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제목 김륭의 신작 시

시치 2008. 4. 26. 01:35

신차설명회/김륭

 

똥 기저귀찬 젖먹이와 벽에 똥칠하는 할머니 틀니 사이, 애가 둘이라는 첫사랑은 캥거루 홀아비인 나는 낙타 삼겹살집에서 딱 이빨처럼 얼굴을 부딪치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생각이 아파질 것 같은 이승과 교통편 끊길까 걱정되는

저승 사이, 옹알옹알 공터가 있고

 

유모차 한 대 서있습니다

폐 유모차를 수거해 만든 노인들의 보조보행기라고 말하는 분들은

레이싱걸처럼 요염하게 공터를 가로지르는 고양이에게 짧은 치마를 입히고 싶은 거죠

 

지팡이 대신 끌고 가는 빈 유모차가 아닙니다

장바구니로 사용하거나 숨이 차면 간의의자처럼 앉아 쉴 수 있다는 생각은 당장

버리시길,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여자의 폐경이란 뼛속 바람에게 피를 돌리는

난생卵生의 동굴

 

교통편 복잡한 어느 먼 나라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집나간 고양이가 남의 집 아궁이에 새끼를 뱉어내듯

쥐구멍보다 아찔했던 숨구멍에 후-욱 꽃 한 송이 낳는 일

 

저기, 어제 이사 온 젊은 부부는 애완용 강아지를 싣고 산책중이고

집 나온 할머니 한 분 공터에서 출산준비가 한창입니다

 

비로소 산통이 시작된 모양입니다 저기, 생글방글

유모차 한 대 갑니다

                                                    <2008 젊은 시>

브래지어 도난사건/김륭

우리 할머니 브래지어가 없다
첫째 둘째 셋째……………………, 마른 아귀처럼 매달린 자식들에게
쉴새없이 빨린 젖무덤, 젖이 마르면 무덤만 남는다
밥줄마저 바삭바삭 채마밭 햇볕줄기처럼 말라
브래지어 찾으러 가신
할머니, 먼저 가신 할아버지 만나 낮잠 한숨 때렸는지
젖이 돌기 시작한 무덤 속으로
눈 작은 벌레들 기어 들어갔다 햐- 날개 한 벌씩 걸치고 나온다
훌러덩 머리 벗겨진 앞산은 염치도 좋아라
꽃나무들 데리고 젖동냥 다녀오고
게으른 뒷산도 질세라 지난겨울 막혔던 물줄기 콸콸
오줌발로 세우는
봄날

 

A컵일까 C컵일까 죽은 듯 잠든 아내
젖무덤 속이다, 쥐꼬리만한 월급봉투 들고 쳐들어가는
나보다 한발 앞선 놈이 있다
쿵- 사각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진
세 살배기 아들놈
밤새도록
운다

                                       <열린시학 2007년 겨울호>

김륭은 제목과 도입부가 시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다. 할머니의 브래지어를 훔쳐간 이는 첫째, 둘째, 셋째…… 마른 아귀처럼 매달린 자식들이었다. 쉴새없이 젖을 빨아 푹 꺼져버린 할머니의 젖가슴. 그런데 ‘젖이 돌기 시작한 무덤’이니 사건은 사건이다. 꽃나무들 데리고 젖동냥 다녀온 봄날, 생명은 또다시 이 나라 산천의 색깔을 바꾸며 소생하고 부활한다. 시를 살리는 것은 제2연이다. 아내의 젖무덤을 탐하고 싶은 나에 앞서 그 젖을 차지한 쾌씸한 놈- 바로 사각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진 세 살배기 아들놈이다. 한 편 시 속에 인간 생로병사와 인생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다.

                                        <2008 오늘의 좋은 시> 푸른사상

 

오래된 꽃상여/김륭

 

―인자 고마 갈란다

―가면 할 일도 없잖아요

 

아들딸네 사는 아파트를 동물원 구경하듯 두루두루 둘러보신 어머니 가신다 아들이 맞춰준 삼회장치마저고리 곱게 차려입고 큰딸 작은딸 앞 다퉈 찔러주는 노잣돈 쟁여 돌아가신다 택시는 무슨 놈의 택시, 손사래 치는 어머니 꽃가마 기다리는 새색시 같다 서울역에서 KTX 타고 3시간 마을버스 타고 25분 다시 개울물 타고 4분 봉두마을 산25번지 치매할멈 봉창 불빛 보이면 가던 길 멈추고 시든 꽃 다시 피우시겠다

 

달구야 달구야* 서리 맞은 배추밭머리 휑하니 가로질러 어화널 어화너얼

출세한 아들 자랑 착한 며느리자랑 달덩이처럼 이고

휑하니 동네 한 바퀴 돌아보시겠다

어화리 넘자 어화너얼

 

―어머니 자주 올라오세요

―아이고 다신 안 갈란다 멀어도 어지간히 멀어야지

 

*달구야 달구야-하관 때 땅을 단단하게 다진다는 뜻으로 부르는 경남지방의 곡소리

  후렴구가 달구야 달구야로 시작된다.

                                        <시와 사람 2008 봄호>

 

치과에 가십니까?/김륭

 

질겅질겅 껌 씹는 여자 옆모습이 살짝, 불안하다 어제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통을 풍선처럼 입에 물고 내일로 건너가는

여자에게 오늘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빨 같은 것일까

 

치과에 가다 문득, 생각난 선덕이 형 얼굴을 떠올리는 동안

잘 익은 배꼽보다 먼저 궁금해지는 여자의 발가락이 비닐봉지에 담긴

사탕처럼 자꾸 부스럭거렸다

 

문제는 사탕이다 구두밑창에 그림자가 달라붙어 찐득거리는

사탕의 매력은 껌보다 생각이 짧고 단순하다는데 있다

 

술 담배 끊고 사탕이나 물고 산다는 선덕이 형

오늘이 오래 앓아온 치통처럼 모질어 30년 전통의 보람상조회 세일즈맨이 된

예순 둘 늙다리 쫄딱, 망했다

어제는 깜빡 죽을 생각을 하지 못했고 내일은 죽을 맘이 손톱만큼도 없는

누군가의 장례비용을 위해 깨무는

사탕은 무슨 맛일까

 

눈에 뵈는 게 사탕이다 세상은 온통 장밋빛

사탕발림이다 내가 사는 집과 차가 그렇고 가끔씩 칫솔질을 함께 하는

애인 또한 사탕을 사랑으로 오해하며 과일 맛을 풍기는

자일리톨, 입을 더 크게 벌리라는 치과에서 파르르

새로 생긴 눈물을 뽑는다

 

역시 문제는 사탕이다 왕창, 세상이 썩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탕의 매력은 이빨이 발가락보다 부족하지 않다는데 있다

 

어제가 다시 오면 내일을 포기하겠다는 듯

바람의 틀니를 물어다주는 새들, 뾰족한 부리에 금이나 덮어씌울까

입을 쩌-억 벌려놓고 생각했다 선덕이 형은 오늘도

사탕을 깨물까

                                                       <문학 선 2008 봄호>

 

메아리 생산공장 1호점/김륭

 

  식은 밥 한 덩이 물에 말아 입맛 없다 그러면 밥맛으로 먹어요 그러고 밥맛 없다 그러면 입맛으로 먹어요 그러고 앉아 절벽처럼 서로 마주보고 앉아 꾸역꾸역

 

  하루 세 번 땅이 꺼져도 솟아오르는 밥상머리, 나는 그들 사이를 눈치껏 오가다

  지겨워진 가자미 한 마리

 

  고추장에 대가리 푹 박아놓은 멸치 몇 마리 거느리고

  엉금엉금 네 발로 기어 나온 깊고 어둔 그 가슴골짝으로 가만히 날아올라 아가미 쩝쩝

  눈이 오른쪽으로 쏠린 도다리가 되었다가 왼쪽으로 쏠린 넙치도 되었다가

  휴대전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눈물 한 장 바삭 구워내는 것이다

 

  임자 죽기 전에 내가 먼저 가야되는데, 영감 죽기 전에 내가 먼저 가야되는데 손뼉이라도 칠 듯 마주보고 앉아 둥둥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루 세 번 무슨 일이 있어도 마주보고 앉아 무슨 웬수처럼 그러고 앉아

  서울로 부산으로 제 밥그릇 찾아 흩어진 자식들에게 딴전 피듯 메아리를 날리는

  밥상머리에 퉁퉁 눈두덩 부어오른 숟가락 하나 묘비처럼 세워놓고

  꾸벅, 절 한번 올리는 것이다

                                                                                    <시와 사람 2008 봄호>

 

부도난 치부책/김륭

 

 1.

감자밭에서 감자가 고구마밭에서 고구마가 슬슬

떠날 채비를 한다

 

침 발라 넘길 수 없는 책갈피 속에서 밥 먹고 쉬쉬 오줌 누고 똥 누던

어머니 못난 돼지감자 하나, 소불알 같은 고구마 하나 굴러

떼굴떼굴 돌멩이처럼 굴러와 미처 책을 다 읽지 못한

햇살의 눈두덩을 보여주었다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2.

밭고랑에 나앉은 어머니 젖꼭지에 감자 물려 감자밭이다

다리속곳 밑으로 눈 한번 흘길 때마다 감자꽃이다

 

서울 형이 쓰-윽 한번 읽고 갈 때마다 닭 모가지 비틀어지고

추곡 매상이 줄었다 소를 잡아먹고 아버지 아직 마르지도 않은 묏등까지

김이 모락모락, 쥐도 새도 모르게 구워삶은

치부책이다

 

줄담배 뻐끔거리던 형이 호미 가로채더니, 뚝딱

아파트 한 채 캐는 게 아닌가

 

3.

형이 떠난다

 

새로 생긴 아파트주소와 전화번호에

염소처럼 어머니 묶어놓고

 

붕붕거리는 그랜저 트렁크 속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엉덩이 들어올리는

감자들 지지리도 못난

고구마들

 

4.

멀거니 거울이 되려는지 감자밭이 운다

어머니 머리맡 치부책이 샌다

                                              <문학 선 2008 봄호>

 

감나무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다/김륭

 

 

                                                 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며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

                                                 됐지? 너무 잔소리하지 마라

 

감나무 밑에 앉아 체사레 파베세*를 읽는다

시들기 전에 늙어갈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늙어 곱게 늙어

틀니라도 오물거릴 수 있을까

 

세끼 밥상 밑으로 땡감처럼 굴러 떨어졌던 내 얼굴들이

통통 하늘로 튀어 올라 익는다 발갛게 감 깎는 시골영감들에게

양복 한 벌씩 말쑥하게 차려 입히고 싶은

늦가을, 밥 먹듯이 쓰는 유서의 마지막 구절이 고향집 늙은 감나무 가지 끝으로

기어올라 엉뚱하게도 바람의 허벅지 한번 꼬집어보았을 뿐

요절撓折은 전화를 걸어 식사에 초대할 수 없는

죽음의 뒷모습 슬쩍, 감나무가 놓아버린 목을 처마 밑으로 한 번 더 매단

감을 보면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은 기린이 아니라

나란 생각 그리하여 내가, 내 목을 졸라매다는 일은 살생이 아니라 사치라는

곶감도 종교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래도 나보다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나무다, 감나무는

더 이상 굴러 떨어질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며 내동댕이친 내 얼굴을

대꼬챙이나 싸리꼬챙이에 꿰어 경更을 치고 싶겠지만

모든 감이 곶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넥타이를 허리띠로 사용하는

우리 아부지 말씀이다

 

*체사레 파베세-

체사레 파베세는 1950년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스트레가상을 받은 직후 여성 몇 명에게 전화를 걸어 식사에 초대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당신은 성질도 나쁘고 지루해요"라며 초대를 거절했다. 다음날 그는 토리노의 한 호텔 방에서 글 한 줄을 남긴 채 시체로 발견됐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계간 너머 2008 봄호>

 

추파춥스/김륭

 

혼자 밥 먹을 때면 스르륵 떠오르는

얼굴을 달에게 물었다 말이 없었다, 달은 당연히 물어올 줄 알았다는 듯

이젠 지겹다는 듯

 

그리하여 나는, 내 그림자를 독립시켜줄 때가 왔다고 믿는다

담벼락 기어오르던 오줌줄기를 싹둑 자른 다음

하나뿐인 숟가락을 달에게 쥐어주었던 것인데, 엉뚱하게도

그림자를 침대로 사용하는 지상의 모든 것들이 속을 다 파먹어버린

달콤한 뒤통수였을까

 

불을 피우기엔 밑이 너무 그을렸고 펄펄 물을 끓이기엔

금이 너무 많이 간 얼굴, 새로 갈아 신은 양말을 뚫고 나온 발가락처럼

거울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아직도 믿는다, 달에게 사탕을 물리면

그림자가 눈사람처럼 하얗게

빨갛게 파랗게

 

우리는 갑자기 태어났다가

문득 사라지는 것이다

                         <계간 너머 2008 봄호>

 
꽃과 딸에 관한 위험한 독법

♣현대시학 2008 2월호에 발표한 최근 작품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어 조금 수정을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완성도를 떠나 애착이 가는 작품 중의 한편인데다 인터넷상 많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수정한 작품을 윤성택 시인이 홈피 리트머스에 올린 감상평과 함께 다시 올린다. 행여 작품을 퍼간 분들이 있다면 수정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꽃과 딸에 관한 위험한 독법/김륭

 

그러니까, 나는 딸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다

아파트 베란다 마른 빨래처럼 널린 여자들에겐 꽃을 안기고 물을 주었지만

무심했다 딸에게는 둥둥 그저 엉덩이나 두들겨주었을 뿐

발갛게 익은 볼에 벌레 먹은 입이나 맞춰주었을 뿐

 

딸을 꽃으로 읽었다 그러니까, 나는 하나뿐인 너를 만나기도 전에

사랑해버린 것이다 고백컨대 딸에게 떠먹인 밥알과 꾸역꾸역 내가 삼킨 눈물에 관한

뽕짝메들리 같은 묘사와 젖무덤 가득 바람 부풀린 진술로 낳은

한마디 문장을 사랑니처럼 뽑아들게 된 것이다

 

꽃은 늙지 않는다 그러니까, 딸은 바람의 문체로 완성한 꽃이다

딸이 꽃의 뿌리에 발을 담근 것인지 꽃이 딸에게 수갑을 채운 것인지

햇살의 입을 열어 확인할 길 없지만 바람은 언제나

꽁꽁 꽃과 딸을 한데 묶어 피를 돌린다

 

나는 내 품을 떠난 딸이 보고픈 날이면 꽃이 미워진다 한없이

미워져 딸에게 이식한 복사뼈라도 찾아오고 싶은 것인데

그건 곧 깨진 화분 같은 내 몸에서 끓고 있는

피에 관한 이야기

 

그러니까, 나는 널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을 밥 먹듯 할 수 있는 것인데

꽃나무 발등 위에 떨어진 꽃잎처럼 주절주절 흩뜨려놓고 사는 것인데

그럴 때면 눈이 빨간 산토끼처럼 꽃밭에 쪼그려 앉아있는

내 성기를 발견하곤 한다

 

바람이 위험해질 때 새들은 구름을 물어온다 그러니까, 구름은

딸과 꽃이 심겨진 아주 오래된 꽃밭이거나 딸과 내가 함께 덮고 자는 이불이다

갈라선 아내가 키우고 있는 딸에게 모처럼 넣어본 전화를

꽃이 받는 순간의 낭패감이 찡 눈을 찔러오곤 한다

 

그러니까, 나는 딸과 꽃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못 다한 사랑은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 턱밑에 붉은 밑줄을 긋고

잘못 살았다 나는 제대로 늙기도 전에 미치거나 시드는 꽃을

눈물로 읽은 것이다

 

[감상]-윤성택 시인의 다섯번째 이야기 리트머스에서

 

진실의 순간은 영원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진실이 통하지 않는 세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내와 갈라서서 딸을 보내야만 한 화자의 심경이 <꽃>, <피>, <바람>, <구름>으로 애잔하게 표현됩니다. 시 속의 화자는 삶에 있어서 위대하지도 권위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며 자신에게 충실할 뿐입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초라해지고 그러다 낭패감이 밀려오는 시의 흐름을 �다보면 어느새 한 아버지의 쓸쓸한 내면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 어떤 표현보다 가장 아름다운 비유인 <꽃>, 그 상징인 딸이 기록되어 있는 마음의 페이지에는 이렇듯 눈물로 읽히는 날들이 있습니다. 진정성으로 인해 시가 치열하고 깊이가 느껴집니다.

 

사과/김륭

 

사과를 사과나무의 손잡이라고 생각하는 당신 때문에

사과는 썩는다

 

사과는 빠끔 문밖을 한번 내다보았을 뿐인데

몸이 달다 불그스름 달아올라 달의 뒷문을 엿보는 동안 손이 자란다

몰래 숨겨둔 애인 허벅지를 타고 올라

새로 생긴 모텔 손잡이를 감싸 쥐던 손이 독버섯처럼 자라

날개를 펼친다 먹잇감을 찾아 눈 번득이는 날짐승처럼 휘젓던

두 손 호호 불어가며 딴전 피듯

피를 부른다

 

사과가 기다린 것은 손이 아니라 발인데

온통 문이다 질끈, 감아버릴 수도 없는 두 눈마저

낡은 문짝 같아서 사과는 눈치껏 제 몸에 푸른 멍을 들이고

벌레를 키우며 아삭아삭 달 없이 오는 밤의 뼛조각처럼

왼손은 부드럽게 오른손은 단단하게

살을 움켜쥔다 사과는 생각이 못 생긴 모과나

가슴에 털이 난 복숭아가 아닌데

 

사과는 사과나무에게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데

달의 엉덩이를 기어오르는 저 손에 칭칭

붕대를 감아야 하는데

 

이빨이 없다 사과는, 썩는다

나는 쉿! 사과

                         <현대시학 2008 2월호>

 

꽃의 재발견/김륭

 

새봄, 누군가 또 이사를 간다
재개발지구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야 코딱지 후비며 고층아파트로 우뚝 서겠지만
개발될 수 없는 가난을 짊어진 양지전파상 金만복씨도 떠나고

 

흠흠 낡은 가죽소파 하나 버려져 있다
좀더 평수 넓은 집을 궁리하던 궁둥이들이 깨진 화분처럼 올려져 있다
자본주의경제의 작은 밑거름도 될 수 없는 똥 덩어리들 

 

꽃을 먹여 살리는 건 밥이 아니라 똥이어서
공중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로 머리띠 동여매고 뭉개진 발자국들이
궁둥이 두들겨 꽃을 뱉어낸 거지

 

언제부터일까 버리는 것보다 버림받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
푹신푹신했던 소파가죽 찢어발기고
툭, 튀어나온 스프링

 

누군가 버림받은 곳에서만
꽃은 핀다

                       <신생 2007 가을호> -4차(3/4분기) 문예지우수작품 선정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