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의 법화경 대강좌

[스크랩] 법화경 대강좌 7강 - 1 (약초유품12~18)

시치 2009. 1. 30. 22:22

 

 

       법화경 대강좌 7강 - 1 

 

 

  더운 날씨에 이렇게 많이 오셔서 고맙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경전을 공부한다고 하는 이 사실이 승려로서 다만 그저 본분일 뿐입니다. 본분일 뿐인데, 그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작금의 우리 스님들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소중한 시간을 갖는 이 일이 참으로 경사스럽고 또 환희롭기도 하고요. 또한 선배로서 아주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근래에 교통이 발달해서 서양에 가서 공부하는 일이라든지, 또 저 쪽에 인도ㆍ스리랑카ㆍ태국ㆍ미얀마 쪽에 가서 공부하는 일이라든지, 그런 경우들이 참 빈번하게 일어나고 또 쉽게 가서 공부 해옵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신 스님들도 요즘 종단에 많지요?

 

  그런데 우리 전통교육과 현대교육의 이면을 우리가 좀 생각해 본다면, 불교라고 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지극히 전통적인 것이고, 그 전통적인 종교내지 종교교육ㆍ문화ㆍ불교문화가 좋아서 우리가 모두 이 집안에 들어와서 이런 모습. 3000년 전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했던 그 모습 그대로 지금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좋아서 는 것이지요.

 

  교육에 있어서도 역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서양학문이 발달해서 불교도 서양식으로 체계화 하고, 그것이 전통교육과정에 체계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고요. 서양식 체계와 동양식 체계는 닮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엇잡히 전통을 좋아하고, 거기에 따라서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전통교육을 중시 여기는데 교재에 있어서도 역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강원형태지요. 그래서 上講禮도 하시고 그러는데, 그래서 교재도 역시 부처님당시 때부터 있었던 전통 경전을 가지고 교재로 삼고, 또 그 교재에 의해서 전통교육으로 공부 한다는 이 사실. 이것은 역사적인 것이라서 너무나도 뚜렷하고 여러분들도 강원에서 다 경험하신 바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현대적인 어떤 서양학문 체제에 의해서 공부하는 개론식이라든지, 사상 서적인 입장이라든지, 또 역사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교재라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공부하는 길이 있겠지요. 그래서 보니까 교재가 그런 현대적인 교재를 도입을 해서 공부하는 그런 입장이 있다고요.

 

  예를 들어서 대학이라든지, 또는 일반 강원에서도 약간 그런 바람이 불고,어떤 사찰에서는 완전히 강원전통을 변화 시켜서 대학 화 해가지고 모든 교육체계라든지 그런 식으로 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습니다.

자리를 잘 잡지를 못하고 갈등이 참 많은 입장인데, 사실은 저는 동진출가 해서, 그 당시 처음에 승가대학이 생길 때 곳곳에서 그것이 권유인가? 유혹인가? 참 많았어요. 해인사 강원에 있을 때도 지관스님 마산대학 다닐 때, 거기로 가라고, 마산대학에 가서 입학해서 공부하라고 수 없이 권유를 받고, 졸업하고도 얼마 있으니까 종기생이 생기기 시작 하더라고요.

그래서 종기생으로 가라고 주변에서 (도반들이 간 사람들도 물론 많고요.) 권유를 받고 지금까지 왔는데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현대화 된 학교문전에 서성대지 않았어요.

왜 그러냐? 그렇게 많은 권유를 받고 기회도 많았고요. 초기에는 보장도 많이 해주고 그랬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전통 교육과정이라고 하는 것. 쉽게 표현하면 講院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지금 세계에서 유명한 옥스포드나 하버드나 이런 학교에서 나는 마명이나 용수가 나왔다는 소리 못 들었다. 그런데 우리 전통교육기관인 강원에서 마명 용수가 나왔고, 원효 의상이 강원에서 나왔다 이겁니다.

하버드나 옥스포드에서 원효 의상이 나왔다는 소리 못 들었습니다.

어떤 성인도 그런 현대화 된 교육 기관에서 (전통이 몇 백 년 된 학교도 있습니다.) 나왔다는 소리 못 들었다 이겁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세운 강원이라고 하는 전통교육기관이 최고의 어떤 인격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이다. 거기에서 얼마만치 공부하고 어떻게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거기에 임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지, 결코 그 교육기관이 사회 교육기관 보다 저급하거나 질이 떨어지거나 수준이 미달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겁니다. 무엇을 보더라도 마명 용수가 강원 출신이고, 원효 의상이 강원 출신이고, 황벽 임제가 다 강원 출신이고, 달마나 혜가가 다 강원 출신이지 무슨 하버드나 옥스포드나 캠브리지나 이런데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다 이겁니다. ←이런 소리를 저는 어릴 때부터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 신념. 그런 소신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학교라고 하는 데는 한 번도 고개를 기웃거려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전통불교 내용과 그 기관 보다 더 우선하는 교육기관은 없다 이것이지요. 교육 내용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정말 이해되어져야 되고, 밖에서 이해하기를 바랄 필요는 없고, 이 안에서 우리라도 그것을 잘 이해를 하고 거기에 대한 어떤 확신과 자기의 어떤 소신을 확고부동하게 갖고 임한다면, 그 만치 소득이 있지 않을까? 긍지와 자부심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야 되겠는데 근래에 거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지 아니면 소신이 없는지 자꾸 바깥으로, 어떤 교육기관으로 기웃 거리고, 우리의 전통. 이 세상에 둘도 없는 훌륭한 교육내용과 교육기관 교육체계. 이런 것에 대해서 좀 못 믿어하는 풍조들이 근래에 있어서 좀 안타깝기도 하고, 왜 그렇게 이해가 부족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저 나름대로 해봅니다.

 

  교재도 그렇지요. 교재도 부처님이 만든 교재. 조사스님이 만든 교재보다 더 우수한 교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 불교입문서. 불교개론 등등 그런 책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집니까?

그것은 기껏해야 중생들의 짧은 소견으로 이래저래 사량 분별해서 짜깁기 해 놓은 교재지, 정말 안목이 있어서 만들어 놓은 금강경 같은 교재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법화경 같은 교재가 어디 있냐고요?

하다못해 초발심자경문 같은 교재도 다시는 없어요. 현대화된 교재. 어떤 교재가 그렇게 오래 동안 명성을 떨치는 그런 불교학 개론이 있으며, 그런 사서가 있으며, 그런 개론서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중생들의 사량 분별로 짜깁기 해 놓은 교재인데 그것이 오죽 하겠습니까?

 

  그런데 성인이 만든 그 좋은 교재를 버려버리고, 중생들이 만들어 놓은 교재에 기웃거린다고 하는 것은 참 크게 잘못된 것이고, 오산도 보통 큰 오산이 아닙니다. 이것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스님들 교육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불자들을 가르치는 일반 신도 교육도 교재를요? 하다못해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이나 이런 전통경전을 근거로 해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 속에 무슨 교리 다 들어 있습니다. 대소승 교리. 온갖 교리 행상이 사실은 그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성인이 만든 그런 전통적인 교재를 근거로 해서 가르치는 것이 공덕도 될뿐더러 불교를 바로 아는 그런 길이 아닐까? 저 나름대로는 그런 소신을 가지고 늘 주장을 하는데, 포교 일선에 계시는 스님들께서 한 번 생각해 보시고 참고 하시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약초유품은 두 말할 것 없이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설법을 하셔서 중생교화를 하는 것을, 마치 여름 날 비가 내리고 그 비를 맞고 온갖 초목.

三草二木. 그러지요. 三草는 또 상징하는 바가 있고, 또 二木도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온갖 초목들. 여러 가지 초목들이 그 비를 흠뻑 맞고 그 나름대로 작은 풀은 작은 풀대로, 중간 풀은 중간 풀대로, 큰 풀은 큰 풀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전부 흡수해 빨아들여서 자기의 양식으로 삼고 성장해 간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고, 또 사실은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법화경 하나만 하더라도 우리가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제가 법화경을 강의하는 것 보다 스님들이 준비가 더 잘 되어 있고 마음이 더 열려 있으면, 제가 강의하는 것 몇 배 이상으로 더 잘 소화하고 잘 깨닫고 잘 이해하고 잘 활용할 수 있는 스님도 계실 것이고, 또 법회에 동참해서 환희심 한 번 내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근기 따라서, 또 개인의 입장 따라서 아주 다종다양 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런 관계를 이 약초유품이 문학적으로 아주 잘 그려 놨다. 고래로 문학성이 아주 가장 뛰어난 것이 법화경 28품 중에서도 약초유품이다.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6강-4에 보면 小ㆍ中ㆍ大ㆍ大枝ㆍ大葉ㆍ중 하 근기. 이런 것들을 쭉~~ 비유로서 설명을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아주 좋은 내용들이 많이 있었지요? “부처님은 이런 사람이다.” 엇잡히 장마철에 비가 쏟아져서 온갖 초목을 길러 내듯이 부처님의 그 덕화와 지혜와 가르침으로서, 설법으로서 중생들에게 쏟아 부어서, 법의 비를 쏟아 부어서 중생들을 교화하는데, 마음의 양식을 만들어 주는데 “나는 이러한 사람이다.” ←이런 선언을 하는 대목에서 如來 · 應供 · 正徧知 · 明行足 · 善逝 · 世間解 · 無上士 · 調御丈夫 · 天人師 · 佛世尊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未度者로 令度하고, 未解者로 令解하며, 未安者로 令安하고, 未涅槃者로 令得涅槃케한다. 아주 참 근사한 말이지요.

 

  그러면서 또 今世後世를 如實知之한다. 그러면서

나는 一切知者며 一切見者며 知道者며 開道者며 說道者다. 대단한 자부심 아닙니까? ↗이래도 누구하나 부처님보고 “너무 지나친 자랑이다.” 이렇게 평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해도,

“부처님, 그거 너무 지나친 자만심 아닙니까?” 이런 말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늘 그럽니다. 자고로 자기자랑 해서 손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부처님 한분뿐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어떻지요?

우리는 조금만 자랑 해도 전부 손해 보게 되어 있다고 알면 됩니다.

 

  우리는요. 지가 아무리 잘 했어도 자기자랑하면 무조건 마이너스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未度者로 令度하고, 未解者로 令解하며, 未安者로 令安하고, 未涅槃者로 열반을 얻게 한다 입니다. 그리고 나는 一切知者며 一切見者며 知道者며 開道者며 說道者다. 너희等天人阿修羅 등은 皆應到此. 온갖 생명체들은 모두 여기에 법을 들어야 한다. 내 설법을 들어야 한다. ←이렇게 지난 시간에 여기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12. 爾時 無數千萬億種衆生 來至佛所 而聽法

     이시 무수천만억종중생 내지불소 이청법

그 때에 無數千萬億種衆生들이 정말 來至佛所. 부처님처소에 왔다 이겁니다. 와서 聽法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3000년의 불교세계. 이 모든 것을 머리에 그리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처소에 지금 이렇게 와 있잖아요. 그래서 프로가 되었어요. 저 아마추어들은 신도님들이라면 우리는 정말 전문가가 되어서 프로가 되어 가지고 부처님하고 지금 어깨를 겨누려고 하고 있습니다.

 

13. 如來于時 觀是衆生 諸根利鈍 精進懈怠 隨其所堪 而爲說法

     여래우시 관시중생 제근이둔 정진해태 수기소감 이위설법

     種種無量 皆令歡喜 快得善利(종종무량 개령환희 쾌득선리)

如來가 그 때에 중생들의 諸根利鈍과 여러 根들의 근기가 영리한지 둔한지, 또 精進을 열심히 하는지 아니면 게으른지, ←이런 것들을 관찰하여 隨其所堪하여 그들이 감당할 바를 따라서, 얼마나 감당할 것인가? 그것을 잘 살펴가지고서 而爲說法하야 種種無量을 설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皆令歡喜. 모두들 기쁘게 하고, 快得善利. 아주 흔쾌하게 좋은 것 이로운 것을 얻게 한다.

 

14. 是諸衆生 聞是法已 現世安穩 後生善處 以道受樂 亦得聞法

     시제중생 문시법이 현세안은 후생선처 이도수락 역득문법

     旣聞法已 離諸障礙 於 諸法中 任力所能 漸得入道 如彼大雲

     기문법이 이제장애 어 제법중 임력소능 점득입도 여피대운

     雨於一切 卉木叢林 及諸藥草 如其種性 具足蒙潤 各得生長

     우어일체 훼목총림 급제약초 여기종성 구족몽윤 각득생장

 

  이 모든 중생들이 聞是法已하야 이러한 법을 듣고 나서, 그 다음에 법을 들었으니까 이익이 있을 것 아닙니까? 여기를 제가 그랬습니다.

聞法六益章. 법을 듣고 여섯 가지 이익이 있는 장이라고 해서 聞法六益章이라고 과목을 붙였습니다.

 

  처음에 現世安穩. 금생에 부처님 들으면 편안해요. 어떤 신도님들은 차만 타면 무조건 법문 테잎이 나오든지 아니면 불교라디오가 켜지든지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집에서 일할 때도 항상 테잎을 틀어 놓거나 불교 TV를 틀어 놓거나 불교라디오를 틀어 놓는다. 다 듣느냐 하니까 다 안 듣는대요.

그냥 편안하대요. 現世安穩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익이고요.

 

  두 번째, 後生善處. 나중에는, 다음 생에는 善處에 태어납니다.

왜냐? 우리는 欲知來生事인댄 今生作者是. 그런 말 있지요?

다음의 삶이 어떨 것인가는 오늘의 우리의 삶이 어떠하냐에 달려있다는 뜻이지요. 당연 하지요. 善處에 태어날 수밖에 없지요.

인연은 지은대로 가니까요. 우리가 이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오늘 좋은 일 많아요. 식사하러 가자는 데도 있고, 놀러 가자는 데도 있고, 더운데 거기까지 뭐 하러 가느냐? 시원한데 그냥 앉아서 수박이나 깨먹고 놀지. ←이런 유혹도 있는데, 그것 다 뿌리치고 이렇게 왔다 이겁니다. 아, 이렇게 기울인 노력이 어디에 가겠습니까? 그것 뻔한 겁니다. 다 거기에 따르는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세 번째 以道受樂이라. 道로써 낙을 받는다.

진실하고 유익한 삶의 길이다. 도라는 것은 해석하기에 달렸지만, 아주 진실하고 유익한 삶의 길. 이치대로 사는데 따른 이익입니다.

이치대로 사는데서 오는 이익이라야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는 이익은 그것은 이익이 아닙니다. 우리 불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 안 씁니다. 수단 그 자체가. 방법 그 자체가 바로 결과하고 맞물려 있어야 됩니다.

 

  네 번째, 亦得聞法한다. 이것 참 좋은 입니다. 또한 聞法할 수 있다 이 입니다. 그러니까 법문을 자꾸 듣는 사람들은 더 듣게 되고, 책을 한 페이지 본 사람은 두 페이지 보게 되고, 책을 한 권 본 사람은 두 권 보게 됩니다. 선행도 한 번 선행하게 되면요. 처음에 어디 가서 선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 번하고 그 다음에 할 때는 쉬워요. 묘하다고요.

악한 일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법문 듣는 일. 공부하는 일. 이것 참 무궁무진 하거든요. 그리고 여기에 재미 붙이고 취미를 좀 들이고 맛을 좀 들여 놓으면요. 이것 기가 막힌 공부입니다. 이 자체에 그만 즐거움이 있습니다.

 

  儒書에도 祿在其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녹이 그 가운데 있다. 월급이 바로 그 가운데 있다. 부처님 법 한 구절, 한 구절 새겨가고 음미하고 읊조려보고 그리고 거기에 어떤 감상에 젖어들고 하는 그것이 그냥 祿입니다.

그러면 자꾸 그것을 하게 됩니다. 亦得聞法이라. 또한 聞法을 할 수 있게 된다. 법을 듣게 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좀 어렵더라도 자꾸 자신을 이런 것에 끌어다 놔야 됩니다.

 

  다섯 번째, 旣聞法已 이미 聞法하고 나서는 離諸障礙라. 법을 듣고 나면 모든 장애를 다 떠나게 된다. 처음에 한 번 오기 힘들지 다음에 두 번 오고 세 번 오고 이렇게 되면, 매월 첫째 월요일 오후에는 일이 없어져요. 볼 일이 전부 저절로 밀려나요. 전화도 안 옵니다. 그 날은 약속도 안 온다고요.

묘하게 그렇게 됩니다. 내 마음을 딱 그렇게 해버리면 모든 장애를 떠나게 됩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장애를 떠나게 된다고요. 저는 그렇게 해석을 합니 다.

 

  여섯 번째, 於 諸法中에 任力所能하야 모든 법 가운데 힘의 능한 바를 따라서, 내 힘 따라서 漸得入道라. 점점 도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즉 그야말로 佛道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最上의 道다. ←여기 까지를 聞法六益입니다. 법문 듣고 무슨 이익이 있느냐? 이것 갖다 딱 대면 틀림없어요.

 

     1 現世安穩. 2 後生善處. 3 以道受樂. 4 亦得聞法하게 된다.

 

     5 旣聞法已 離諸障礙. 6 於 諸法中에서 任力所能하야 漸得入道다.

 

         ↑ 聞法六益.

 

  예컨대 저 큰 구름이 一切 卉木叢林과 여러 약초에 비를 내리면 그 種性과 같이 具足蒙潤이라. 구족하게 蒙潤하게 된다. 축축하게 아주 적셔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各得生長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 법을 듣는 것이 우리의 어떤 마음의 양식이 되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신의 인생관. 가치관들이 자꾸 자라나거든요. 그야말로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온갖 초목들이 자기도 모르게 生長하는 것과 똑 같은 이치다. 그렇습니다.

  다음에 一相一味라는 말을 상당히 약초유품에서는 무시 못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는 一相一味章이라고 표현합니다.

 

15. 如來說法 一相一味 所爲解脫相 離相滅相 究竟至於一切種智

     여래설법 일상일미 소위해탈상 이상멸상 구경지어일체종지

     其有衆生 聞如來法 若持讀誦 如說修行 所得功德 不自覺知

     기유중생 문여래법 약지독송 여설수행 소득공덕 부자각지

 

  如來說法은 一相一味라. 그랬습니다. 한 모양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한 맛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一相이라고 하는 말이나 一味라고 하는 말이나 같은 입니다. 자를 붙여도 좋고, 자를 붙여도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요. 이런 것은 아주 문학적인 표현이지요.

所爲解脫相이다. 解脫味라고 해도 좋아요. 解脫相. = 解脫味.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생사해탈” 삶과 죽음으로부터의 해탈.

離相. = 離味라고 해도 좋아요. 이것은 떠났다는 말은 偏空.

치우친 空과 치우친 相을 떠난 것. 그것을 離相이라고 합니다.

滅相. 해탈. 이상. 멸상. ←이것이 비슷한 표현이지요?

滅相은 自他를 떠났다고 고래로 표현합니다.

 

  離相은 有 無를 떠났다고 보면 됩니다. 有를 보되 空과 아울러서 보면 그것은 바로 보는 것인데 치우친 有. 치우친 空은 전부 잘못 된 것이지요.

치우친 有와 치우친 空을 떠난 것을 離相이라고합니다. 다음에 自相.

自他를 소멸했을 때를 滅相그럽니다. 그래서 究竟에는 一切種智를 이룬다.

부처님이 증득하신 지혜를 一切種智라고 하지요.

一切種智를 이루게 되나니 其有衆生이 聞如來法하고 어떤 중생이 여래의 법을 듣고, 만약에 지니고 읽고 외우거나 如說修行. 설하신 것과 같이 수행한다면 所得功德은 不自覺知니라. 스스로 覺知하지 못한다. 깨닫지 못 한다 겁니다. 공덕이 있기는 있는데 그야말로 깨닫지 못 하는 겁니다.

깨닫지 못 한 가운데 저절로 공덕은 있게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경전을 통해서 정말 부처님 당시 때의 어떤 수행은 부처님 말씀에 근거를 하면, 경전을 가지고 수행을 하고 그 내용을 가지고 사유하는 것으로서 수행을 삼았습니다. 그 외 복잡한 방법은 전부 뒤에 생긴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금강경에

受持.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책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입니다.

책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마음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됩니다.

讀. 가지고 다니면 읽게 되지요?

誦. 읽다보면 외우게 되지요?

書寫. 쓰는 것입니다. 한 구절도 좋고 한 자도 좋아요. 꼭 많이 써야 좋은 것이 아닙니다.

爲人解說.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경전의 五種修行이라고합니다.

 

  지니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그냥 한 번도 안 봐도, 어디 여행갈 때 쪼래기에 포켓용 금강경 하나 넣어 다녀도, 돌아올 때까지 한 번도 안 봐요.

그런데 든든해요. 그것 묘한 겁니다. 시간 나서 문득 생각나면 한 구절 읽어봐도 좋고요. 그래서 어디 가서 이야기해줄 기회가 되면 이야기해 줘도 좋고요. 낮선 한 구절 만나가지고 ‘아, 이것 나는 좀 서툴다.’ 싶으면 한 구절 가지고 계속 중얼 거리면서 다니는 겁니다. 차에서도 중얼 거리고, 어디 가든지 중얼 거리면 그만 익숙해버리잖아요. 그럼 자기 것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五種修行 = 受持. 讀. 誦. 書寫. 爲人解說. ←이렇게 다섯 가지로 금강경에도 여러 번 말하고 있지요.

 

16. 所以者何 唯有如來 知此衆生 種相體性 念何事 思何事 修何事 云何念

    소이자하 유유여래 지차중생 종상체성 염하사 사하사 수하사 운하념

    云何思 云何修 以何法念 以何法思 以何法修 以何法得何法

    운하사 운하수 이하법념 이하법사 이하법수 이하법득하법

 

  所以者何오 까닭이 무엇인가? 오직 如來는 衆生들의 종류와 相과 體와 性을 전부 알되, 중생들의 모습 종류 체상 성 성품 이런 것들을 전부 다 안다. 念何事, 어떤 일을 기억하는가?

思何事, 어떤 일을 생각하는가? 이것은 사유하는 겁니다. 자는 기억하고 있는 것. 저 사람이 지금 뭘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 지금 뭘 생각하고 있다. 修何事. 무슨 일을 닦고 있다. 무슨 일을 실천 수행한다 이 입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또 그런 일은 어떻게 기억 하는지, 어떻게 사유하는지, 어떻게 닦는지,

 

     以何法念과 어떤 방법으로 기억 하는 것과,

     以何法思. 어떤 방법으로 사유하는 것과,

     以何法修. 어떤 방법으로 닦는 것과,

以何法得何法. 어떤 방법으로 어떤 법을 얻는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이것을 전부 부처님은 다 안다. 중생들의 내용을 속속들이 다 안다고 보면 됩니다.

 

17. 衆生 住於 種種之地 唯有如來 如實見之 明了無礙 如彼卉木叢林

    중생 주어 종종지지 유유여래 여실견지 명료무애 여피훼목총림

    諸藥草等 而不自知 上中下性(제약초등 이부자지 상중하성)

衆生이 住於 種種之地를 곳곳에 머무는 것을 唯有如來가 如實見之해서 오직 여래는 여실히 見之해가지고서 明了無礙호대 명료하게 알아서 걸림이 없다. 如彼卉木叢林과 諸藥草等이 不自知 上中下性이니라. 스스로 상 · 중 · 하의 성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내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어떤 존재인가? 이것 잘 몰라요. 생각 잘 안 합니다. 저는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만약에 정말 비교를 한다든지 뭐해서 부처님이 상중하 성을 알듯이, 사람 관계에 있어서 그런 차별상을 환히 떠올려서 우리가 안다면, 그것 자살할 일이 아주 많을 것 같아요.

본인은 모르는 겁니다.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것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나무는요? 큰 나무 사정 모릅니다. 큰 나무는 작은 나무 몰라요. 서로가 모릅니다. 여기 그런 뜻입니다.

 

18. 如來知是 一相一味之法 所爲解脫相 離相滅相 究竟涅槃 常寂滅相

     여래지시 일상일미지법 소위해탈상 이상멸상 구경열반 상적멸상

     終歸於空 佛知是已 觀 衆生心欲 而將護之 是故 不卽爲說一切種智

     종귀어공 불지시이 관 중생심욕 이장호지 시고 부즉위설 일체종지

     汝等迦葉 甚爲希有 能知如來 隨宜說法 能信能受 所以者何

     여등가섭 심위희유 능지여래 수의설법 능신능수 소이자하

     諸佛世尊 隨宜說法 難解難知(제불세존 수의설법 난해난지)

 

  如來가 知是 一相一味之法하나니 이와 같이 一相一味의 法을 아나니, 所爲解脫相. 離相. 滅相. 究竟涅槃인 常寂滅相이다. 그래서 終歸於空하나니, 그렇습니다. 여기는 해탈상. 이상. 적멸상. 구경열반인 상적멸상. ←이렇게 했는데 그래서 終歸於空. 마침내 空으로 돌아간다.

空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도 흔히 이야기하는 내용이고, 또 그 나름대로 안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 어떤 某 선사는 禪法門 제쳐놓고, 오직 그저 空에만 관심 있는 그런 선사도 적지 않습니다.

 

  이 禪法門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누구에게나 통할만한 그런 내용은 사실 아니거든요. 사람에게 뭔가 깨우쳐주고, 감동을 주고, 그것이 일상생활에 뭔가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고, 보탬이 되게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空에 대한 내용을 아주, 아주아주 중언부언 하면서 설명하는 예들을 우리가 흔히 보는데, 空도 제일 기초단계가 分析公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이크” 하면 이 마이크가 여러 가지 쇠붙이로 조립이 되어서 마이크가 되었지요. 이것을 분해 해버리면 마이크가 아닙니다. 자동차도 그렇고 우리 육신도 그렇고요. 또 우리의 정신세계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해서 空 이라고 하는 것은 분석공이라고 그럽니다.

 

  그 다음 단계가 緣起空인데요. 이런 저런 인연이 화합했기 때문에 이것은 공이다.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공이라고 설명한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지요. 분석공과 연기공을 두루 뭉실 섞어서 이야기하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緣起를 이야기할 때,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저는 그 내용에 대해서 참 궁금했습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그것이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 설법을 하실 때, 틀림없이 물건을 두 개를 들고 이야기하셨을 것이라고요. 갈대짚단 두 단의 예를 들어서 비유를 들잖아요.

갈대 두 단이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서 있을 수 있다.”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서 있을 수 있다.” 틀림없이 물건을 두 개를 들고 설명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내가 있음으로 여러분들이 있고, 여러분들이 있음으로 내가 있다.”  “내가 있음으로 네가 있고, 네가 있음으로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분명해집니다. 공을 설명하고, 연기공을 설명할 때 꼭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아니하고 덮어놓고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서 있다.”고 하면 그것은 말이 공중에 떠버립니다.

연기공을 설명하려면 분명히 물건 두 개가 서로 의지하는 형상을 취하면서 설명을 해야 연기공이 뚜렷해집니다. 그냥 말로만은 안 됩니다.

 

  그 다음에 般若心經空은 뭐냐? 반야심경공은요. 분석공도 아니고, 연기공도 아닙니다. 뭐지요? 卽空입니다. 卽 空. 色卽是空 空卽是色아닙니까?

色卽是空입니다. 그대로 공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분석으로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연기기 때문에 공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空” 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 공이냐?”

“아, 이것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것이 있게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그 인연의 세력이 다 하면 결국 공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이것은 반야심경공이 아닙니다. 반야심경을 설명하는데 그렇게 설명하면 안 됩니다.

 

  반야심경공은 연기공이 아닙니다. 卽空입니다. 色卽是空입니다. 그대로 공이지 그것을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라고 해서 이것저것 분해하고 조립해서 공을 설명하면 그것은 더 나쁜 차원이 되어 버립니다.

첫째 分析公. 제일 낮은 차원입니다. 경전에 다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緣起空. 그 다음에 卽空. ←이렇게 세 가지 차원으로 공을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또 이런 기회니까 우리가 한 번 짚고 넘어 가야지요.

 

  佛知是已하고, 부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觀 衆生心欲하사 중생들의 心欲을 觀하시고, 將護之일새. 장차 護之할세.

是故로 不卽爲說一切種智어늘 곧 바로 위해서 一切種智를 설하지 아니하였거늘, 汝等迦葉이 甚爲希有하사 매우 희유하게 여겨서 能知如來가 隨宜說法하야 능히 여래께서 隨宜說法. 편의를 따라서 설법해 가지고서 能信能受.

근기 따라서 이야기해주니까 귀가 솔깃하잖아요. 처음 절에 온 사람들에게 因果이야기해주고, 옛날 큰 스님들 설화 같은 이야기해주면 귀가 솔깃하잖습니까? 그러면 그것으로서 차츰차츰 수준을 높여가는 것이지요. 應器方便이라는 표현도 하지요. 그러니까 能信能受하는 겁니다.

 

  禪道理가 좋다고 처음부터 선도리가지고 덮어놓고 이야기하면 누가 알아듣습니까? 솔직하게 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자기도 별 확신이 없는 소리를 그냥 수준 높은 소리라고 하면 그것이 상대가 믿을 수가 있나요? 여기 보십시오. 能信能受해야 됩니다. 능히 믿고 능히 받아 들여야 됩니다. 그렇다고 계속 수준 낮은 이야기만하고 있어서도 안 되지만, 상대를 감안해서 해야 된다고요.

 

  所以者何오 諸佛世尊의 隨宜說法은 難解難知니라. 수의 설법하는 그 속을 難解難知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호랑이가 왔으니까 네가 울지 말라. 밖에 호랑이가 왔다.” 라고 하는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것은 천하에 쉬운 말이지요. 그 말을 하는 어머니의 속을 모른다 難解難知라. 입니다. 부처님이 무슨 소승교. 아라한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그 말은 수준이 낮아서 이해하기 쉽지만, 그 속을 難解難知라.

 

  ‘부처님의 저 말이 정말 맞는 말인가? 부처님의 실력이 정말 저것뿐인가? 깨달은 것이 저것 모두인가?’ 이것을 모르는 겁니다.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世尊이 隨宜說法하는것은 難解難知라.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 어린아이 울음 그치게 하기 위해서 “밖에 호랑이가 왔다.” 라고 하는 그 어머니의 속을 어린아이가 어찌 알겠습니까? 모른다고요.

우리가 깨달은 사람의 그 경지. 특히 이 대승경전에 나타난 부처님의 깊은 속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약초유품과목(영상강좌 글번 37.)

과목들 다 챙기세요. 이것을 사실은 전통 공부하는 방법대로 하기로 하면, 오늘 공부하는데 까지 과목을 쭉 외워 와서 딱 거기에 끌어다 놔야 이해가 될 것이데... 약초유품과목에 보니까 가, 長行(장항)이 있고, 나, 偈頌이 있지요? 이제 장항이 끝났습니다. 보면 전부 경문에서 보았던 것을 딱 정리를 해놨습니다. ㉮ 頌開譬. ㉯ 頌合譬가 있지요?

 

  開譬는 비유를 열고, 合譬는 법하고 비유를 합해서, 비가 오듯이 부처님의 설법은 이와 같다고 해서 쭉 해놨는데, 제가 시간이 없어서 세세하게 말씀을 못 드렸는데 거기에 보면 중요한 것이 ㄱ, 頌合差別譬. ㄴ, 頌合無差別譬가 있어요. 有差別譬와 無差別譬. 차별비는 어떤 내용이고 무차별비는 어떤 내용이라고 설명이 다 있네요. 어쨌든 그렇게 해서 다 끝났고,

 

  게송에 들어가서는 法說을 게송하고 뒤에 가서 開譬. 合譬. 다 나오지요?

게송에도 그것이 다 나옵니다. 이 내용이 과목 속에 다 이렇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 약초유품 같은 것은 내용이 단순하기 때문에 게송이 아주 딱 들어맞는 뜻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 7강 - 2로 이어집니다. -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대원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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