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 한 외국문학자가 번역한 독일작가 하이너 뮐러(Heiner Muller, 1929~)의 연극 텍스트 ■햄릿 기계■의 한 대목과 김언희의 첫 시집 ■트렁크■(세계사, 1995. 9. 1.) 속의 시편들을 거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읽었다. 우선 섬뜩했다. 이건 정확한 내 독서 체험인데 강력한 에너지를 담고 있는 책들은 그 책읽기의 자리에 어김없이 그의 형제가 될 만한 또 한나의 에너지, 또다른 글이나 책을 내밀한 예인의 통로를 열어 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건 비교적 연대와 같은 것이었다. 전혀 내 의지의 작용과 관계지워지지 않은. 이번의 경우가 역시 또 그랬다. 확인한 바 없지만 하이너 뭘러와 김언희, 이 만남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엉뚱하다. 이른바 그의 등단에도 깊게 관여한 나로서 김언희의 시는 생소한 것이 아니었지만 하이너 뭘러는 생면부지 최초의 만남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보라. 나는 어떤 분석이나 덧말이없이 내 책읽기 속에서의 하이너 뭘러와 김언희의 만남을 그대로 다음에 인용하고자 한다. 사람과 글이 아니라 글과 글들이 서로를 드나드는 엉뚱한 길트기를, 그 비교적 연대를 은밀히 맛보시기 바란다. 다만 이승훈이 김언희의 시들을 해석하면서 <욕망하는 기계>(하이너 뮐러의 텍스트 제목이 ■햄릿 기계■이다.)라는 말로 자본주의 속의 인간들을 정의하고 있었음에 유의하면서.
활씬 벗었어 배때기까지 열어젖혀 놓았어 닭전 골목 평상 위 관능의 닭살 오소소 돋아오른 갓 마흔 나의 누드 헤벌어진 배때기 속에 마늘 대신 쑥 대신 당신 당신을 집어넣고 통째 우겨넣고 끓는 기름의 고요 속으로 투신하고 싶어 자그르르 튀겨지고 싶어, 쉴새없이 가로젓던 대가릴랑 토막쳐 버렸어, 이리 와 당신, 이리 와 배때기째 벌려지는, 이 허기 속으로 -김언희, ■늙은 창녀의 노래 1■, 전문.
오필리어 <합창/햄릿>
나는 오필리어. 강물도 붙잡지 않았던 여자. 교수대 올가미에 매달린 여자. 동맥을 절개한 여자. 약을 과다복용한 여자. 입술 위에는 눈 가스 스토브 안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여자. 어제 난 날 죽이는 일을 중단했다. 나는 혼자다. 내 젖가슴과 내 허벅지와 내 자궁만이 함께 할 뿐. 나는 내 구속의 도구들을 파괴한다. 의자를, 책상을, 침대를, 나는 내 고향이었던 도살의 무대를 부순다. 나는 문들을 부수어 연다. 바람이 그리고 세상의 비명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나는 창문을 산산이 부순다. 나는 피 흐르는 손으로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침대 위에서, 책상 위에서, 의자 위에서, 그리고 바닥에서 나를 필요로 했던 남자들의 사진을 찢어 버린다. 나는 내 감옥에 불을 지른다. 나는 내 옷을 불 속에 던져 넣는다. 나는 내 심장이었던 시계를 내 가슴에서 꺼내 파묻는다. 나는 거리로 나간다. 내 피로 옷을 입고. -하이너 뮐러, ■햄릿 기계■부분.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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