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애송 동시

[스크랩] [애송 동시 - 제 50 편] 과수원길-박화목

시치 2008. 7. 13. 00:20

[애송 동시 - 제 50 편]

과수원길-박화목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생긋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

 

 
 
▲ 일러스트=윤종태

시평

누군가와 말없이 걷고 싶은 길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 온다// 둘러 봐야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보리밭〉).

박화목 작사 윤용하 작곡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 〈보리밭〉. 6·25때 고향 황해도 해주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박화목(1922~2005) 시인은 1952년 피란지에서 이 시를 완성했다.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보면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뉘 부르는 소리'의 여운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이주민 정서라고 할까. 월남민 박화목의 많은 시들이 향수를 노래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도 같다. "꽃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로 시작되는 〈망향〉이 그렇고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로 끝나는 〈과수원길〉 또한 그러하다. 그에게 고향은 시의 근원이다. 익숙한 것들과 갑자기 결별하게 된 자의 애수는 그의 시를 통해 이후 우리 서정시의 또 다른 자양분이 되었다.

동구 밖 과수원 길에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다. 하얀 꽃잎은 눈송이처럼 날리고 꽃 냄새는 솔솔 불어온다. 이 설정만으로도 이미 모종의 감상은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화목 시인은 이 '서정의 무대'에 두 사람을 마저 추가한다. 이들은 연인이어도 좋고 친구여도 상관없다. 실제 시인의 외갓집 근처 과수원 길을 무대로 했다고 알려진 뒷이야기에는 이 두 사람이 시인과 그의 여동생인 것으로 되어 있다. 누구면 어떠랴. 두 사람이면 된다. 그들에겐 말도 필요 없다. 서로 "얼굴 마주보며 생긋" 웃을 수 있는 한 그들은 말의 경계를 넘어선다.

김공선이 곡을 붙여 가히 국민가요의 반열에 오른 이 시는 60년대 초 정부가 가난한 문인들에게 불하한 불광동 문화촌에서 한 번도 이사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다는 박화목 시인의 정갈하고 고운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유독 맥주를 좋아해 술을 한잔 하는 날이면 고향 해주와 젊은 날 떠돌던 하얼빈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는 그. 시인은 가도 노래는 남는다. 이제 '먼 옛날의 과수원길'은 우리 모두의 꿈의 무대가 되었다. 하얀 꽃잎이 지는 날, 누군가와 얼굴 마주 보며 말없이 그 길을 걷고 싶다. 시의 위력이다.

신수정·문학평론가 /조선일보,2008.7.8

※오늘로 애송 동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연재를 사랑해 주신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출처 : 골든모티브
글쓴이 : 솔체꽃{모티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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