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스크랩] 해인도 / 김선우

시치 2008. 5. 6. 20:53

* 저는 김선우 시인이 남자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라, 김선우 시인을 몰랐습니다.

언젠가 [월간 곰절]에 싣고 싶은 ‘권두시’라며

김 시인과 동향(강릉)의 수필가 한후남 선생께서

‘탑을 돌며’라는 詩를 내미셨을 때도

그 시의 가치를 그냥 ‘좋네요...’로만 수긍하고,

정작 제가 실력(?)을 발휘한 것은

그 시가 실린 칼라엽서 바탕그림의 오류를 발견한 것이었지요.

그것은 꽤 심플한 디자인의 삽화였는데

아쉽게도 탑을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도는

우요삼잡이 좌요삼잡이 된 오류였습니다.

이런 실수는 인쇄상의 기술로는 아주 간단히 해결됩니다.

거꾸로 된 사진을 한번 더 거꾸로 편집하면

다시 바르게 됩니다.

탑을 돌고 도는 그 마음이 방향에 어떠랴마는

그걸 밝히는 그 용렬함이, 

실은 전도몽상일지라도 또한 소임은 소임.


아무려나 진주 출신의 허수경 이후,

나에게 참담함을 다시 상기케 하는

괘씸한 고수를 다시 보게 됨에

나는 문득 분노하게 됩니다.

생물학적인 연령은 제가 훨씬 많지만

발 벗고 따라나서도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경지에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해인도(海印圖)


김선우/시인


그대여 단풍의 기미가 보입니다.

서둘러 산으로 향합니다.

어제는 가야산에 들어 모처럼 푹 잠들었다 깼습니다.

세상살이의 노독이 하룻밤 꿈과 같다면

노독을 풀어 본래의 마음으로 헹구어내는 데에도

실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닌지 모릅니다.

인간이 발명한 근대의 시간 단위는 언제나 한 발 늦습니다.

응혈이 맺히고 풀리는 그 모든

일어남과 사라짐의 순간들이 찰나임을 느낍니다.

찰나와 찰나 사이에 우리가 영원이라 부르는

멈춘 호흡의 순간들 가득합니다.

가득한 채 텅 빈 가을 산의 고요.

그 고요 속에 문득 눈물이 스미기도 하는 것을

오늘은 그저‘가을 탓’이라 하기로 합니다.

무엇이 슬퍼서도 기뻐서도 아니고,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하염없이 장하여

스미는 눈물이니 그대여 심려치 마십시오.


마음이 고단할 때 발이 먼저 찾아들곤 하는

가야산 해인사에는 제가 사랑하는 풍경들이 퍽 많은데,

이번 해인사행에는 막 도착한 선물처럼

해인도가 놓여 있었습니다.

구광루 앞마당에 새롭게 놓여진 해인도를 걸었습니다.

자정 무렵 기도 소리를 들으며 어둠속에서 걷고,

새벽예불 후 어둠이 빛을 머금기 시작하는

바스락거림 속에서 걷고,

청신하다는 말이 딱 맞아 떨어지는

아침햇빛의 생기 속에서 또 걸었습니다.

해인사를 처음 찾았던 이십대에 본 해인도는

제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인장 중 하나였습니다.

절집에 흔한 만卍자 같기도 했지만

글자의 정형을 벗어난 파동이 있고,

비밀의 열쇠를 품은 미로처럼 신비한 도안이면서도

고답하지 않은 심플함과 모던한 느낌이 인상적이었지요.

닫힌듯하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일체가 열린 문인 해인도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몇 번인가 무릎을 쳤습니다.

1300여 년 전 의상 스님이 화엄경의 정수로 빚은

210글자의 법성게.

어느 날 제 눈을 번쩍 뜨게 한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의 

한 꽃송이가 오롯했구요.

원효 스님에 비하면 좀 까탈스러운 학자풍에

모범생처럼만 느껴지던 의상 스님이었는데,

이 법성게도를 보는 순간

그에 대한 편견을 수정하게 되었지요.

학자의 총기와 예술가의 미감이 함께 느껴지는 유쾌함.

완벽하게 아름다운 한 편의 시라고

의상의 법성게를 말할 때

마음이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는 거였어요.


해인사 마당에 해인도가 놓여져 참 기뻤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해인도를 다만 ‘보는’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걸어도 좋고,

마음을 편안하게 비우고 슬렁슬렁 걸어도 좋고,

설치미술을 감상하듯 걸어도 좋겠습니다.

현대의 설치미술이 수동적인 감상의 주체를

능동적인 창조의 주체로 동참하게 하듯이,

보는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경험하는 창조자로

해인도를 걸을 때 세상에서 쌓인 노독이

새로운 상상력의 추임새를 얻는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 겹의 법안法眼이자 인드라의 그물.

내 속의 나들 사이의 틈을 연결하는 도안이면서

텅 빈 고요로 들어가는 문.

입구와 출구가 있으나 실은 들어가 머무는 곳도

나오는 곳도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공간의 체험을 해인도를 걸으며 하였습니다.

당신이 나온 출구가 나의 입구임을,

내가 들어가는 입구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나의 출구임을 느닷없이 느끼는 가을입니다.

전혀 새로운 의미의 앙가주망.

해인도를 걷는 동안 내 몸을 지나간 것들이

가야산 능선마다 법석을 펼쳐둔 가을이니,

그대여 해인도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꽃지는 계절에 해인도 속으로 꽃들 분분 떨어지면

꽃의 얼굴로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단풍 드는 계절에 해인도 속으로

점점홍 단풍 들면 단풍의 얼굴로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 말할 때 참으로 그러함을,

그 마음 고요할 때 참으로 그러함을 알게 되실 겁니다.

해인도 속으로 단풍이 들어와 꽃으로 나갑니다.

출처 : 곰절-성주사
글쓴이 : 교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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