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의 법화경 대강좌

[스크랩] 법화경 대강좌 8강 - 2 (화성유품102 ~ 145 )

시치 2009. 1. 31. 18:51

 

 

             법화경 대강좌 8강 - 2 

 

 

102. 俱白佛言하사대

     구백불언

 

103. 世尊 是諸無量 千萬億 大德聲聞 皆已成就 世尊 亦當爲我等

     세존 시제무량 천만억 대덕성문 개이성취 세존 역당위아등

     說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我等聞已 皆共修學

     설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아등문이 개공수학

세존이시여, 是諸無量 千萬億 大德聲聞이 皆已成就했으니 다 이미 성취했으니 世尊이 또한 우리들을 위하사 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을 설하소서.

그러니까 앞에는 四諦 十二因緣을 설했지요? 그 다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을 설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차원이 좀 은근히 다르다는 내용입니다.

我等이 듣고 나서는 皆共修學하리다. 다 같이 修學할 것입니다.

 

104. 世尊 我等志願 如來知見 深心所念 佛自證知

     세존 아등지원 여래지견 심심소념 불자증지

세존이시여, 我等志願인 우리들의 뜻과 원인 如來知見과 深心所念을 저 깊은 마음속에 우리가 갈구하고 있는 바를 佛自證知하시리라.

부처님이 스스로 다 아실 것 아닙니까? 우리들 마음속에는 如來知見을 갈구하고 있습니다하는 그런 소리를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6왕자의 請法이거든요. 16왕자가 벌써 이런 청법의 如來知見이라는 차원 높은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105. 爾時 轉輪聖王 所將衆中 八萬億人 見 十六王子出家 亦求出家

     이시 전륜성왕 소장중중 팔만억인 견십육왕자출가 역구출가

     王卽聽許(왕즉청허)

그 때에 전륜성왕이 所將衆中에 거느린 온 바의 대중 가운데에 八萬億人이 16왕자가 출가하는 것을 보고는 또한 출가를 구하거늘, 왕이 곧 聽許. 허락했느니라.

 

106. 爾時 彼佛 受 沙彌請 過 二萬劫已 乃於四衆之中

     이시 피불 수 사미청 과 이만겁이 내어사중지중 

     說是大乘經 名 妙法蓮華 敎 菩薩法 佛所護念

     설시대승경 명 묘법연화 교 보살법 불소호렴

그 때에 그 부처님이(대통지승불이지요?) 사미의 청을 받아서 二萬劫을 지나고는 사부대중 가운데서 大乘經을 설하시니, 이름이 妙法蓮華라.

그렇습니다. 敎 菩薩法이며 佛所護念이더라. 그런데 2만겁 이라고 하는 세월동안 뜸 들였어요.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過 二萬劫已코는 이에四衆가운데서 대승경전을 설하시니 묘법연화다. 그리고 敎 菩薩法이며 佛所護念이다. 여러 번 나왔지요?

 

107. 說是經已 十六沙彌 爲 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皆共受持

     설시경이 십육사미 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고 개공수지

     諷誦通利(풍송통리)

說是經已시어늘, 이 경을 설해 마치시고 16왕자가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위한 까닭에 皆共受持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아직 얻었다는 뜻이 아니고, 그것을 위한 까닭에 皆共受持했다. 다 함께 受持했다. 그리고

諷誦通利했다. 通利 = 통달이라는 뜻입니다. 受持라고 하는 것은 외우거나 읽는다고 하는 걸로 봐서 이것은 틀림없이 책으로 된, 종이와 먹으로 된 경전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受持” “수지” 하는 것을 너무 차원 높게 이해할 필요 없이 책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 1차적인 수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지는 그 겁니다. 책가지고 다니는 것이요.

諷誦通利하니라.

 

108. 說 是經時 十六菩薩沙彌 皆悉信受 聲聞衆中 亦有信解

     설 시경시 십육보살사미 개실신수 성문중중 역유신해

     其餘衆生 千萬億種 皆生疑惑(기여중생 천만억종 개생의혹)

이 경을 설하실 때에 十六菩薩沙彌. 벌써 사미 보살이라는 계급이 하나 더 붙었습니다. 나중에는 사미라는 계급장 떼어 버리고, 그냥 바로 보살로 승진을 합니다. 十六菩薩沙彌는 皆悉信受하고, 다 믿고 받아들이고는,

聲聞 가운데서도 亦有信解하나 또한 信解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 나머지 중생의 千萬億種은 皆生疑惑이라. 그 나머지 중생은, 聲聞가운데서도 信解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그 나머지 중생들은 전부 의혹만 일으켰다.

 

  저 앞에서 5000퇴석이라고 해서 아주 희대의 사건이 일어났지요?

5000명이 부처님 설법하는 데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것은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하는 이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그릇이 못 돼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千萬億種은 皆生疑惑이라.

전부 의혹을 냈다고 하는 것도, 그릇이 부족하기 때문에 높은 법. 법화경의 도리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렇다고 이해를 해야 됩니다.

 

109. 佛說是經 於 八千劫 未曾休廢 說此經已 卽入靜室 住於禪定

     불설시경 어 팔천겁 미증휴폐 설차경이 즉입정실 주어선정

     八萬四千劫(팔만사천겁)

부처님이 이 경을 설하기를, 八千劫동안 未曾休廢하시고, 잠깐도 쉬지 않고 이 경을 설해 마치고는 조용한 방에 들어가서 禪定에 머물러서 八萬四千劫을 지냈더라 그랬어요. 이 8만 팔천. 우리 귀에 익숙한 숫자지요?

이것도 다 의미가 있습니다.

 

110. 是時 十六菩薩沙彌 知佛入室 寂然禪定 各陞法座

     시시 십육보살사미 지불입실 적연선정 각승법좌

     亦於八萬四千劫 爲四部衆 廣說分別 妙法華經 一一皆度 

     역어팔만사천겁 위사부중 광설분별 묘법화경 일일개도

六百萬億 那由他 恒河沙等衆生 示敎利喜 令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

육백만억 나유타 항하사등중생 시교리희 영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그 때에 十六菩薩沙彌가 부처님이 淨室에 들어가서 寂然히, 고요히 禪定 듦을 알고는 各陞法座하야 대통지승불은 선정에 들어 버렸고, 그래서 16보살사미가 전부 법좌에 올라가서 또한 八萬四千劫동안 사부대중을 위해서 廣說分別 妙法華經하사 묘법연화경을 설하사 일일이 다 六百萬億 那由他 恒河沙等衆生들을 제도해서, 그러니까 16보살사미가 낱낱이, 한사람, 한사람이 전부 육백만억 나유타 항하사등 중생들을 제도했다. (이 6 이라는 숫자에도 우리가 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지요.) 그 다음에 중요한 말입니다.

 

  示敎利喜했다. 이것이 보여줬다. 가르쳐줬다. 무엇을? 이익 되고 기쁜 일을. 그 입니다. 이익 되고 기쁜 일을 보여주고 가르쳐줬다.

참으로 이익 된 것이 뭐냐? 바로 진리의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기쁜 것이 뭐냐? 진리의 가르침. 그 입니다.

이익 되고 기쁜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서 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느니라.

 

111. 大通智勝佛 過 八萬四千劫已 從 三昧起 往詣法座 安詳而坐

     대통지승불 과 팔만사천겁이 종 삼매기 왕예법좌 안상이좌

     普告大衆(보고대중)

大通智勝佛이 八萬四千劫을 지내고는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法座에 나아가서 安詳而坐하고 普告大衆했다. 安詳. 기억나시지요? 석가모니부처님이 삼매에서 일어날 때, 安詳而起라는 말이 있었지요?(방편품-1)

 

  참 좋은 낱말입니다 安詳. 초심에 우리 처음만난 낱말이 “要須安詳”

執放에 要須安詳하라. 발우 떼 잡고 놓을 때 요컨대 “안상히 하라.” 그랬어요. 이것이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이것이 도저히 우리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됩니다. 겸손하고 아주 자상하고 섬세하고 영점 1미리의 오차도 없는 그런 몸동작. 몸놀림. 그것이 安詳입니다.

 

  서툰 사람들 죽비칠 때 보면 죽비를 두 손으로 높이 받들고는, 연기 하듯이 올리는 것. 그렇게 올리지 않고도 소리가 나게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安詳이 아닙니다. 죽비를 두 손으로 머리까지 받들고는 공경하는 것 같이 하지만 그것이 아마추어들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프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특히 죽비 같은 것은 入禪할 때의 신호 도구이기 때문에 禪의 정신에 맞아야 됩니다 禪의 정신.

 

  禪의 정신은 아주 簡潔해야 됩니다. 동작이 간결하고 素朴해야 됩니다.

그래야 禪의 정신에 맞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脫俗해야 됩니다.

동작 하나에도 俗 때가 줄줄 흐르는 동작이 있고, 아주 탈속한 동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그냥 무심히 해서 그렇지, 손 하나 드는데도 아주 탈속한 모습이 있고, 속기가 덕지덕지 묻은 그런 손드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프로는 그런 것 하나 하나 생각해 가면서 해야 되는 것이지요.

普告大衆하사대

 

112. 是 十六菩薩沙彌 甚爲希有 諸根 通利 智慧明了 已曾供養 無量

     시 십육보살사미 심위희유 제근 통리 지혜명료 이증공양 무량

千萬億數諸佛 於諸佛所 常修梵行 受持佛智 開示衆生 令入其中 汝等

천만억수제불 어제불소 상수범행 수지불지 개시중생 영입기중 여등

皆當 數數親近 而供養之(개당 삭삭친근 이공양지)

 

  이 16보살사미는 甚爲希有다. 諸根이 通利해서 智慧明了하고 (저 앞에서 밝혔지요?) 已曾. 이미 일찍이 無量 千萬億數諸佛에게 공양해서,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항상 梵行을 닦아서 부처님의 지혜를 받아가지며, 중생들을 開示해서 그 가운데(그 가운데 = 佛智) 佛智가운데 들어가게 했으니, 佛智가 중요한 것이지요. 불교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지혜...

 佛智가운데 들어가게 했으니 그대들은 다 마땅히 數數親해서, 자주자주 친견해서 供養할지니라. 그러니까 말하자면 대통지승불이 16보살사미들을 “훌륭한 분이다. 이 분들에게 공양해라.” 라고 대중들에게 親近하고 供養하고 공부하라고 그렇게 권하는 것이지요.

 

113. 所以者何 若 聲聞辟支佛 及諸菩薩 能信是 十六菩薩所說經法

     소이자하 약 성문벽지불 급제보살 능신시 십육보살소설경법

     受持不毁者 是人 皆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如來之慧

     수지불훼자 시인 개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여래지혜

왜 그러냐? 만약에 聲聞 辟支佛과 그리고 모든 보살들이 능히 이 菩薩所說經典. (沙彌라는 칭호가 떨어져 나갔네요.) 十六菩薩이 설한 바 經法을 능히 믿고 수지해서 훼방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마땅히 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如來의 지혜를 얻으리라. 그러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곧 여래의 지혜지요. “그것을 얻으리라.” 그랬습니다. 十六菩薩의 所說經法은 뭐지요?

묘법연화경입니다.

 

114. 佛告諸比丘 是 十六菩薩 常樂說是 妙法蓮華經 一一菩薩 所化

     불고제비구 시 십육보살 상락설시 묘법연화경 일일보살 소화

     六百萬億那由他 恒河沙等衆生 世世所生 與菩薩俱 從其聞法

     육백만억나유타 항하사등중생 세세소생 여보살구 종기문법

     悉皆信解 以此因緣 得値四萬億 諸佛世尊 于今不盡

     실개신해 이차인연 득치사만억 제불세존 우금부진

 

  佛告諸比丘하사대 十六菩薩이 항상 즐겨히 이 妙法蓮華經을 설해서 낱낱 보살이 교화한 바는 六百萬億 那由他 恒河沙等衆生이니라.

世世所生에 菩薩로 더불어 함께해서 그로부터 법을 듣고 모두 다 믿고 이해할세. 이 因緣으로서 四萬億 諸佛世尊을 만나서 지금에까지 다하지 아니했느니라. 이것이 오랜 인연으로 면면이 이렇게 이어 오는 것이지요.

그것을 여기서 다 밝히는 겁니다.

 

115. 諸比丘 我今語汝 彼佛弟子 十六沙彌 今皆得

     제비구 아금어여 피불제자 십육사미 금개득

     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 十方國土 現在說法 有 無量百千萬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어 시방국토 현재설법 유 무량백천만억

     菩薩聲聞 以爲眷屬(보살성문 이위권속 )

 

  여러 비구들이여,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저 부처님의 제자 十六沙彌는(이것은 여러 비구야, 하는 이 법문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입니다. 저 앞에 까지는 중간에 만난 인연들이라면 옛과 지금을 모아서 회통 하는 그런 내용이지요.) 十六沙彌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지금 다 얻어서 十方國土에서 現在說法하사대, 無量百千萬億 菩薩聲聞이 있어서 眷屬이 되어 있다.

 

116. 其二沙彌 東方 作佛 一名 阿閦 在 歡喜國 二名 須彌頂

     기이사미 동방 작불 일명 아촉 재 환희국 이명 수미정

그 중에서 두 사미는 동방에서 부처를 지었으니 이름은 阿閦佛. 歡喜國에 있고, 두 번째 이름은 須彌頂부처님이다. 그랬습니다. 여기는 나라이름은 없네요.

 

117. 東南方二佛 一名 師子音 二名 師子相

     동남방이불 일명 사자음 이명 사자상

東南方에 두 부처님인데 한 분은 師子音이고, 한 분은 師子相이다.

 

118. 南方二佛 一名 虛空住 二名 常滅

     남방이불 일명 허공주 이명 상멸

南方에 두 부처님은 虛空住이고, 常滅이다.

 

119. 西南方二佛 一名 帝相 二名 梵相

     서남방이불 일명 제상 이명 범상

西南方에 두 부처님은 帝相이고, 梵相이다.

 

120. 西方二佛 一名 阿彌陀 二名 度一切世間苦惱

     서방이불 일명 아미타 이명 도일체세간고뇌

西方에 두 부처님은 阿彌陀이고, 度一切世間苦惱라고 하는 부처님이다.

 

121. 西北方二佛 一名 多摩羅跋栴檀香神通 二名 須彌相

     서북방이불 일명 다마라발전단향신통 이명 수미상

西北方에 두 부처님은 多摩羅跋栴檀香神通이고, 두 번째는 須彌相이다.

 

122. 北方二佛 一名 雲自在 二名 雲自在王

     북방이불 일명 운자재 이명 운자재왕

北方에 두 부처님은 雲自在며 雲自在王이다.

 

123. 東北方佛名 壞一切世間怖畏

     동북방불명 괴일체세간포외

東北方에 부처님은 壞一切世間怖畏이며,

 

124. 第十六 我 釋迦牟尼佛 於 娑婆國土 成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제십육 아 석가모니불 어 사바국토 성 아뇩다라삼먁삼보리

第十六은 我 釋迦牟尼佛이다. 그랬어요.

석가모니불로서 娑婆國土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했다.

자신의 족보를 쭉~ 경전에도 이렇게 쭉~ 밝혀 내려왔습니다.

족보 밝히는 이것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속가에서, 예를 들어서 경주 김씨 몇 대손. 다 있잖아요.

족보 책이 다 있고 거기 보면 몇 대손으로 되어 있고 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집안에 누구는 훌륭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이 있었고 다 있잖아요. 그것은 세속의 족보이고, 절에 와서도 족보가 다 있습니다. 족보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꼭 법을 깨달아서 법맥을 이어받는 그런 형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은사의 계통은 은사의 계통대로 다 족보가 있어요. 지금 석가모니부처님이후 가섭을 1대로 쳐 가지고 쭉 내려오면 지금 한 80대를 전후해서 70몇 대거나 80몇 대거나 이렇게 80대를 전후해서까지 지금 우리나라에 내려왔습니다.

 

  비구. 비구니. 사미 할 것 없이 다 은사가 있는 이상은 전부 족보가 다 있습니다. 법을 받았으면 법의 족보가 있고, 은사가 정해져 있으면 은사의 족보가 있고 다 그렇습니다. 이것 중요한 것입니다. 어디든 여러 분야든지 다 있잖아요. 미술이라든지 글씨라든지 하물며 도자기라든지 전부 스승이 있고, 그 스승은 누구에게 배웠고, 그 스승은 누구에게 배웠고, 전부 그것이 다 있잖아요. 그와 같이 이런 것들도 우리가 ‘아이고 그것 뭐 공부만 하면 됐지 공부도 제대로 안 되는데 그까짓 것 족보 챙길 것 뭐 있나?’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챙기고, 공부는 공부대로 하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공부가 덜 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왕의 아들이 아무리 개망나니라 하더라도 왕자입니다.

우리가 수행자로서 아무리 자격이 부족하고, 부처님의 몇 대손이라고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인물이라고 설사 겸손하게 생각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이 시대의 부처님의 그 몇 대 자손으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대로 자리매김하고, 못나면 못난 대로 자리매김하는 겁니다. 역대 王祖 중에서 개망나니 왕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왕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겁니다.

정말 법이 뛰어나고 수행이 뛰어나서 옛날 조사들의 반열에 오르면 좋지요. 그렇지만 그렇지 못하면 못한 대로 몇 대 손임에는 틀림이 없는 겁니다.

 

  또 내보다 더 못하면 못한 대로 내 상좌. 내 제자 몇 대손 이라고 확실하게 짚어주고요. 그거 챙겨야 됩니다. 그런 것을 도표로 그려가지고 법당에 걸어놓고 신도들에게 “나는 부처님의 몇 대손이야. 못났지만 할 수 없다. 나는 인물이 여기까지니까 그래도 어떻해. 내가 중이 됐고 이 절에서. 이 자리에서 부처님 孫 으로서 자리매김은 내가 할 수 밖에 없지 않으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 데에 대해서 우리가 좀 소홀한 감들이 있습니다.

스님들은 그것을 꼭 인식을 좀 달리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125. 諸比丘 我等 爲 沙彌時 各各敎化 無量百千萬億 恒河沙等衆生

     제비구 아등 위 사미시 각각교화 무량백천만억 항하사등중생

從我聞法 爲 阿耨多羅三藐三菩提(종아문법 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여러 비구들이여, 我等이 沙彌가 되었을 때, (아~, 참 재미있지요. 석가모니부처님이 “아~ 내가 어릴 때 사미가 되었을 때” ←이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옛날에 어릴 때 사미가 되었을 때에 各各 無量百千萬億 恒河沙等衆生들을 교화해서 從我聞法하고 나로부터 聞法하고 법을 듣고서 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위했거든,

 

126. 此諸衆生 于今有住聲聞地者 我常敎化 阿耨多羅三藐三菩提

     차제중생 우금유주성문지자 아상교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是諸人等 應以是法 漸入佛道(시제인등 응이시법 점입불도)

이 모든 중생들이 지금 이 순간 聲聞의 지위에 머문 사람들을 我常敎化. 내가 늘 교화를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서 교화하노라.

이 모든 사람들이 응당히 이 법으로서 漸入佛道니라. 점점 불도에 들어간다.

 

127. 所以者何 如來智慧 難信難解

     소이자하 여래지혜 난신난해

所以者何오 如來智慧는 難信難解니라. 왜 점점 불도에 들어가는가?

難信難解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難信難解.

여래의 지혜는 難信難解입니다. 믿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워요.

 

128. 爾時所化 無量恒河沙等衆生者 汝等諸比丘 及我滅度後

     이시소화 무량항하사등중생자 여등제비구 급아멸도후

     未來世中 聲聞弟子 是也(미래세중 성문제자 시야)

그 때에 교화한 바 無量恒河沙等衆生이라고 하는 이들은 汝等諸比丘와 그리고 내가 열반에든 뒤 未來世, 오늘 이 순간, 바로 2008년 8월 4일에 이 자리에서 공부하는 未來世中의 聲聞弟子가 이것이다. 이것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냥이 아니라고요. 我滅度後 未來世中 聲聞弟子가 이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이야기 듣는 사람이니까 성문 소리 듣고, 뭔가 알려고 하는 사람이 聲聞弟子아닙니까?

 

129. 我滅度後 復有弟子 不聞是經 不知不 覺菩薩所行 自於所得功德

     아멸도후 부유제자 불문시경 부지불 각보살소행 자어소득공덕

     生滅度想 當入涅槃(생멸도상 당입열반)

我滅度後에 다시 제자가 있어서 이 경을 듣지 아니하고, 菩薩의 所行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며 스스로 所得功德. 얻은바 공덕에 滅度想을 내어서(이것은 그 나름대로 아~, 내가 제도 되었다. 나는 공부 되었다고 하는 생각을 내어서) 當入涅槃하거든, 마땅히 열반에 든다. 공부하는 것을 이것으로 스톱한다 이겁니다. 자기 발전을 위한 공부를 이것으로서 스톱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130. 我於餘國 作佛 更有異名 是人 雖生滅度之想 入於涅槃

     아어여국 작불 갱유이명 시인 수생멸도지상 입어열반

     而於彼土 求佛智慧 得聞是經 唯以佛乘 而得滅度 更無餘乘

     이어피토 구불지혜 득문시경 유이불승 이득멸도 갱무여승

     除諸如來 方便說法(제제여래 방편설법 )

 

  내가 다른 나라에서 부처가 돼가지고서 다시 다른 이름으로서 있을 것이다. 딴 이름으로서... 그것은 여러분들의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저 일수도 있고, 도반일 수도 있고, 누구일 수도 있고, 俗家누구일 수도 있고 그래요. 이 사람이 雖生滅度之想하여 비록 멸도. 제도 되었다고 (여기의 滅度 = 제도)하는 생각을 내어서 비록 열반에 들지만, 그러나 저 국토에서, 다른 국토에서 佛智慧를 구해서 이 경을 얻어 들으리니 비록 佛乘으로서 滅度를 얻은 것은, 唯以佛乘으로 而得滅度. 오직 佛乘으로서 滅度를 얻은 것은 更無餘乘이다. 그 외에 다른 가르침은 없다. (乘 = 가르침이라고 해석하면 아주 좋아요. 이럴 때는...)다른 가르침은 없다.

 

  모든 如來가 方便으로 說法한 것은 제외한다. 모든 여래가 방편으로 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방편설이다. 그러니까 법화경의 이 가르침외의 다른 것은 전부 방편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화성유품 아닙니까?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화성의 비유를 뒤에 바로 가져오게 됩니다.

 

131. 諸比丘 若如來 自知涅槃時到 衆又淸淨 信解堅固 了達空法

     제비구 약여래 자지열반시도 중우청정 신해견고 요달공법

     深入禪定 便集諸菩薩 及 聲聞衆 爲說是經 世間 無有二乘

     심입선정 변집제보살 급 성문중 위설시경 세간 무유이승

     而得滅度 唯一佛乘 得滅度耳(이득멸도 유일불승득멸도이)

모든 비구들이여, 만약 여래가 스스로 열반할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는, 대중들이 또한 淸淨하여서 信解가 堅固하며 空法을 了達해서 禪定에 깊이 들어갔거든, 곧 모든 보살과 그리고 성문대중을 모아가지고서 이 경전을 설하리니, 世間의 無有二乘이 而得滅度요. 세간의 다른 어떤 가르침이 있어서 제도를 얻는 것이 아니요, 오직 一佛乘이라야 得滅度니라. 제도를 얻는 것이니라.

 

  一佛乘. 부처로서의 삶의 길. “모든 사람은 그대로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이 궁극적인 가르침. 이것만이 우리가 제대로 제도가 되는 것이지, 그 외에는 달리 생각하면 그 사람의 실력이 아무리 높고, 수행이 아무리 잘 되어 있고, 덕화가 아무리 높다하더라도 스스로 ‘아라한이다.’ 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이 대승불교. 특히 법화경불교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부처라고 하는 그 사실에 입각해서 공부를 할 때 아무리 공부가 아니 되어 있다하더라도, 거기서부터 출발할 때 이것이 완전한 제도가 가능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제도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가르침은 제도가 안 되고 오직 一佛乘이라야 滅度를 얻을 따름이다. 得滅度耳.(耳 = 뿐이다.) 一佛乘이라야 滅度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꿈을 높이 가져라. 희망을 가지라는 그런 의미가 이 속에 상당히 포함되어있습니다.

 

132. 比丘 當知 如來方便 深入衆生之性 知其志樂小法 深著五欲

     비구 당지 여래방편 심입중생지성 지기지락소법 심저오욕

     爲是等故 說於涅槃 是人 若聞 則便信受

     위시등고 설어열반 시인 약문 즉변신수

비구들이여, 當知하라. 如來는 方便으로서 깊이 중생들의 성품에 들어가서, 그들의 志 樂 小法. 작은 법을 마음에 즐겨하는 것을 안다 이겁니다.

그렇지요. 여기 모인 우리들은 더운 날에 쉬어도, 꾸역꾸역 와가지고 한 마디라도 듣고 깨우치고, ‘내가 공부한 것하고 제대로 맞나 안 맞나’ 확인도 하고 하는 그런 어떤 발전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어떤 공부나 자기의처지. 자기의 위치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진취적인 思考를 가지고 있다. 그 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중생들은 대체적으로 진취적인 생각을 갖지 못하고, 뜻과 뜻이 小法을 즐겨한다 이겁니다. 그런 것을 부처님은 환히 꿰뚫어 봅니다. 부처님은 다 압니다. 그리고 貪著五欲입니다. ‘아이고, 더운데 갈거 뭐 있나, 그저 시원하게 에어콘이나 틀어놓고 있지’ ←이것이 貪著五欲이거든요.

五欲에 탐착 했을 세. 그것까지 부처님은 다 안다 이겁니다.

 

  爲是等故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없이 방편으로 열반을 설하나니, 이 사람들이 만약 들으면 곧 信受하나니라. “그래 열반이라고 하는 중간 기착점이 있어. 그래 조금만 노력하면 돼. 그러면 거기에 딱 안주하는 거야.” 안온한 인생. 편안한 삶. ‘에이고 뭐 공부 더 할 것이 있나? 그것이 그것이지.’ 하고 어디 토굴로 늘 그저 자기 몸이 익숙한 데로, 더 발전적인 그런 기도를 아니 해보고, 그저 익숙한 데로, 편안한 쪽으로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이 불법만난 보람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도 너무 없는 그런 삶이지요.

 

  금방 비유가 나오는데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化城喩라고 하는 비유로서 이야기를 하는데 化城喩는 지금에 안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대통지승불이야기가 결국은 석가모니불의 이렇게, 이렇게 발전해서 그 잠깐도 봤지만 처음에 沙彌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 菩薩沙彌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 바로 菩薩. ←이렇게 표현해 온 것도 세월이 지나면서 그 성장해가고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심히 넘겨버리면, ‘사미라고 했다가 보살사미라고 했다가 여기는 왜? 또 바로 보살이라고 했나?’ 그러고 넘어갈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상당히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하고 지금에 안주하지 않는 것. 화성비유는 곧 중간 쉼터를 말하는 것이지요. 쉼터라고 하는 것은 小乘涅槃. 여기서 말 하는 것은 소승열반이지요. 소극적인 삶. 어디 토굴에 안주한다든지 지금까지 살아온 그 모양 그 꼴에 그만 탁 안주해서 (‘아이고......’) 편안하게 조그맣게 웅크리고 그런 사는 아주 작은 삶에 안주해버리는 그런 삶. 그것이 화성이지요.

조그마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가지고 살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더 도약해서 내 인생을 내 의지로 100% 연소시키는 것. 중요합니다.

 

  그냥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는 데로 내 인생이 연소되는 것이, 결국 한 번 가고 말 인생 아닙니까? 그런데 내 의지로 내 생명을 100% 연소시켜 버린다 이겁니다. 이것 중요한 것입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한 번 내 의지로서 공부가 됐든 봉사활동이 됐든 포교가 됐든 참선이 됐든 뭐가 됐든 간에 바람직하고, 또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가는 일이라면 한 번쯤 내 의지로서 내 삶을 확 불사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찬란한 노을을 스스로 준비해야 됩니다. 그 뭐 지금 해가 지는지 마는지 구름이 꽉 낀 인생을 마무리 할 것이 아니라, 아주 화려하고 찬란한 저녁노을을 스스로 준비하는 것. ←이것이 부처님을 만난 참 보답이 아닐까? 화성유품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불교의 장점 중에 하나는 저는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인생을 활기 넘치고 생기 넘치게 살라.” 願力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크게 강조됩니까? 祝願이 있지요. 發願이 있지요. 誓願이 있지요. 願力이 있지요. 우리가 천수경을 최초로 제일 많이 접하게 되는 경전이고, 지금도 제일 많이 읽히는 경전이 천수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천수경 안에 3분의 1이 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總願이 있고 別願이 있고 四弘誓願이 있고, 별별 원이 그 속에 여러 번 반복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뭡니까? 사람은 기대감과 어떤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저는 불교를 하나의 꽃으로 표현할 때, “자비는 아주 아름다운 꽃이다.”

탁상에 꽂힌 이 연꽃이 지금 아름답기는 해요. 그럼 지혜는 뭐냐?

“지혜는 밝은 꽃이다.” 지금 탁상에 꽂힌 이 꽃이 밝지는 않습니다. 시들시들해요. 또 원력은 뭐냐? 자비 지혜 원력이거든요.

불교를 세 마디로 표현하면 慈悲ㆍ智慧ㆍ願力입니다.

원력은 무슨 꽃이냐? 지금 탁상에 꽂힌 이렇게 시들시들하고 고개 숙인 꽃이 아니라, “생기 넘치는 꽃.” 꽃은 아름다워야 되고 밝아야 됩니다.

우중충 하면 아무리 향기로워도 그것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요.

 

  꽃은 밝아야 됩니다. 그리고 생기 있어야 됩니다. 조화를 싫어하는 이유가 뭡니까? 생기 없으니까 싫어하지요. 꽃은 첫째 아름다워야 되고, 그 다음에 밝아야 됩니다. 그리고 생기가 넘쳐야 됩니다.

 

자비가 있어야 되고 지혜가 있어야 되고 원력이 있어야 된다고요.

그 중에서도 원력이 참 불교의 장점 중에 장점입니다.

우리 인생은 정말 꿈과 기대로서 살라는 메시지거든요.

여기 화성유품의 이야기가 “현재의 네 인생. 네가 지금하고 있는 일에 안주하지 말라.” 겁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한 번 더 도약하라. 현재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한 번 뛰어가라.” 이 뜻입니다. 화성유품이...

 

  보물 캐러가는 사람들이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부처님이 중간에 일부러 신통으로 城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사람들에게 거기 가서 잠깐 쉬게 하는 겁니다. 그래 푹 쉬고는 그것을 없애버립니다.

변화한 도시를 없애버려요. ‘없다.’이겁니다. ‘집에 가지도 못한다.’이겁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이렇게 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르침이 화성유품이거든요. 여기는 용어는 小乘涅槃을 化城에 비유를 하고, 부처님의 지혜는 저 목적지 寶所. 보배가 있는 장소로 이야기가 되어 있지만, 이것은 우리 顯時로, 현실의 우리의 삶으로 이끌어 가지고 딱 코앞에 당도한 우리 현실하고 연관시킨다면 바로 앞에서 말한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가끔 불교의 아주 좋은 장점 중에 원력을 늘 강조를 하는데, 지금은 독불공 거의 없지요. 옛날에 우리 어릴 때는 독불공, 정초에 하루에 한 100자리. 심한 경우에는 200자리까지 해야 됩니다. 그런데 법당 하나에서 혼자서 100자리를 어떻게 치룰 수 있습니까?

그 때는 동참불공 이라는 것이 없어요. 동참불공 이라는 것이 없이 전부 독불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해치우는 방법이 있어요. 그리고 기분 좋게 해줍니다. 아주 기분 좋게 해주는 방법이 있어요. 100이면 100명. 200이면 200명까지도... 어떻게 하느냐?

 

  그 좋은 천수경 안 읽어요. 반야심경도 안 읽어요. 사다라니 다 집어쳐요.

由致. 請詞 다 집어쳐요. 뭐냐? 축원문만 해주는 겁니다. 축원문만.

축원도 그 집 식구 이름을 부를 때는 할머니 옆에 귀에다 대고 크게 불러줘요.

누구누구保體, 누구누구보체 금년에도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하면 그만 생기 확 나 버려요. 부처님 앞에서 내 이름을 들먹거려 가지고 축원을 해줬다 이겁니다. 그것이 뭡니까? 꿈입니다. 꿈을 실현시켜 주는 일이고 희망에 불을 지펴주는 일입니다. 그 할머니는 오로지 그 꿈 하나 가지고 그 먼 길을 쌀을 머리에 이고 온 겁니다. 그 기대감에 불을 지펴줬는데 기분이 안 좋을 수 있습니까?

천수경. 반야심경. 금강경 그것은 수백 번 읽어도 소용없어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희망. 자기들 가족을 잘 살게 해달라는 그 희망. 그것도 부처님 앞에서 이름을 들먹거려 줬다 이겁니다.

그것이 기대감이요 희망 감을 충족시켜 주는 불공법입니다.

그래서 100명이고 200이고 하루에 다 한다니까요. 3분밖에 안 걸려요 3분. 3분 걸렸는데 제대로 하면 2시간 걸리잖아요. 2시간 하는 것 보다 나아요. 2시간 아무리 해봐야 축원문 제대로 못하면 ‘무슨 오늘 불공 그러네’ 그런다고요. 제가 부전을 많이 해봐서 환히 잘 알아요. 사람 심리가 참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살펴야 됩니다. 프로는 런 것을 잘 살펴서 맞춰줄 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늘 기대감ㆍ꿈ㆍ희망. 이런 것을 놓지지 말고 살라는 뜻에서 화성유를 살펴봅시다.

 

133. 譬如五百由旬 險難惡道 曠絶無人 怖畏之處 若有多衆 欲過此道

     비여오백유순 험난악도 광절무인 포외지처 약유다중 욕과차도

     至珍寶處(지진보처)

비유하건대 五百由旬 險難惡道에 曠絶無人하야, 아주 멀리까지 사람하나 보이지 않아 怖畏之處라. 아주 두렵고 두려운 곳이다.

若有多衆이 欲過此道라. 많은 사람이 보물을 찾으려고, 사람들을 이끌고 이 길을 지나가서 至珍寶處에 이르고자 할세.

 

134. 有 一導師 聰慧明達 善知險道 通塞之相 將導衆人 欲過此難

     유 일도사 총혜명달 선지험도 통색지상 장도중인 욕과차난

그 때에 한 안내자가 있었으니, 有一導師. 리더가 있었으니 그 사람은

聰慧明達하야 險道의 通塞之相을 잘 알아서, 어느 길로 가면 길이 막혔는지 어느 길로 가면 길이 뚫혔는지를 잘 알아서 여러 사람들을 인도해서 이 어려운 길을 지나가거든,

 

135. 所將人衆 中路懈退 白 導師言 我等 疲極 而復怖畏 不能復進

     소장인중 중로해퇴 백 도사언 아등 피극 이부포외 불능부진

     前路猶遠 今欲退還(전로유원사 금욕퇴환)

所將人衆이, 거느리고 가는 바 사람대중들이 中路懈退. 가다가 하도 길이 멀고 지치니까, 목도 마르고 땀도 나고 하니까 그만 게으름이 납니다.

그래서 인도하는 리더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피로가 극에 달해서 더 이상 두려워서 나가지 못한다.”이겁니다. 앞길이 아직도 까마득해요.

그러니까 “지금 돌아가렵니다.” 이거는 겁니다. 이것은 머리띠 두르고 데모가 나온 것이지요. 그래서 돌아가려고 하니까.

 

  인도하는 사람은 상당히 자금도 투자하고 해서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보물을 한 짐씩 지우고 돌아와서 근 장사를 할 판인데, 아 이거 야단났거든요. 그러니까 인도하는 사람은 할 수 없이,

 

136. 導師 多諸方便 而作是念 此等 可愍 云何捨 大珍寶 而欲退還

     도사 다제방편 이작시념 차등 가민 운하사 대진보 이욕퇴환

  作是念已 以 方便力 於 險道中 過 三百由旬 化作一城 告 衆人言

  작시념이 이 방편력 어 험도중 과 삼백유순 화작일성 고 중인언

여러 가지 방편이 있어요. 그래서 이러한 생각을 했어요.

‘이 사람들은 가히 불쌍하다. 어찌해서 이 큰 珍寶. 大珍寶를 버려 버리고 물러가려고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방편의 힘으로써 險道가운데서 三百由旬쯤 지나서 化作一城이라. 한 도시를 만들었어요. 변화시켜 한 도시를 만들어서 사람에게 일러서 고하되,

 

137. 汝等 勿怖 莫得退還 今此大城 可於中止 隨意所作 若入是城

     여등 물포 막득퇴환 금차대성 가어중지 수의소작 약입시성

 快得安穩 若能前至寶所 亦可得去)쾌득안온약능전지보소 역가득거)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물러가지도 말라. 지금 저기 도시가 보이지 않느냐, 큰 도시가 하나 있지 않느냐, 거기 가서 우리 쉬었다 가면 된다.” 이렇게 해서 隨意所作이라. 거기 가면 마음대로 잠이면 잠. 먹을 것이면 먹을 것.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若入是城이면, 만약에 그 도시에 들어가면 快得安穩이라. 마음대로 빨리 편안함을 얻을 수가 있다. 若能前至寶所라도 만약에 능히 쉬었다가 저 앞에 있는 보배장소에 이른다 하더라도 또한 얼마든지 갈 수가 있다. 이제 반도 훨씬 더 왔는데 그래놓고 돌아가면 어쩌느냐?

 

138. 是時 疲極之衆 心大歡喜 歎 未曾有 我等 今者 免斯惡道

     시시 피극지중 심대환희 탄 미증유 아등 금자 면사악도

     快得安穩(쾌득안온)

 是時에 疲極之衆이 피로가 지극한 사람들이 心大歡喜해서 마음이 너무 기뻐가지고서 未曾有를 찬탄하고, ‘아~ 참 이런 소식이 있구나.’ 하고서 우리들이 지금에 免斯惡道하고, 이 악도를 면하고 快得安穩이라. 아주 편안하게 됐다.

 

139. 於是衆人 前入化城 生 已度想 生 安穩想

     어시중인 전입화성 생 이도상 생 안온상

이 모든 대중들이 이 성에 化城. 변화해서 만든 도시에 들어가서 度想. 이미 제도되었다고 하는, 이미 다 왔다고 하는 생각을 내며, 生安穩想. 안온하다. 편안하다 하는 생각을 내거늘, 이것이 토굴에서 밥술이나 먹고 사는데 그저 지장 없고 하니까 ‘에이 이제 됐다. 공부 더 하면 뭐하나? 골치 아프게...’ 하고 그냥 주저앉아서 사는 그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140. 爾時導師 知此人衆 旣得止息 無復疲倦 卽滅化城 語 衆人言

     이시도사 지차인중 기득지식 무부피권 즉멸화성 어 중인언

爾時에 導師가 知此人衆하니 그 때에 인도하는 사람이 이 대중들이 이미 충분히 止息. 쉬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는, 더 이상 피로함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는 卽滅化城하고 변화한 도시를 없애버렸어요.

그리고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141. 汝等 去來 寶處在近 向者大城 我所化作 爲 止息耳

     여등 거래 보처재근 향자대성 아소화작 위 지식이

그대들은 가자. 寶處在近이라. 보배 있는 장소가 여기서 얼마 안 된다.

向者大城은 바로 전에 큰 도시가 있었던 것은 我所化作이다. 내가 변화해서 만든 것이다. 止息할 따름이다. 止息을 위한 것뿐이다 이 말입니다.

잠깐 쉬었다 가기위한 것뿐이다.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이 순간의 우리의 삶은 허망한 것이다 이 말입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밖에 인생의 의미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것 밖에 달리 다른 인생의 의미는 없다.

 

  제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편할지는 모르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또 불법을 만난 무슨 보람과 의미가 있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없다 이겁니다. “큰 도시” 그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현재 지금 아무리 편안한 삶을 산다 하더라도 그것은 없는 것이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그 길 뿐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 화성유가 정말 우리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고, 뭔가 원력, 불교의 願.

축원ㆍ발원ㆍ소원. 이런등등 원에 대한 말이 그렇게 많은 의미를 조금 짐작할 만해요. 우리가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삶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42. 諸比丘 如來 亦復如是 今爲汝等 作 大導師

     제비구 여래 역부여시 금위여등 작 대도사

여러 비구들이여, 여래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지금의 그대들을 위해서나는 大導師. 큰 안내자가 되었다. 안내자가 되었다.

 

143. 知諸生死 煩惱惡道 險難長遠 應去應度

     지제생사 번뇌악도 험난장원 응거응도

知諸生死의 煩惱惡道. 생사 가운데서 번뇌와 악도. 險難長遠. 험난하고 길고 먼 것을 알아가지고서 應去應度호대. 멀고멀어서 응당히 떠나고 또 응당히 벗어나, 應去 =응당히 떠나고 또 응당히 벗어나야 할 것을 안다.(알 知자로 새시면 좋을 것입니다.)

 

144. 若衆生 但聞一佛乘者 則 不欲見佛 不欲親近 便作是念

     약중생 단문일불승자 즉 불욕견불 불욕친근 변작시념

     佛道長遠 久受勤苦 乃可得成(불도장원 구수근고 내가득성)

만약 중생들이 다만 一佛乘을 들을 것 같으면 不欲見佛하고, 부처님을 그만 보려고 아니한다. 너무 높으니까요. 조그마한 어떤 꺼리를 줘야 ‘아 그것은 되겠다.’ 싶어서 달랑 거기에 뭔가 해보려고 하는 욕심을 내거든요.

방편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방편의 가치는 또 거기에 있습니다.

不欲親近하며 부처님을 친근 하려고 아니 한다 이겁니다.

부처님을 보려고도 아니하고, 부처님이 너무 멀다고만 가르쳐 놓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친근하고자 하지도 아니 한다.

 

  便作是念호대 곧 이런 생각을 하되, 佛道는 長遠이라 久受勤苦라사 불도는 너무너무 멀리 있다. 오래오래 부지런, 부지런히 고통스럽게 고행을 하고 닦아야 乃可得成하느니라. 그래야 겨우 얻을 수 있다고 이렇게 또 생각한다 이겁니다. 그것도 참 지극히 잘못 된 것이지요. 그래서

 

145. 佛知是心 怯弱下劣 以 方便力 而於中道 爲 止息故 說 二涅槃

     불지시심 겁약하열 이 방편력 이어중도 위 지식고 설 이열반

부처님이 이 마음의 怯弱下劣함을 아시사 방편의 힘으로서 中道에 止息하기 위한 까닭으로, 잠깐 쉬도록 하기 위한 까닭으로 二涅槃. 二乘涅槃을 이야기했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대승불교에서 볼 때 번뇌가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고, 그야말로 불이 다 타서 재마저 싸늘하게 식어버린 듯한 그런 몸과 마음의 상태가 된 그런 편안함이 있다.

 

  지극히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좋지요. 그러나 그것은 부처로서의 삶이 아니고, 보살로서의 삶이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근기 중생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二乘涅槃을 방편으로 잠깐 이야기했을 뿐이다. 이런 내용입니다.

 

   - 8강 - 3으로 이어집니다. -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대원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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