한 벽을 드나드는 염소떼,
     국적은 다르지만 얼굴이 닮은 그늘이야
     돗자리 위에 앉아 까맣게 수런대고 있어
     소풍 와서 수면을 다림질하고 있는 거야

     

     붓 같은 수염들의 웃음은 볕에 잘 익은 청동빚깔,
     삼겹살을 굽다가 서툰 젓가락질처럼 웃는 거야
     물에 뜬 능선을 따라 자맥질하는 물오리같이 입을 벌리데
     천막 아래선 복숭아나무와 여권 없는 어린 뿔이 알음알음 말을 놓는 거야
     쨍쨍한 놋쇠근육들도 나무들과 말을 트고 맨발이 되는 거야
     하늘의 얼룩을 불법으로 지우던 흑염소떼,
     주름진 하늘의 귀퉁이를 펼쳐 언덕에 널어놓았어

     

     펄럭이는 것은 때가 빠진 언덕이야
     살갗 부딪치는 소리가 저수지에 물결을 일으키데
     왜 거뭇거뭇한 사랑은 방울 흔들며 언덕을 넘지 못하지?
     나무껍질 같은 얼굴에 꽃잎이 내려앉아 흑염소떼의 나라는 백년 동안 찾을 길이 없어
     강철손이 보송보송 말라가는 하늘을 주무르고 있는 언덕이야

     

     

     

     

     거인을 보았습니다

     


     방 한칸의 옆구리를 터서 또다른 방을 만든 집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양철지붕을 밟고 다니는 수상한 거인이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도 발자국을 본 적 없지만, 그는 지붕에 엉덩이를 대고 한참 쉬었다 가면서 처마 끝 고드름을 뜯어가곤 하였으니까요. 해가 저물면 가로등마다 성냥불을 그어대던 놈도 거인이었습니다. 저는 소란스러운 불빛 때문에 귀가 불편해서 잠들지 못했습니다. 방은 외로운 기타 같았기에 저는 두칸의 방에서 하루씩 번갈아 묵었습니다. 방이 쓸쓸해지면 목소리가 금방 상할까 봐 걱정했던 까닭입니다. 멀리서 열차소리가 들리면 거인은 귀를 막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휘파람소리는 제 심장 속에 서늘한 골짜기를 팠습니다. 거인은 분명 엉덩이가 매우 무거운 놈일 거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동네의 담벼락은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고, 대들보가 뽑혀갔으며, 지붕이 움푹 내려앉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인은 하릴없이 태양을 잡아당겨 어둠을 길어지게 하고, 태양에 얼음을 용접해서 눈발을 자주 마을로 불러들였습니다. 눈송이가 날리면 팽팽한 전깃줄을 튕기며 배고픈 새떼를 쫓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거인은 구름을 뒤집어쓰고 어떤 날은 적막한 통장을 들여다보고는 창문에 성에를 가득 채워놓고 갔습니다. 아마도 하늘 가장자리에 묻어둔 쌀독이 텅 비어버린 날이었겠지요. 폭설이었습니다. 거인도 잠을 뒤척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려 이를 쑤실 때, 이미 하늘은 텅 비고 먹구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거인은 천장을 두드리고 처마를 움켜잡고 지붕을 열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두려워서 함박눈처럼 울었습니다. 지붕과 지붕을 잘못 겹쳐 올렸는지, 날이 풀리기도 전에 천장에서 거인의 녹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검은 벌레들이 방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젖은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거인은 곰팡이 핀 벽에다 제 그림자를 걸어두고 또 어디에서 저의 낡은 기타소리를 뜯어먹고 있을까요?

     

     

     

     

     매화민박의 평상

     


     네모난 짐승이 매화나무 그늘을 등에 업고 기어간다
     부러진 한쪽 다리를 벽돌로 괴고도 절뚝이지 않는다
     발바닥이 젖어 곰팡이가 피었는데 박박 긁지 않고
     마당에 네개의 발자국을 천천히 찍고 있다
     나도 짐승의 널따란 등에 그늘보다 무겁게 엎드린다
     짐승은 매화나무 그늘을 담벼락 쪽으로 밀어낸다
     틀림없이 한곳에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지 못해
     나처럼 숲속에서 도망쳐 매화민박에 묵었을 짐승,
     평상이 되는 줄도 모르고 납작 엎드려 단잠에 들었다
     등허리에 문신처럼 박힌 나이테가 성장을 멈춘 것은
     놀러온, 도망친, 연애하는, 슬픈, 엉덩이 때문은 아니다
     숲을 떠난 나무가 뿌리를 찾기 위해 남겨놓은 증거이다
     네모난 짐승이 햇볕을 향해 남몰래 발자국을 뗀다
     네모난 황소 같은 평상이, 평상이 될 것만 같은 나를
     단단히 엎고 숲속으로 돌아갈 것 같은 매화민박이다

     

     

     

     

     오동나무 아파트

     


     우리가 세든 이 아파트는 공교롭게도 계단이 없지만 옥상은 딱딱한 하늘과 이어져 있단다

     

     이 동네에 정착한 주민들이 처음 한 일은 베란다 가득 꽃밭을 가꾸는 일
     채송화가 자작자작 걸음을 뗐고 해바라기와 능소화가 한줄기에서 피어났지
     넝쿨이 치렁치렁 아래층 창문을 가리기도 하는 우리의 아파트는 한때 몇그루의 오동나무였거든

     

     우리가 건너 동에 걸린 얼굴만 넌지시 바라보는 건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시간의 전부였기 때문
     느닷없이 등을 돌려 떠나버리는 이들이 없었기에 주민들의 눈두덩은 젖을 일이 없지
     나이테가 박혀 있는 단칸방에선 둥근 뼈가 항아리를 빚어 오동나무 숲에 걸어두었어
     항아리가 식은 달처럼 둥둥 떠서 동강난 세상을 밝히면 우리는 꽃잎을 갉아먹다가 들킨 벌레 같았단다

     

     오동나무 아파트가 층을 높여가자, 항아리의 배는 고치처럼 볼록하게 불러갔어
     주민들은 뚜껑을 섣불리 열어보려 하지 않았거든
     뼈가 익어가는 계절이 다가오면 아파트에 젖은 날개들이 기어다니고 꽃밭엔 더듬이가 앉아 있을 테니까
     누구나 화로 속에 누워 꿈을 꾸다가 뜨거운 항아리를 안고 아파트에 올라와야 했단다

     

     

     

    ▷ 심사위원
    김수이(문학평론가), 문태준ㆍ박형준(이상 시인)

     


    ▷ 심사평


    「각목」 외 4편을 응모한 백상웅의 시편들은 자연 서정의 세계를 독특하고도 빼어나게 그려낸다. 순수 우리말의 음색과 빛깔을 잘 살린 그의 서정시들은 인간 세계의 갈등과 상처를 식물적인 상상력으로 봉합하고 치유한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이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고 순연(純然)한 상상력이 여전히 자생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이 신예의 귀한 등장을 크게 반겨 축하한다.

     

     

    2008 서정시학 신인상 당선작 - 고스트, 고스트외 / 배옥주

     

     

    2008 서정시학 신인상 당선작

     

            

    고스트, 고스트 / 배옥주 

     

    짙은 구름 위로 죽은 자들의 말이 떠오른다

    열아홉에 자살한 언니는 할머니가 되었고

    치매로 떠난 할머니는 어린애가 되어 칭얼거린다

    산모롱이를 휘감는 안개비에

    나 밖을 떠다니는 내 뒷모습이 녹아내린다

     

    낯선 새들이 자귀나무를 쪼아댄다

    분홍화관을 접은 가지들이 웅성거리고

    내 눈에서 흰 개미들이 기어나온다

     

    한 차례 구름 떼가 쏟아지고

    백 년 동안 외로웠던 나무들이 날아오르자

    더 늙어버린 언니가 달려온다

    잦은 오한에도 천사의 날개 따윈 기대하지 않는다

     

    없는 다리에 재빨리 신을 신기는 순간

    배고픈 할머니가 나를 쪼아 먹는다

    하얀 시트 위로 눌린 가위들이 흩어진다

     

    자귀나무 그늘 아래 실종된 아이들이 수건돌리기를 한다

    팔이 잘린 아이와 손을 잡고

    내 몸을 빌려 입은 할머니와 혼곤한 오후를 논다 

    입구가 통로이며 출구인 내 눈동자의

    구름 속에서 나는,

    등 뒤에 떨어진 흰 손수건을 더듬는다                                                                                                                    

     

    달맞이꽃

     

    엄마가 돌을 던져요

    돌팔매질은 번번이 내 슬픔을 비켜가요

    포플린 치마 속으로 강물이 흘러가고

    따라오지 마!

    갈라터진 손등 같은 엄마 목소리가

    어린 노을의 귓바퀴를 흔들어요

    엄마는 저 둥근 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머뭇거리는 울음이 길바닥에서 자꾸 넘어져요

    눈물에선 왜 강물 냄새가 나는 걸까

    굳어버린 내 발등 위로 기적소리가 달아나요

    쉰 목구멍은 기차를 삼킨 터널마냥 아득해져요

    골목어귀 흩어진 돌멩이들의 반짝이는

    그 별을 툭툭 걷어차며 나는 집으로 돌아와요

     

    아버지는 술병처럼 마루에 엎어져있어요

    거친 잠꼬대에 파르르 떨리는 사금파리들이

    꽃잎처럼 피어나요 나는

    불빛 아래 흩어진 아버지를 닦아내요

    무릎에 가슴에 몽우리가 맺혀요

    고개 숙인 달빛이

    담벼락에 암각화를 새길 때

    한 무더기의 바람이 강둑을 흔들어요

    나는 쇠비름처럼 돋아나는 엄마를 죽여요

    달의 언덕은 노란 피를 흘리고

    수만 송이 마른 내가 태어나요

                                                                 

    구름을 수리하다    

     


    도무지 안 읽혀요, 꼭 복원해야 합니까?

    해부하던 구름을 심드렁하게 밀치는 Y씨

     

    자꾸 다운되던 아버지의 징후가 왠지 불안했어요

    눈가 주름이 파르르 떨리곤 할 때

    백업하지 않은 건 제 불찰

    햇무리아버지 새털아버지 안개아버지

    새 폴더마다 그려진 꿈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떠다닐 거라 믿었죠

     

    머리 위에서 운석이 충돌했나?

    마른번개 번득이는 날

    프로그램 깨진 아버지의 동공을 뒤적이지만

    먹통구름에 매달린 산소호흡기 떼어내기 전까지

    하드의 기억은 압화처럼 생생할 거라 생각했죠

     

    빗나간 일기예보의 파일 경로를 추적하는 구름수리공 Y씨

    천둥소린 공허해!

    중얼중얼, 감염된 데이터를 해체하네요

     

    복제 개 스너피의 새끼처럼

    사학자들이 발굴한 왕의 자서전처럼

    재생하고 싶어요 *한 줄기

    빛의 입맞춤으로 하늘의 꽃이 될 수도 있을 저 구름을

     

    구름의 장기를 이식한 하늘에서

    진화한 추억이 우박처럼 쏟아져요

     

    *타고르: 먹구름은 한 줄기 빛의 입맞춤으로 하늘의 꽃이 된다네

     

    사바나에서 블랙커피를

                              

    카페 사바나에 앉아 

    가젤의 눈빛을 읽는다 수사자가 되어 

    툭툭 바람의 발자국을 털어낸다

      

    바위비단뱀의 혓바닥 같은 

    찻잔 위로 검은 유목민들이 떠다니고

    소용돌이로 끓어오르는 암갈색 눈알들

    야자나무 그늘이 내려오는 창가로

    말굽 먼지를 일으키며 지평선이 달려온다

      

    성인식을 치른 힘바족 처녀들이

    내 두 개의 덧니 사이로 걸어 나오고

    유두 같은,

    검은 향기를 혀끝으로 음미한다

     

    폭풍우 지나간 손바닥 위에

    블루마운틴 한 잔을 올려놓으면

    대륙의 어디쯤에서 깃털의 영혼이 나부끼고

    아라비카 전생의 내가 보인다 하얀 손바닥과

    희디흰 눈자위를 가진 처녀가

    유르트 같은 찻잔 속에서 어른거린다

     

    이제 막 흑해의 붉은 달이 떠올랐다

     

    미네르바 2008 겨울호 신인상 작품공모 당선작 / 정푸른, 지하선

     

    [정푸른]

     

    리모델링 외 2편

     

    내 몸에 니스를 칠해요

    상처에 휘발성 알데히드가 스며들면

    쓰리고 아파요 어차피 마데카솔을 바른다고

    낫는 것도 아니 잖아요 썩어가는 건

    방부제 같은 니스로 딱지를 앉히는 거죠

     

    유성 페인트는 칠하지 않을래요 덧난 피부위에

    화사한 핑크슬립을 걸치고 있으면

    토할지도 모르잖아요 패이고 짓무른

    물밑으로 나의 곁을 들여다 보며 건디는 게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죠

     

    당분간은 비 와도 걱정 없어요

    싸구려 니스라도 방수가 되니까요

    진한 립스틱으로 창을 뻥 내겠어요

    벽이었던 그곳에 둥근 숨통을 트는 거죠 언젠가'

    푸른 이파리가 자라서 나올지도 모르죠

     

    아마 헷갈릴 거예요, 우는건지 웃는건지

    뻣뻣하게 굳어서 번질거리는 얼굴이

    나의 문패가 될테니까요

    그래도 아직 나는 보일러도 돌지 않는 냉골이에요

    당신이 내 아랫목을 더듬는건 싫어요

     

     

    향비파 표주박

     

     그대의 소릴 담고 싶은 소리의 빈 방  같다

    깊이 파인 아무도 발 들여 놓은적  없는 유적지

    메마른 입술이다

     

    이름 알 수 없는 신라 장정의 근육들

    박물관 진열장에 신화 처럼 일어섰다 가라앉는 음이 되어

    울림통에 잠들어 있다

     

    그대의 힘줄에 오래된 먼지들이 가늘게 떨린다

    옷고름이 하나 둘 풀리는 듯하다

    볼록하게 부푼 몸위로 짧지 않은 대나무 술대*가

    비단 그림자에 맞춰 연신 내려치고, 올려 뜯고

    색다른 음계 헤쳐 들어 간다 관능이다

     

    그대의 연주에 각기 다른 음색으로 올라온 낮은 신음들

    오무라졌다 펼쳐지는 잘게 그어진 현들이 일순간 떨리면서

    소리의 향연들 진열대에 울린다

     

    나는 한 껏 젖어있다

    빈 방에 색다른 음색이 환청으로 와 닿아  내 입술,

    돋은 입술은,

     

    *향비파를 연주할 때 줄을 퉁기는 막대

     

     

    RUSSi

     

    느끼한 숲, 어디에도 잎의 내음은 사라지고 없지요

     

    싱그러움이 넘치는 곳이 한때 나으 거처였지만

    후다닥 떨어진 우박처럼 잎을 흔들고 간

    시ㅐㅇ으이 허름한 뒷골목에서

    팬티를 내리듯 머금고 있던 푸르름을 벗어버렸지요

     

    스타킹 올이 나이테 처럼 풀릴 때면 가끔

    나으 태생, 숲을 떠올리곤 하지만 물기 마른 웃음으로

    이내 활짝 발자국 소릴 기다리지요

     

    아, 이제 구역질도 말라버렸어요 빗방울 소리 어이 없나요

    눈가에 구겨진 올이 늘어날수록 고사목의 껍질을 앎아가는

    나는 RUSSi

    758-6969

     

    전화벨 소리에 나의 잎은 바스락거리지요

     

     

     

    [수상 소감]

     

     항아리는 늘 숨쉬고  있었습니다

     

    장독대에 앉은 고추잠자리의 한 철 무게를 느끼며, 그렇게 안으로 그늘을 재우고 있었습니다

    항아리의 뚜껑이 열리던 날, 오래 묵은 그늘은 차마 눈뜨지 못했습니다. 비스듬히 열린 뚜껑

    사이로 비춰오는 햇살이 눈부셔 깜빡이다 겨우 실눈을 떴습니다 . 거친 호흡을 기꺼이 삭여주던

    질그릇 안에서 맑게 숙성된 언어의 맛을 찾기위해 가라앉혔지만 여전히 탁하고 어둡습니다.

    햇살이 어둠을 뚫고 저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소금기 가득한 내 안을 가만히 익혀 줍니다.

    아직 설익은 맛이지만 내 안에 있는 떫은 맛, 신맛, 짠맛  다 우려내고 푹 익혀 지고 나면 맑은

    시의 맛이 나겠지요.

    덜 익은 제 詩의 하얀 꽃가지 걷어주시고 손가락 끝으로 맛보시며 고개 끄덕여 주신 심사 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하선]

     

     

    미스터리 셋팅(Mystery Setting)* 외2편

     

     

    한 송이 꽃을 피워내는

    그녀의 生은 완벽하지요

     

    그녀의 옆구리로 흐르는

    혈관을 열고 붉은 씨앗을 심었어요

    핏빛 엽맥 葉脈을 딛고 아메바로 꿈틀대던

    세포에서 잎이 피었어요

    흔들바람이 찌근거릴 때 마다

    온 몸으로 부등켜 안으며

    삶의 나사를 바짝 조이곤 했어요

    뜨거운 피톨 끝에

    꽃잎이 곡선으로 열리고, 꽃술은 등燈을 달고

    소리를 냈어요

    퐁퐁

    터지는 꽃들이 부시네요

     

    그녀의 향취를 쟁여둔

    입체의 또다른 생이

    여려 연년 連年잇대어져

    숨쉬고 있어요

     

     *     미스터리 세팅(Mystery Setting): 보석 세공기법의 하나로

    쥬얼리의 표면에서 보았을 때 원석을 지지해 주는 금속의 발 물림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세팅하여 원석 본연의 광채와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키는 최고난이도의 셋팅 기술이다
    쥬얼리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술작품으로 높이 평가 되고 있슴

     

     부엌문

    '덜컹 덜컹'

    바람이 그녀의 生을 가로지르며

    마구 흔들어 대고 있다

     

    미처 잠그지 못한 그녀,

    오랫동안 묶여 있던 것들

    차츰 헐거워 진다

    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관절은 뻐걱거리고

    세월의 틈을 이어주지 못하는

    척추도 어느새 툭 불그러진다

     

    참을 수 없는 시간들이

    연하디 연한 가슴을 밀고

    밖을 향한다

    겹겹이 찌든 삶의 냄새를

    한 꺼풀씩  내보내기 위해,

     

    날로 앙상해지는 그림자

    둘둘 말아 놓는다

     

    해운대에서 

     

     어둠은 하늘과 바다를 다 지웠다

    검은 캔버스 한 장만 남았다

    검푸른 붓을 거머쥔 파도,

    백색의 그림을 그린다

    등대불빛 한 점씩 끌어올려

    안으로 번지는 먹물 닦아내고

    뱃고동 소리 한쪽 모서리에 세워진다

    흔들리는 모텔

    비틀거리는 만취 객

    중심 잃은 시간들이 구도를 잡는다

     

     

    철썩 처르르

    낙점을 찍던 파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캔버스를 당기더니

    흔들리는 그림, 지우고 그리고

    지웠다간 다시 그리고

     

     허공을 담은 어둠만 지워지지 않고 서있다

     

     

    [수상 소감]

     

    새하얀 뭉게구름이 금빛 저녁놀을 끌어 안고

    창공으로 서서히 차오르고 있다

    잡힐 듯 하면서도 노을 끝에서 맴돌기만 했던

    사랑이 꿈처럼 다가와 내 품에 안겼다

    힘겹게 얻은 내 마지막 사랑,

    무엇보다 먼저 이 사랑의 기쁨과 영광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 드리면서, 앞으로

    사랑하는 기술을 힘껏 익혀서 더 익숙한 솜씨로

    늘 푸른 마음으로 행복한 열애에 빠지고 싶다

     

    언어의 서툰 마술사인 내게 이미지 정상을 향한 오름길에

    칭찬과 격려의 손으로 이끌어주시는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에밀리 디킨스의 말처럼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을 수 있는.... 그리고 누군가의 절망 위에 한줌의 빛을

    덧바르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시인이라는 이름의 첫걸음에 박수 쳐준 가족들, 문우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본심평 시부문]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쓰는 시

     

    본선에 올라온 신인 후보는 6사람이다. 그중 정푸른의 <리모델링> 외2편과

    지하선의 <미스터리 셋팅>외 2편을 당선작으로 올린다.

    당선작들은 어깨에 크게 힘이 들어가지 않은, 비교적 투명하고 비교적 체험의

    변방 가까이에 놓이는 것들이다.

     

    정푸른은 <리모델링>과 <Russi>에서 상처받은 현대인의 아픔을 지나친 의식의

    외도로 가지 않고 구도의 단순성과 집중도로써 형상화해 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리모델링>은 집에 대한 리모델링이면서 화자의 리모델링으로 나아간다.

    니스를 칠하는 리모델링은 지극히 자조적이다. 그 자조가 스스로의 내면을 드러내는,

    지극히 솔직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고삐를 놓지 않고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지하선은 <미스터리 셋팅>과 <부엌문>에서 각각 시적 제재를 그녀라 부르고 화자와 오버랩시키는 기법을 보여준다.

    <미스터리 셋팅>은 쥬얼리(장신구) 셋팅의 기법을 드러내는 것인데 피가 흐르는 생명체에 닿아 있는 것으로서의

    탈기법까지 가는 것에 대한 이해이다. 현대는 모두가 비생명, 비진실이라는 것인데 텃치가 그런 증세를 보기 좋게

    극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미당이 '시적 자인의 퍼센티쥐'라 한 바 있는데 지하선은 이 작품 밖에서도 그 퍼센티쥐가

    높은 시, 말하자면 그가 체험해 놓은 것에서의 이미지 또는 정서라는 데에 충실하고 있는 시를 보여주고 있어  든든하다.

    선에서 제외된 배옥주나 김진기, 정광주, 황은화의 시들도 각기 개성을 잘 드러내는 가편들을 보여준다.

    배옥주의 투명한 이미지 전개,김진기의 앞뒤 구성력, 정광주의 언어의 숙련도, 황은화의 내면의 탐색 등이 그것이다.

    응모자들은 전반적으로 오늘의 현대시가 가는 주류에 편입되는 시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 시에서 빠진 부분들이 무엇인가, 스스로의 값이 어디에 놓이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한 번쯤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강 희 근,  노 향 림

     

    2008 현대시문학 가을호 신인상 수상작품 - 흔들리는 외등외 / 신긍옥

     

    흔들리는 외등 / 신긍옥

     

     

    하루살이가 불빛을 향해 달려든다

    사람들,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집요함에 지쳐

    해질 무렵 외등 하나 켜져 있는

    유리창 너머 검푸른 세상을 바라본다

    한길을 되짚어 내려앉은 자리

    어둡고 탁한 벽에 기대어

    흔들리는 외등 아래 별 하나 그려보니

    쓸쓸하다, 쓸쓸하여 가만히 귀를 모으고

    불빛에 투신하는 하루살이를 듣는다

    하루에 온몸을 바치면서 살자

    바깥세상을 기웃거리며 애타지 말라고

    내 안의 작은 등불

    꺼지지 않도록 지켜 가라고

    생이 주는 흔적 그렁그렁 아물게 하여

    한 자루 촛불이 되라고,

    마을 너머 초승달이 외등처럼 웃고 있다.

     

     

     

    풀섶으로 타는 당신 / 신긍옥

     

     

    누군가 성냥을 그었나 보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풀섶이

    울음소리를 내지른다

    당신의 울부짖음은 목마르고 뜨겁다

    논두렁이거나 그늘진 담장 아래

    발길에 차이고

    낫질에 베어 쓰러지며

    서리를 맞아 엎어져 사는

    마른 풀섶이여!

    풀섶처럼 절뚝거리는 당신이여

    풀섶을 태우고 겨울이 가면

    그을린 나무 둥치 아래서

    꺼지지 않는 씨앗 한 톨로

    다시

    봄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풀잎이리라.

     

     

     

    강낭콩 / 신긍옥

     

     

    하필 이 우기에 몸을 붉혀서

    남의 집 거실에 누운 강낭콩

    길고 지루한 습기

    빗소리마저 더운 긴 여름날에

    내 안을 기웃거리는

    저 여름 풋콩의 방자함

    무릇 여린 것들은

    상처에 급급하여

    죽을 힘 다해 태양을 따르거늘

    껍데기와 알맹이가 뒤엉켜

    내게로 오는 강낭콩은

    나를 고게 숙이게 하고,

    너의 입술은 뒤틀려 있다.

     

     

     

    용담마을 / 신긍옥

    -상허 선생을 추모하며!

     

     

    한 주먹 바람조차 숨을 죽이고 엎드리는

    용담마을로 당신은 오시는지요

    금강석같이 빛나는 문장은

    분단의 소용돌이에 묻히고

    걸어가신 길마저 버려진 용담

    당신의 그리운 마을로

    별이 되어 오시는지요

    당신은 여전히 이방인

    녹슬어 부러진 철길 위에서

    눈물 흘리는 당신의 마을

    용담에 달이 밝습니다

    표지목 하나 세워놓고

    느티나무 한그루 자라는 당신의 집터

    바람이 우수수 지나갑니다

    나는 빛나는 언어를 묻어버렸습니다

    비 내리는 칠월의 하늘 아래

    고개 숙여 우는 가난한 문인의 인사를 받으며

    당신의 마을로 오시는지요

    바람은 비를 몰아 왔다 가고

    별을 데려 오는 것 같이, 당신은.

     

     

     

    토교 저수지 / 신긍옥

     

     

    겨울비 내리는 오후

    진흙길 헤집으며

    민통선 지나 양지리

    철새를 탐조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토쿄 저수지 둑에 오르니 가슴이 트인다

    물빛 하늘빛 나무숲마저 드리워

    또 하나의 잿빛으로 어두워오는 저녁

    둑을 따라

    한가로이 걸음을 옮기는데

    언뜻 바라보는 오리 몇 마리처럼

    눅눅한 습기와 젖은 생

    어디 풀섶에라도 주저앉아

    담배 한 모금 빨아보면

    내 젖은 생을 태울 수 있을까

    주머니 속 여전히 손가락만 허전하고

    생은 왜 이리도 눅눅한지

    청둥오리 몇 마리

    여전히 물빛을 여미며 떠다니고

    마음은 찬 물빛에 빠져

    하늘빛 섬을 만난다.

     

     

     

    [심사평]

     

     

    여자의 눈물은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망설임이다. 그러나 눈물을 통해 표현하지 못한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시인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고 예술활동을 할 수 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겸허하고 아름답다. 종교적으로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신긍옥 시인의 글속에는 눈물을 형상화하는 소재들이 표출된다. 시, 풀섶으로 타는 당신에서 보면 “누군가 성냥을 그었나 보다/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풀섶이/울음소리를 내지른다//당신의 울부짖음은 목마르고 뜨겁다”를 통해 그녀는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그대를 향한 마음을 눈물이라는 단어로 충분히 표현해 낸다. 눈물은 정직한 떨림인 것이다. 그녀의 시, 용담마을에서도 “당신의 마을로 오시는지요/바람은 비를 몰아왔다 가고/별을 데려 오는 것 같이, 당신은”와 같이 물이라는 것은 신긍옥 시인에게는 노자의 물의 비유처럼 다양하게 활용되고 그 가치를 발한다. 시, 토쿄저수지에서도 눈물의 이미지는 하늘빛으로 전이된다. “주머니 속 여전히 손가락만 허전하고/생은 왜 이리도 눅눅한지/청둥오리 몇 마리/여전히 물빛을 여미며 떠다니고/마음은 찬 물빛에 빠져/하늘빛 섬을 만나다.”로 표현한다. 신긍옥 시인의 시적 표현이 그 철학과 만나 동무가 되는 이러한 현상처럼 그녀의 글들이 주옥처럼 표현되어 나오길 바라며 신인상을 축하한다.

     

    2008 제17회<현대시학>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 월식 외 4편 / 김연아

     

    2008 <현대시학> 제17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작

     

    외 4편 / 김연아


      늦은 저녁 고등어를 다듬는다 냉동실에서 나온 고등어는 싱크대에서 녹는 중이다 사막의 등고선처럼 일렁이는 무늬는 달의 숨결로 새긴 것일까 흐르는 물에 고등어의 잠이 빠져나간다 거실을 담고 있던 텔레비전은 사막을 쏟아놓는다 히잡을 입은 얼굴들을 앞세우고 총구를 든 한 무리의 사내들이 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평선의 소실점이 사라진 곳 사막은 보이지 않는 입으로 자라는 것일까 그림자 하나 숨을 곳이 없다 나는 기다린다 달이 지나간다 달이 지나가는 동안 고등어가 녹는다 고등어는 말이 없다 그 입에 얹힌 소리가 무엇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달은 어떤 소리를 내는 걸까)

      그들이 내 몸을 가져갔어요 제 그림자를 토하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유서를 남기고 사막으로 간 사람들은 왜 돌아올 줄 모를까 화면이 소리 없이 뒷걸음질한다 사막의 전사들은 동굴로 되돌아가고 인질들은 뒷걸음으로 전사를 따라간다 먼지는 땅으로 돌아가고 사막은 걷히고 고등어는 녹아서 도마 위에 놓여 있다 검은 피를 흘리며. 그는 번개나 달의 먼지였을까 흘러온 길 끝에 그의 무덤이 될 내 몸이 있다 사막에서 사막이 된 사람처럼 고등어는 내 몸을 입고 내가 될 것인가 비어있는 눈이 담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심해를 들여다본 그 눈은 달을 삼킨 밤처럼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달은 밤을 벗으며 눈을 뜨는데



    흰긴수염고래 / 김연아


      내가 늙어 눈이 깊어질 때 나는 돌아가리라
      우리가 태양을 묻어버린 곳*, 바다 중의 가장 검은 바다로
      거기엔 세상에서 잊혀진 이름들, 범선과 닻이 녹슬고 있으리라
      저기 고래좌의 별들이 물 속에 잠길 때
      바람은 사향 냄새를 몰고 온다
      그러나 내 속의 쓸개 냄새는 아무도 알지 못하네

      그 일은 어느 금요일에 일어났다
      외눈박이 수염고래 한 마리
      턱 아래 늘어진 푸른 주름을
      모래톱에 내려놓고 밭은 숨을 쉬고 있다
      빛이 사라지는 지평선
      바다를 토해내던 숨구멍으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붉은 나비떼 

      너는 지금까지 선잠으로 물 위를 떠돌아다녔지, 사막의 낙타처럼 햇볕에 혹을 말리며. 토성의 고리였던 시간을 지나 빙하가 우는 산에서 너는 자랐지 몬순의 비가 내리면 달과의 약속을 지키려 떼를 지어 이동하는 크리스마스섬의 붉은 게처럼 여기까지 흘러왔네 안데스의 이회토에 묻혀 있는 네 조상의 뼈, 그 속에 흐르던 낙타의 피. 난바다곤쟁이를 쫓아 남빙양 바다 밑을 잠수하던 뜨거운 숨주머니, 그 허파는 지금 죽음의 잔처럼 독으로 차 있네

      마침내 너는 일흔 살이 되었다
      몸을 관으로 하여 은수자처럼 떠돌려나
      이제 바다거품으로 몸을 헹구고
      해저동굴을 울리던 그 노래는
      마리아나해구의 침묵으로 놓아두어라
      시든 눈으로 황혼이 떨어진다
      태양을 향해 너는 마지막 숨을 거둔다
      기도하는 손처럼 지느러미를
      하늘로 향한 채

    * 만젤쉬땀의 시 제목.



    애먼지벌레의 잠 / 김연아

      그렇다, 너는 해질녘 태어난 어둠의 사생아
      바람을 걸치고 이 지상으로 찾아와
      언제나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어둑한 강기슭, 시든 풀냄새 아래 너는 엎드려 있다 애매미 짤막한 노래가 심장에 타들어 갈 때, 잠결에 마시는 더듬이 끝의 물 냄새, 그 입에서 중얼중얼 흘러나오는 거품, 하루가 그 몸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하루살이처럼, 네 몸은 바람결에 풀리기 시작한다 소나기를 담았던 눈은 다시 비워지고

      민달팽이가 남긴 은빛 길을 따라
      나뭇가지로 몸을 옮긴다
      가지 끝의 길은 팽팽히 조여져 떨고 있다
      한기가 등줄기를 빠르게 지나간다
      생식을 끝낸 먹그림나비가
      땅바닥에 날개를 문대어 제 무늬를 지우듯
      먼 불빛을 향해 너는 날개를 편다
      다리 위에 조등 같은 초승달이 내걸리고
      저 멀리 어느 집 하나
      새벽까지 열려 있는데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 김연아

    눈 내린 자작나무 숲을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나는 윌리엄 블레이크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르고
    내가 안다고 말하는 꼭 그만큼
    정말 알지는 못하고
    지금 내 머리 속에 사는 남자 윌리엄 블레이크

    짐자무시의 흑백필름으로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블레이크를 기억하지 못하는 블레이크
    이미 죽은 남자 윌리엄 블레이크
    더 이상 빛을 방사하지 않는 검은 별을 따라
    시원으로 가는 길을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말이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흐르지 않는 나무도 순례를 하는 걸까
    하늘에서 땅 속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순례
    자작나무 껍질 아래 별의 비밀 같은 어둔 글자들이 돋아나네
    그대는 벌써 하루의 끝에 와 있고
    오늘 나는 어둠 속에 잠겨 있어
    불이 꺼진 재처럼 나는 나를 완전히 잊지는 못하고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잠시
    붉은 길이 인도하는
    마음의 일곱 번째 방향을 생각하지
    우리는 원래 말을 모르는 존재였네
    말은 꽃과 같아 땅에서 떠나면 시들고 말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언어를 가지고
    나는 밤으로 가네
    말을 잊어버린 사람을 찾아

    어둡게 빛나는 그대 눈동자로 길은 자라지만
    길은 언제나 한 발 앞서 멀어져가네
    내가 길이 될 수 있을까
    기억이 복제되는 순간을 어떻게 사라지게 할까
    내 노래를 가지고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꽃으로 덮인 카누에 실려 어스름을 넘어가네
    바다 위에 걸린 하늘 문이 닫히네
    눈꺼풀이 내려오듯 그렇게



    내 말은 월식처럼 어두워졌다 / 김연아 


       아무리 죽음을 공부해도 내 망상은 죽지를 않아, 해질 무렵 지빠귀 울음소리를 따라 집을 나왔다 태양의 한가운데를 쓰윽 뚫고 저 세상 입구로 들어가고 있는 수리산, 앞으로 가고 있었는데 여전히 산허리를 돌고 있었어 그 곳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 안에 있는 것은 밖으로 나올 수 없어 진달래술을 마신 것처럼 숲이 나를 끌고 다니네 처음 걸었던 길들이 멀리 어스름에 묻히고 환하게 솟아오르는 우듬지, 나이도 없이 태어나는 바람이 걸려 있다

      달의 사제처럼 바위 성소에 제물을 바쳐볼까
      내 말이 아홉 번째 하늘에 가닿을 수 있을까
      북을 두드리며 자작나무를 타는 샤먼처럼 
      밤을 기다려 나무 위로 올라간다
      처음 하늘이 열리던 날처럼 내 그림자를 벗고
      나무에게 나무(南無)하도록
      가지 끝에 걸어둔 옷이 허수아비마냥 바람에 나부낀다

      자정의 비밀 집회 같은 숲의 웅얼거림, 쓰러진 고목 위로 지나가는 바람은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낸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나의 비밀을 보았다 그러나 비밀은 뒷걸음으로 사라져간다 쓸개 담긴 밤이 나를 찾아왔다 그 쓸개를 찍어 나는 쓰리라, 화산의 달이여 떠올라라, 강물의 북들이여 깨어나라, 구름은 분화구를 메우고 몇 줄기밖에 떨어지지 않는 비, 검은 밤이 입 속에 쌓인다 내 말은 월식처럼 어두워지고

    (심사위원 : 정진규, 이수익, 오태환)


     


    김연아

     

    함양 출생.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졸업.

     

    제20회 신라문학대상 詩 부문 당선작 - 별빛소리 / 주재규

     

     

     

    제20회 신라문학대상 詩 부문 당선작

     

           별빛소리 / 주재규


    어둠이 줄지어 설 때 알리라

    갈 곳을 몰라 거리에서 붙들린 시간은

    따라 잡는 별빛으로 걸음을 늦춘다는 것을.


    잠자는 갈대의 숨결이 긴 한숨으로 나뒹굴고

    달에 비치는 밤새 소리는 새벽과 같이

    꿈을 줄다리기한다는 것을.


    내가 별빛이 지키고 있는 들녘에 서서

    흐린 눈으로 밤의 향기에 취할 때

    기나긴 꿈이 끝나는 샛길로 걸어온 아침은

    마침내 둥그런 해를 내 뱉지만

    자유로운 새벽 들판에는 밤새 꿈꾸었던 풀 이슬이

    이파리마다 동그랗게 구슬을 꿰고 몸을 굴려서

    저마다 햇살의 입술에 달콤한 빛을 뿌려도

    해는 알몸으로 희생된 이슬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나는 어지러운 바람을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낮은 포복으로 기다린다.

     

    별빛이 풀잎을 타고 구르는 소리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진

    우리의 꿈에 날카로운 촉각을 만들어라.


    예지가 시퍼런 불꽃을 촘촘히 밝혀둔 밤하늘은

    고통의 수렁에서 건져 낸

    내 빛나는 보색에 난 상처를 헹군다.


    별빛이여, 그대는 알리라.


    언젠가 반짝거리며 차가운 창문 틈으로

    내 눈이 환하게 밝아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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