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그 먼 곳에서 전화를 주기도 하고 내가 걸기도 하면서 서로의 내면과 근황을 염탐(그가 내게 보여 주지 않은 대목에 나는 많이 기대고 있다. 그도 그럴까.)하고 있기야 하지만, 지금 멀리 강원도 오지에 가 있는 오규원의 안부가 늘 궁금하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정상인의 사분의 일밖에 안 되는 호흡량을 하고서도 그의 정신력은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다. 놀라운 일이다. 그는 그가 최근 써 가고 있는 ■무릉 일기■(무릉: 그가 가 있는 곳의 이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기라는 말과는 달리 깊이 있는 시론에 유연성을 주고 가쁜 호흡을 고르기 위한 감성적인 일상의 제시에 다름 아닌 대목이긴 하지만, 나는 왜 이 대목에서 그렇게 한참을 머물러야 했는가.
나는 강변 쪽 잔디 위로 가서 가을 햇빛을 반사하는 강물을 보면서 심호흡을 한다. 일반인의 사분의 일에 불과한 나의 호흡량은 약하고 흐리지만, 그러나 나의 육체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내부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가동시킨다. 그 소리도 조그맣게 들린다! 잔디 위에 갖다 둔 간이탁자에 앉아 양광을 받으며 아무 생각 없이, 약간은 멍한 채, 그렇게 쉰다. 강변 쪽에서 그 꽃을 자랑하던 익모초와 달맞이는 이제 마른 줄기로 서 있고, 오히려 언덕 밑 넓은 초지에 군생하는, 여우꼬리 같은 모양의, 낭미초가 무더기로 뭉쳐 서서 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다녀갔는지 이 곳 근처에서 서식하며 먹이를 여기 강에서 구하는 중대백로도 보이지 않고, 강 건너 전답으로 일하러 나온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고추와 잎담배를 다 거둔 뒤라 마을 사람들이 그 곳으로 나올 까닭도 없다. 잠깐 앉아서 존 듯하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햇볕에 목덜미가 따끈거린다. -■작가세계■, 1994. 겨울.
<그가 보였다.> 그러나 이내 나는 딴전을 치고 있었다. 보이는 그를 저만치 두고 그가 바라보았다는 <낭미초狼尾草>가 어떤 것일까만을 생각해 갔다. 식물도감을 찾아보니 그게 다름 아닌 <강아지풀>이었다. 강아지풀이라고 하면 누구나 금방 알 수가 있었을 터인데 왜 낭미초라 했을까. 하긴 이 풀의 모양새는 그가 풀이하고 있듯 여우꼬리 같은 모양의 (한자 뜻대로라면 <낭狼>은 <이리>이니 이리꼬리여야 하는데) 수상穗狀(이삭 모양)을 가지고 있고, 그 영과穎果(벼나 보리처럼 씨가 하나이며 껍질이 단단하게 붙어 있는 열매)들이 거기 촘촘하게 들어앉아 있다. 그리고 이 풀은 혹심한 가뭄의 메마름 속에서도 잘 자라는 구황식물이라고 도감은 풀이하고 있다. 아, 그러고 보면 <강아지풀>이라는 말은 의미로나 이미지로나 거기에 걸맞지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강아지풀은 유희적이며, 소년적이며, 동화적인 유약성 쪽에 더 가까운 이미지를 갖는 말이다. 그런데 누가 강아지풀이라 했을까. 이러함에 대하여 저 예민한 오규원이 반기를 들고 나서서 이렇게 한자어로 <낭미초>라 썼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나는 <염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까지 이른 오규원의 낭미초에 대한 이러한 내 천착은 윗글, 오규원의 ■무릉 일기■의 한 대목을 읽고 받은 내 의식의 물꼬와는 별개의 딴전치기였다. 이미 가슴 바닥에까지, 눈물샘까지 팽팽하게 차오른 감성의 물줄기를 넘치게 하고 싶지 않을 때, 그걸 보이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이렇게 <딴전치기>를 하는 냉혹한 리얼리스트의 모습을 짐짓 지어 보일 때가 있지 않던가. 그는 쓰고 있다.
<일반인의 사분의 일에 불과한 나의 호흡량은 약하고 흐리지만, 그러나 나의 육체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내부의 운동을 지속적으로 가동시킨다. 그 소리도 조그맣게 들린다!>
<조그맣게 들린다>는 말 끝에 찍혀진 감탄부호 가 나를 때린다.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와 경이로 그것을 읽어야 할 것인가. 이 말을 나는 지금 당장 지우고 싶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나약하지 않다. ■무릉 일기■의 또 다른 대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중요한 발견이다.
그 <내면>은 처음부터 사물에 내재한,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표현적인 것이다. 그러나 수사적 인간인 우리가 그렇게 명명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물의 얼굴인 것이다. 이 점을 망각하면서 마치 <내면>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세계를 둘로 나누고 그 편에 서게 된다. 문체는 <그냥 있을 뿐>인 세계와 인간인 우리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수사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찾느냐이다. 궁극적으로 <언어속의 나>는 <수사적인 나>인 까닭이다.
이 견해는 이미지란 수사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낱 공작물로서의 그것만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 사물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의 만남이며 그것의 발견이라는 내 <몸시론>의 일단과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있기야 하지만 전혀 무관한 견해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곰곰이 씹어 볼 만한 말이다. 요즈음 우리 시에 무절제하게 넘치고 있는 수사의 폐단들에 각성을 주기 위해서라도! 그의 호흡량은 사분의 일이 아니다. 이 땅의 시가 지녀야 할 호흡량의 총량에 버금한다. <낭미초>는 <강아지풀>이 아니다. 그렇게 유약한 이미지의 것이 결코 아니다. (199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