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시론

정진규의 시론(8) - 봉인된 시간

시치 2007. 10. 21. 00:30
정진규의 시론(8) - 봉인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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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된 시간의 벽에
시의 사닥다리를 걸쳐 놓고
그 아슬한 꼭대기에 서서
한 조각 별밭 하늘 쏟아질 구멍을 뚫기 위해
옹이 박힌 손으로 내리치는
그대의 망치 소리
지금도 들린다

납뚜껑 같은 하늘을 깨뜨리고
부자유의 이마에
징 박는 노여움
예술가는 그 혼을 위기에 내던져야 한다고
한 마디 벼락의 말
세계의 저쪽에서
탄환처럼 날아와 내 심장에 박힌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생각함>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가림 시인의 ■봉인된 시간 속에서■라는 시의 전문이다(이가림 시집, ■순간의 거울■, 창작과 비평사, 1995. 2.). 우편으로 보내 온 시집 속의 이 시를 읽은 날, 우연찮게 나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보았고, 한 권의 책을 받았다. 때아닌 진눈깨비 속을 파카를 뒤집어쓰고 찾아 온 남진우 시인이 직접 건네주고 돌아간 그의 평론집 ■신성한 숲■(민음사, 1995. 2.)이 그것이었다. 그 책의 표지에도 타르코프스키의 또다른 영화 ■향수■의 한 장면이 흑백으로 자리하고 있어 이채로웠다. 그는 또한 이 책의 권두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묵시록적 시대 글쓰기■에서 타르코프스키를 적극적으로 원용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글을 읽어가다가 ■봉인된 시간■이라는 타르코프스키의 책이 번역으로 나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곧 서사로 달려가 그 책을 내 품에 넣었다. 운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렇게 하나의 사태, 하나의 텍스트가 그것도 다양한 모습으로 한꺼번에 나를 압도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 날은 그렇게 계속 진눈깨비가 내렸다. 나도 하루 종일 비극적으로 질척거렸다. ■희생■의 주인공 알렉산더가 선택한 저 철저한 침묵의 서약,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그러나 너는 침묵하는구나. 너는 말없는 철갑상어 같다.> 아, 그렇게 나의 말들은 더듬거리기 시작했고 자정에 이르러서는 어떤 말 하나도 기억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무서움에 시달렸다. 타르코프스키는 죽은 나무에 양동이로 물을 길어 나르는 소년을 하나의 상징으로, 신화로 설정해 두고 있었지만 그건 이미 예정된 패배의 그것이었으며,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상징의 구조여서 이 영화가 지니는 전체의 깊이와 무게에도 걸맞지 않는 낭만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비가 오는 진흙길을 낡은 자전거를 타고 비틀거리며 찾아간 주인공 알렉산더와 마리아 사이의 관능이 한 구원의 포즈로서 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던 것은 웬일일까.
아무튼 지금 이 시대에 말이란 무엇이며 시란 무엇인가.
<봉인된 시간>. 과연 시는 그 시간의 <봉인>을 떼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인가. 이미 그것은 이 시대에 있어 어리석은 질문에 지나지 않지만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해갈 수 없다. 아직도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은 거기서 정답을 구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적어도 충동의 환희와 매혹 같은 것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일 터인데 그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힘인가, 일순의 놀이인가. 이 시대에 시가 행위해야 할 적극적인 선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가림 시인이 인용하고 있는 대로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가는 그 혼을 위기에 내던져야 한다>는 그것인가.
이 같은 적극적인 질문들에 시달리면서도 또한 적극적인 소련의 영화감독-■희생■을 마지막 작품으로 1986년 세상을 떠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있어 하나의 신선한 <매혹> 그 자체였다. 말이 지니는 원초의 자리에 적어도 내 시선을 돌리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의 내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빠른 글씨로 적혀 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희생■을 제작하면서 떠올렸다는 푸쉬킨의 시 그 몇 대목과 함께.

하늘의 진동 소리 들리고,
별을 헤치며 날아가는 천사,
바닷속 깊은 곳의 거대한 움직임, 땅 끝까지 늘어진 넝쿨의 손길.
그는 내 목 깊숙한 곳에서
입을 벌려 혀를 뽑는다
교만하고 죄 많고 불안한 혀를,
그리고 놀란 입술 사이로
그의 피투성이 손은
현명한 가시, 뱀을 쑤셔 박는다.
내 가슴은 그의 칼에 산산조각 나고
내 팔딱이는 심장은
그가 앗아가 버리고, 구멍 뚫린 상처에 그는
불타는 석탄 덩어리를 밀어 넣는다.

비극적인 영혼들은 또다른 비극적인 영혼들을 끌어당긴다. 그것이 아무리 먼 곳에 있거나 외압적인 부당한 힘에 억눌려 있다 할지라도 마침내 그 곁에 함께 자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운명적인 힘의 운동성을 지니고 있다. 비극적 진실이란 바로 이와 같은 曳引, 또는 牽引 관계의 그것인지도 모른다. 철저히 비극을 비극으로 확인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그렇게 구체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내 집엘 다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