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역사(渤海歷史)에 관하여
양대언(梁大彦)교수
1. 머리말
2. 발해의 흥망성쇠
3. 관련 각 국의 주장
4. 발해고(渤海考)의 고찰
5. 맺는 말
1. 머리말
발해(渤海)의 역사에 관한 연구는 오늘날 관련 각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동북지역(소위 만주라고 부르는 곳) 은 발해역사의 현장이었고 많은 유적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며 그 당시의 생생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중국(中国)의 영토인 이곳은 민족문제 등 예민한 문제들로 인하여 깊은 연구는 이뤄지고 있지만 실제 학계에 발표된 것이 극히 적고 서로의 연구 교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상당히 소홀한 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지역에 약 200년 이상 자리 잡고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국가이었지만 단일민족(単一民族)의 국가가 아니고 잡다한 수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과연 어느 민족이 주축(主軸)이고 어느 민족의 역사에 주안(主眼)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 약속이 되지 못하고 주변의 각국의 주장들이 다 자국(自国)의 역사에 포함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발해는 이곳 중국 동북부 지방에 거대한 왕국을 건설하여 중국의 중원을 지배하던 한족의 국가인 당(唐)과 자웅을 겨루었고 또한 이곳의 잡다한 민족을 복속(服属) 시키면서 한때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들을 정도의 강국으로 등장.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며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국가를 형성했던 기록을 유적유물이 뒷받침하기에 가히 각광(脚光)받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지금 이 지역의 역사학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부단히 연구되고 있지만 어느 민족역사에 포함시켜 심도 있게 그 전모를 밝혀야 하는지는 아직은 많은 난간이 있는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이는 자칫 잘못하면 자국의 역사에 대한 오류와 아울러 국익에 손상을 입히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갖고 시작하여 그 깊은 내용들을 파헤쳐 가면 많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고 또한 역사학자들의 사실을 정확히 보는 눈보다는 자국의 정치적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진실을 요구하기에 역사학자들이 사명감(使命感)을 갖고 올바른 인식과 설득력(説得力) 있는 연구 결과로써 진실이 밝혀져야 하고 또한 이를 인정해 줌으로써 자존심 문제나 정치적 의도를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앞으로 관련국들이 상호 긴밀한 협조로써 깊은 연구 하에 사실을 밝혀야 할 때가 왔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유물 유적을 발굴하고 연구함으로써 별로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줄 안다.
2. 발해의 흥망성쇠
● 국호(国号)
발해는 서기 698년에서 926년까지 227년 간 현 중국의 동북지방과 시베리아의 연해주 일부와 한반도의 북부지역을 무대로 번성했던 나라이다. 발해라는 이름은 713년 당(唐)이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栄)을 발해군왕(渤海君王)으로 봉함으로써 그 국가적 실체(国家的実体)를 공인 해준데서 비롯되었으며 건국초기에는 스스로 진국(震国)이라 선언했고 일본(日本)과의 사신(使臣)을 교환 시에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한 문서(文書)가 일본에 남아 있기도 했다. 즉 그내용은(復高麗之旧居. 有扶余遺俗)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고 하고 있다.
● 전개과정
서기 668년에 한때 중국의 동북부 일대와 한반도의 한강 이북을 지배하면서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던 고구려가 705년 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지배층의 분열로 인하여 멸망하자 이를 신라(新羅)와 연합하여 멸망시킨 당(唐)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키 위하여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設置)했다. 그러나 고구려유민(遺民)들의 저항이 심해 그 치소(治所)를 요동의 신성(新城-지금의 무순)으로 옮겨가 요동지방을 지배하려고 했지만 그곳에 있던 고구려의 유민들 역시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당(唐)에서는 이를 무마해 보고자 서기 677년에 멸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을 안동도독으로 삼아 고구려의 유민을 다스리도록 했지만 보장왕은 무리와 말갈족 등과 내통하여 당(唐)에 대항하고자 하는 음모가 탄로 나자 보장왕이 소환당하고 그의 아들 덕무(徳武)가 안동도독으로 부임함으로써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소위 소고구려국이고 9세기까지 지속되기도 했다. 한편 안동도호부는 지속적인 고구려유민의 반발로 30년 간 끌어오다가 서기 698년에 결국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당(唐)은 동북방의 이민족(소위 오랑캐)들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중시되던 요서지방의 요충지 영주(営州-지금의 朝陽)지방에 고구려 유민 28,000여명을 옮겨 살도록 조치하였고 또한 거란인(契丹人), 말갈인 등 다수의 이민족이 모여 당(唐)의 지배를 받고 살고 있었다. 이때 당(唐)의 영주도독 조홰(趙翽)의 폭정과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거란(契丹)추장 이진충(李尽忠)과 손만영(孫万栄)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켜 영주도독 조홰를 죽이고 이 일대를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고구려의 멸망 후 강제로 이주된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속말말갈)들은 각각 대조영(大祚栄-걸걸중상의 아들)과 걸사비우(乞四比羽)에 이끌리어 영주를 빠져 나와 요하(遼河)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당(唐)의 측천무후(側天武后)가 돌궐족의 도움을 얻어 이진충의 난을 평정하는 한편 이들을 무마코자 대조영(大祚栄)을 진국공(震国公) 걸사비우(乞四比羽)를 허국공(許国公)에 봉하여 회유하고자 했으나 이를 듣지 않았던 것이다. 당(唐)은 이진충의 난을 1년 만에 평정하고 서기 698년에 군사를 보내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추격했다. 이때 이진충의 부하로써 당(唐)에 항복한 거란인(契丹人)장군 이해고(李偕固)가 지휘하는 대조영군을 추격하던 군에 의하여 걸사비우가 죽고 그의 부대가 격파당하자 대조영(大祚栄)이 말갈인들을 흡수하여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重像)과 함께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천문령(天門嶺) 전투에서 당(唐)의 진압군인 이해고(李偕固)부대를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고 이해고는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하여 자살했다. 한편 대조영(大祚栄)의 부대는 당시 고구려의 계루부의 옛 땅이었던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 인근 동모산(육정산)근처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니 그때는 서기 698년 고구려가 멸망된 후 30년이 되는 해이고 현재의 오동산성과 성산자산성이 그 유지로 밝혀졌다. 이에 당(唐)은 발해의 건국을 막을 길이 없어 이를 기정 사실화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요서(遼西)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 등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요하유역과 요하동쪽 동북일대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사실상 어렵게 되자 서기 705년에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보내어 진(震)의 건국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어서 서기 713년에는 당(唐)에서 최흔(崔忻)을 보내어 대조영(大祚栄)을 정식으로 발해군왕(渤海君王)에 봉하고 그의 아들 대무예(후에 무왕)을 계루군왕(桂婁君王)으로 삼아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으므로 하여 국호를 발해(渤海)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대조영은 요서지방에까지 세력을 갖고 있던 돌궐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가 동시에 당(唐)과 평화적인 교류도 계속 유지함으로써 안정과 번영의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서기 719년 대조영을 이은 대무예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2대왕 무왕(武王)으로써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고 국력을 신장하여 영토를 확장하는데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동북지역 일대와 연해주 남부지역이 대부분 그 판도에 편입된 시기가 바로 이 때였다. 발해가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자 신라에서는 이를 염려한 나머지 서기 721년에 강릉 이북지역에 장성을 쌓아 침략에 대비했고 한편 발해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흑룡강 하류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흑수말갈은 위협을 느끼고 당과 연계를 통하여 발해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하므로, 발해의 급속한 팽창에 경계를 게으르지 않았던 당도 흑수말갈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서기 726년에 이 지역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파견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위기가 고조되자 무왕은 친아우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정벌토록 명령했다. 그러나 당(唐)과의 충돌 가능성을 예측한 왕제 대문예는 정벌의 불가론을 계속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이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로 하여금 정벌군의 총수에서 파면하고 대신 사람을 보내자 당(唐)에 망명하여 당(唐)에서는 우대 좌효기 장군(左驍騎将軍)에 임명하므로 발해에서는 본국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자 당(唐)이 이를 거절하므로 양국의 대립. 발해는 결국 서기 732년에 거란과 합세하여 그 해 9月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당의 등주(登州-산동성 봉래)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자 당에 망명한 대문예를 시켜 발해를 공격토록 하고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남쪽을 공격하는 등 당. 신라의 연합군의 발해공격이라는 무력대결로 발전했다. 그래서 서기 732-733년에 걸친 발해 대 나, 당 연합군의 대결은 뚜렷한 승패도 없이 계속되다가 서기 737년에 대흠무가 즉위하여 제3대왕으로 되자 평화외교정책을 펼쳐 이를 해소시켰다. 문왕은 즉위하자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바꾸고 서기 750년대 전반에는 도읍을 중경으로부터 상경, 용천부(현 동경성)으로 옮겨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교역의 증대에 온 힘을 드렸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당으로부터 당례(唐礼) 십육국춘추 등의 서적을 비롯하여 각종 문물을 받아드려 문화의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당의 절도사 안록산, 이정기 등 당의 지방 군웅들을 매개로 한 교역을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신라, 거란 등과도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
또한 서기 793년에 문왕이 사망하고 뒤를 성왕, 강왕, 정왕, 회왕, 간왕 등이 뒤를 이었으나 짧은 재위 기간으로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으며, 서기 818년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 4세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즉위하니 이가 곧 10대 왕이며 즉위 해 연호를 건흥으로 고치고 나라의 분위기를 새롭게 일신하여 강력한 국가를 건설토록 했다. 이때 싱카이호(興凱湖)북쪽의 말갈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력도 장악했으며 당(唐)의 지배력이 약화된 요하 일대로 진출해 소고구려를 영역으로 넓히면서 강성대국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3경(三京)에 서경(西京)과 남경(南京)이 추가되고 흑룡강 하류지역과 요동지방에 새로운 주가 설치되어 5경(五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어 당(唐)은 당시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国)”으로 불렀다. 서기 830년 선왕이 사망한 후 대이진, 대건황, 대현석, 대위해가 그 뒤를 이었고 대인선이 발해의 마지막 왕인 15대 왕으로 즉위했으나 기록이 단편적으로 전하여 11대왕 대이진 이후의 즉위 년, 사망 년, 왕계 등은 분명하지 않다. 발해가 10대 선왕 이후 점차 쇠퇴기에 들어가자 요하 상류지대와 동 몽골지역을 발판으로 성장하던 거란(契丹)은 9세기 후반부터 발해의 요동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서기 916년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가 료(遼)를 세우고 상경(上京)을 수도로 정하고 중원으로 진출을 기하면서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발해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 해 왔다. 서기 925년 12월에서 926년 1월까지 2개월에 걸친 대공세에 약화된 국력의 발해는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926년 1월14일 수도 상경용천부가 함락됨으로써 멸망되므로써 15대, 227년간의 발해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지는 것은 없지만 당시 내부 분열이 심해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이에 거란은 발해의 옛땅에 동단국(東丹国)을 세워 거란태조 이율야보기의 맏아들 배(倍)가 다스리게 했지만 거란의 중원경략에 역점을 두고 있으므로 인하여 소홀해지자 발해 유민들의 조직적인 저항으로 인하여 서기 928년 거점을 홀한성(상경용천부)에서 동평(東平-지금의 요양)으로 옮기면서 발해유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지만, 발해유민들은 12세기 초까지 200여 년 간 곳곳에서 저항을 계속했고 일부 인원은 서기 1117년까지 30여차례에 걸쳐 20여만의 사람들이 고려에 망명했다.
* 민족의구성(民族構成)
사회의 구성은 고구려인, 말갈인이 주체가 되어 동북쪽의 여러 종족을 합쳐 세운 다민족국가였다. 일본의 역사서(유취국사---類聚国史)에 의하면 발해는 토인(土人)으로 불리는 소수의 고구려 계가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고 말갈계의 주민이 피지배층의 다수를 점한 나라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실제로 당시 일본에 내왕한 사신과 그 수행원가운데 말갈계로 보이는 이름을 사용한 인물은 수행원 6명뿐이고 정사, 부사는 모두 고구려계인 한어식 성명이 확인된바 있다. 남송의 홍호(洪皓)가 저술한 송막기문(松漠紀聞)에서는 “발해의 유력한 성씨(姓氏)는 고(高), 장(張), 양(楊), 두(竇), 오(烏), 이(李) 등을 들고 부곡(部曲)과 노비 및 성씨가 없는 자는 모두 주인을 따른다”하여 고구려계 및 소수의 말갈족을 지배층으로 하고 다수의 말갈족과 기타 종족을 피지배층으로 하는 복합민족국가였음을 알 수가 있다.
성립기의 이러한 종족적, 계층적 구별이 점차 완화되어 10대 선왕(宣王)대에는 이를 극복했기 때문에 전성기를 이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멸망과 함께 다수의 말갈계는 다시금 고유의 부락별, 부족별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은 후에 여진족의 주체가 되었으며 금(金)과 후금(清)을 수립한 종족이 되었던 것이다. 기타의 발해인들은 거란(契丹), 고려, 송(宋) 등으로 흩어져 그들의 일부로 동화됨으로써 소멸되었다고 볼 수 있다.
● 행정제도
건국당시의 당(唐)과 주변 제 민족과의 대립시기를 지나 당(唐)과 평화관계를 수립한 이후 왕족, 귀족의 자제들을 유학생으로 선발, 당(唐)에 보내어 문물을 받아드리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행정제도, 도성건축, 문화활동의 여러 측면에서 당의 영향을 받았다. 중앙관제인 3성6부(三省六部), 1대7시(一代七時), 1원1감(一院一監)제도는 당의 제도를 필요에 따라 구성했던 것이며 지방제도인 5경16부62주제도, 부-주-현-의 지방장관에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승(懸承)을 둔 것도 역시 당의 제도에 기초한 변형이다. 당의 6부에 해당하는 충, 인, 의, 예, 지, 신(忠, 仁, 義, 禮, 智, 信)의 6부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관부의 주요기능과 구성 등에서는 기본적으로 당의 것을 본떠서 독자적으로 편성 운용했다고 볼 수 있다.
3성 6부 |
5경 15부 |
|
발해 |
당의제도 |
5경 |
15부 |
3성 |
선조성
중대성
정당성 |
문하성
중서성
상서성 |
상경
증경
동경
남경
서경
|
용천부(숙신고지)
현덕부
용원부(예맥고지)
남해부(옥저고지)
압록부(고구려고지)
장령부
부여부(부여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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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힐부
정리부(읍주고지)
안변부
솔번부(솔번고지)
동평부(불넉고지)
철리부(철리고지)
회원부(월회고지)
안원부 |
6부 |
충부
인부
의부
지부
예부
신부 |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 |
● 산업과 경제
건국초기부터 현 동북3성의 동부지역의 천연자원의 개발이용과 고구려 이래의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주변국들과의 대외교역을 확대하여 국력증대를 기하였던 것이다. 주로 생산되는 명품가운데서는 위성(位城)의 철, 현주(顕州)의 포(布), 노주(盧洲)의 벼, 옥주(玉州)의 면(綿) 등이 있었으며 특히 위성은 중경현덕부 내의 가장 큰 현성으로써 제철산업의 중심지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의 발달된 기술을 이어받아 제철기술이 매우 높은 수준 이였으며 발해 멸망 후 거란은 발해유민들을 주요 철 생산지에 집단 이주시켜 제철산업에 종사시켰다. 벼의 생산으로 유명한 노주도 중경현덕부의 산하 6주 가운데 하나로 해란강 유역 평야지대로서 오늘날 화룡시 용성벌로 추정되는바 이를 통하여 보면 중경현덕부(지금의 -서성진)에 속한 지역에서 벼, 포, 철 등이 생산되므로 인하여 경제의 중심지였던 것 같다.
옥주의 면은 동예시대 이래의 양잠기술이 발해대까지 이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위와 같은 발해의 특산품들은 당, 일본 등과 교역물로 삼아 나라의 부를 증대시키는데 이용했고 대당 교역이 매우 활발하여 공식적인 외교사절을 통한 교역이 총 132회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산동반도의 등주와 청주에는 발해 사신을 위한 발해관이 설치되어 교역중계지로서 기능을 겸하기도 했다.
관사(官私)무역을 겸한 발해 사신의 빈번한 왕래와 대상국인 일본에 경제적 부담을 주어 한때 일본은 대 발해교역의 제한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도(新羅道)와 거란도(契丹道)를 이용하여 대 신라, 대 거란 교역도 있었을 것이나 구체적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다.
● 문화
통일신라와 함께 높은 문화수준을 자랑했던 발해의 문화는 나라의 영토를 상실하면서 많은 민족의 각축장으로 되면서 대부분의 문화유산을 어떤 책임 있는 민족의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많은 문화유산이 후세에 전할 수가 없어 아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전하고 있는 것은 한문(漢文)으로 씌어진 외교문서로써 약간의 산문, 몇 편의 한시(漢詩), 문왕의 딸 정효공주(貞孝公主)묘에서 발견된 정효공주와 정혜공주(貞恵公主)비문 정도밖에는 별다른 문헌 자료를 남기지 않아 역사뿐 아니라 문화 등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한국 측 문헌이 아니고 중국과 일본측 문헌이며 한국 측 문헌에는 관련기록조차 거의 찾을 수가 없다.
발해의 시인가운데 이름과 작품이 남아있는 사람으로는 양태사(楊泰師), 왕효렴(王孝濂), 석인정(释仁貞), 정소(貞素)등이 있다. 이들의 작품은 주로 일본에 사신으로 연회석에서의 의례적인 화답사가 대부분이고, 그 가운데 참신하고 창의적인 사상의 전개는 발해시인들의 높은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들은 김육불의 발해국(渤海国) 지장편(志長編)에 실려있다.
그러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발해 역시 한문학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라의 이두문과 같은 한자를 빌려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활달한 기풍의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위에 수준 높은 당문화를 접목시킨 특유의 북방민족의 세련된 문화를 유적, 유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경용천부가 있던 동경성(東京城) 유적의 발굴 시 출토된 대형 석등과 귀면와(鬼面瓦), 순금제 허리띠 등은 발해 문화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발해는 당시 동아시아의 지배적 종교였던 불교를 범국가적으로 받아들여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상경, 동경 등 주요 도시의 유적에서 수개의 절터가 발견된바 있으며 고구려의 양식을 계승한 많은 불상들이 수습되였던 것이다. 3대문왕의 존호는 불교적 색채가 있는 대흥보력효감금륜경법대왕(大興宝暦孝感金輪経法大王)이였으며 대당(対唐)사절 가운데는 승려들이 동행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한편 상경 유지에서는 해독이 곤란한 글자가 새겨진 기와쪽이 다수 발견 되였지만 여기에 기록된 문자가 과연 발해문자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3. 관련 각 국의 주장
● 역사서의 연구 방향
발해사의 연구는 문헌자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건국자, 영역, 사회의 구성요소 등과 같은 기초적인 분야부터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승휴(李承休)가 쓴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건국자 대조영을 고구려의 유장(遺将)으로 단정하고 발해의 역사를 고구려역사의 연장으로 본 이래 유득공(柳得恭), 정약용(丁若鏞), 한진서(韓鎮書)등 역대 사가(史家)들은 한민족 역사의 일부로 서술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일부 성리학자나 실학자 중에서는 발해사를 한민족역사에 포함시킴이 옳지 않다고 한 경우도 있었다. 이후 대체적인 흐름은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근래에 와서는 유득공(柳得恭)이 발해고(渤海考)에서 밝혔던 “남북시대론”이 일반화 되고 있다. 즉 발해를 북국으로 통일 신라를 설정하는 “남북국시대론”은 북한의 역사서에서도 수용되고 있으며 남한의 주요 역사서에서도 받아드려지고 있다.
● 관련 각 국의 주장
‧ 일본측의 관점
일본학계에서는 건국자 대조영을 말갈계의 인물로 보고 있으며 주민 대부분이 말갈계임을 들어 발해를 그들이 세웠던 만주국의 왕조로 보고 발해사를 한민족 역사체계에서 분리시켜 남만주 지역이였던 동북삼성의 남부지역과 한반도의 북부지역의 역사를 소위 만주사로 정리하려했던 “만선사관(満鮮史観)”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시각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 러시아 주장
발해영토의 일부였던 연해주 남부를 차지한 러시아에서는 발해가 문화면에서는 고구려, 신라와 가까우나 어디까지나 지배세력은 속말말갈(粟末靺鞨)이였다고 하여 속말말갈의 본거지인 지역이 현재자국의 영토이니 자국의 지방역사 내지 소수민족사의 일부로 취급하려 하고 있다.
‧ 중국측 주장
한편 발해의 영토였던 지역 대부분을 차지한 중국은 발해는 속말말갈이 주체가 되고 기타의 말갈족과 읍루(挹婁) 부여(夫余) 예맥(濊貊) 옥저 계통의 여러 종족, 고구려 유민 등이 이에 합류하여 세워진 나라고 보고 또 발해가 멸망 후 주민의 대부분이 중국의 각지로 옮겨가 한족(漢族)에 동화 되였으므로 당(唐)의 지방정권으로 고정시켜 거론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는 실정임.
이와 같이 중국 측으로서는 많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바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가장 수가 적은 민족인 허저족(赫哲族)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 바로 속말말갈의 지역인 흑룡강과 송화강 하류가 만나는 흑룡강성 동강시(同江市) 지역인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들의 조상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발해를 건국시킨 대조영 장군이라고 공공연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공교롭게도 우리 조선족과 풍속습관 등이 거의 비슷하고 얼굴 생김도 너무나 흡사하기에 앞으로 연구대상이 될 것 같다.
4. 발해고의 고찰
조선후기 21대왕 영조, 22대왕 정조대의 실학자인 유득공(柳得恭)이 쓴 발해의 역사책으로써 1784년(22대 정조8)에 저술한 한민족 최초의 발해역사서이다.
이 책을 편찬한 동기는 직접 언급이 되지 않았지만 서문 중간중간에서 이 지역을 상실함으로써 조선이 약소국이 되고 선비들의 눈과 귀가 막히게 되었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있다. 즉 일국의 흥망의 계기를 지리적 요인에 두고 있다는 것이 특징인데 그가 발해사에 주목한 것도 이런 인식이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되는바 그는 발해의 땅은 부여(夫余) 고구려로 이어진 우리 영토였으며 건국자 대조영(大祚栄)은 고구려인 이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는 남북국 시대이며, 고려는 마땅히 남북국사를 편찬해야 했는데, 한반도 지역에만 집착하여 북쪽의 지역을 그대로 버렸다고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 그는 발해가 망한 후 이 지역에는 여진과 거란이 들어 왔는데, 고려정부가 급히 발해유민을 통하여 발해사를 편찬하여 이 지역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한사람의 장군만 보내었어도 쉽게 토문(土門) 이북과 압록강 이서 지역을 장악했을 것이라 했다.
체제는 군고(君考), 신고(臣考), 지리고(地理考), 직관고(職官考), 의장고(儀章考), 물산고(物産考), 국어고(国語考), 국서고(国書考), 속국고(属国考)의 구고(九考)로 구성했다.
정사(政史)의 세가전지(世家传志)의 형식을 딴것이라 분량은 많지 않으며 의장고 이하는 더욱 간략한데 이는 자료의 부족탓이였을 것이다. 그는 수십만 이상의 발해 유민이 고려에 귀순해 왔음에도 고려가 발해의 자료를 보존하지 않아 문헌이 없어져 버렸음을 크게 한탄하고 있다. 또한 사(史)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도 자료가 부족하여 역사서로써 손색이 있었음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한다. 책의 서두에서 인용된 역사서를 나열해 놓았는데 <삼국사기>, <고려사> 등 우리 민족의 역사서와 당서(唐書), 오대사(五代史), 요사(遼史), 송사(宋史), 일본일사(日本逸史), 속일본기, 대명일통지(大明一統誌), 성경통지(盛京通誌), 문헌통고, 통전(通典), 만성통보(万姓統譜) 등 22종의 책자를 참조했다 밝히고 있으며 각 고(考)마다 마지막에 안(按)이라 하여 큰 사실에 대한 자료비판과 고증을 달았다. 즉 군고(君考) 역대왕의 약전과 사적이다.
이는 처음 대조영의 아버지 진국공(震国公)부터 시작하였는데 그 진국공은 이름은 걸걸중상이고 속말말갈인으로 고구려에 귀순한 사람이라고 기술하여 놓았다. 그리고 신고(臣考) 열전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약 80여명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짧은 기록들이기는 하지만 사실(史実)을 간략하게 기록하였으나 주자학적으로 가치평가나 사론은 없다.
<지리>는 5경 15부 62주를 신당서와 청일통지에 소개된 내용을 그대로 기록했고 지명마다 저자의 고증은 붙이지 않았으며 마지막에 5경의 위치와 발해와 신라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간단한 비평과 고증을 했다. <의장고>는 공복제도, <물산>은 토산물이며, <국어>는 발해의 칭호로 왕을 가독부(可毒夫) 성왕(聖王) 기하(基下) 명(命)을 교(教) 왕의 부친을 노왕(老王)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서>는 무왕, 문왕이 일본에 보낸 것이고 <속국>은 정안국(定安国)에 관한 것이다.
5. 맺는 말
이상의 사실(史実)들로 미루어 보아 한때 현 중국의 동북삼성 지역의 대부분과 시베리아 연해주 일대 및 한반도 북부지역을 지배했던 제국으로써 중국 중원의 거대한 제국 당(唐)과 초기에는 무력으로써 대결하여 당(唐)의 산동성 덩저우(登州)를 공격하여 점령하는가 하면 당을 편드는 연해주의 흑수말갈을 정복했고 한때 나 당 연합세력을 무찌르는 무력으로 대결하여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후 당(唐)으로부터 화친책을 권유받고 당과 관계를 정상화하여 당의 문물이 수입되고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므로 사신과 대당유학생이 무수히 파견 되였으며 빈공과(당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치른 과거시험)에 많은 합격자가 배출되는 등 발해의 문화는 크게 발전되어 갔다.
또한 내부의 국가제도가 정비되고 독특한 발해문화의 창출을 보게 되므로 인하여 당(唐)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国)이란 칭송을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러한 발전에 기초한 자부심은 발해로 하여금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는바 고왕은 천통(天統), 무왕의 인안(仁安), 문왕의 대흥(大興), 성왕의 중흥(中興) 등 발해에서는 왕마다 독자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당(唐)과 대등한 지위를 가진 국가의 위상을 자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종래 우리 역사에서 보면 표면적으로 중국의 제후(諸候)국 형식을 띠는 대신 경제, 문화면에서 실리를 취하는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외교양식에 비추어 국력이 강해져서 중국을 의식할 필요가 없거나 자주성을 특별히 강조할 때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던 점 등으로 보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이런 찬란한 역사를 지닌 발해가 고구려의 고토(故土)에서 대부분의 고구려의 유민을 흡수하여 건립된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사실로 고구려의 연장으로 보아 오는 터이다.
● 우선 발해의 사회구성을 보면 고구려 유민들이 지배계층을 이루고 있었고 말갈족이 피지배계층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즉 일본의 역사서인 유취국사(類聚国史)에서는 「발해의 백성에는 말갈인이 많고 토인(土人-고구려 유민)이 적다」고 하면서 「모두 토인(土人)이 촌장이 된다고 하여 이를 증명해주고 있으며 또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쓴 송막기문(松漠紀聞)에는 발해의 유력 귀족의 성(姓)으로 「고(高)장(張)양(楊)오(烏)이(李)」씨가 기록되어 있고 전하는 발해인의 이름 중에는 대씨(大氏) 다음으로 고씨(高氏)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고씨(高氏)들은 거의가 고구려계 사람들로서 발해가 고구려 유민들을 주축으로 세워진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다.
● 발해가 건국 초엽인 서기 727년에 일본에 국서(国書)를 보내 교섭 시 국호를 진국(震国)이나 발해(渤海)라고 하지 않고 (復高麗之旧居. 有扶余遺俗)에서처럼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려(고구려)라고 호칭을 사용했던 기록이 있다.
● 신라에서도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記)」등에 보이는 바와 같이 발해를 고구려 후예들이 세운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 고구려가 망하고 난 후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손자 고진(高震)은 그의 묘지명을 스스로 발해인이라고 쓴 적이 있고
● 삼국사기(三国史記)와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글에 발해를 북국(北国)이라 지칭하는 대목 있어 신라가 발해를 북국으로 호칭한데에 대한 발해는 신라를 남국(南国)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됨으로 인하여 이는 단순한 방위개념이 아닌 동일민족의 한 부분이라 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었을 것이란 데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조선 후기인 1784년에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에 의하여 쓰여진 발해고(渤海考)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인식하고 고려가 남북국사를 쓰지 않았던 것을 비판한 바 있으며
● 조선 후기인 1864년에 김정호(金正浩)도 대동지지(大東地誌)에서 발해가 고구려 옛 땅을 이어받아 신라와 더불어 200여년 간 남북국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 또한 일제시대에는 장도빈(張道斌) 안곽(安廓) 등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남북국, 또는 남북조라는 용어가 사용 되였고, 해방 후 북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박시형, 주영헌 등이 발해사를 고구려 계승사라는 입장에서 연구하였다.
반면 조금 석연치 않은 대목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栄)은 걸걸중상(乞乞重像 )의 아들이며 말갈인으로써 고구려에 귀화한 사람이라고 유득공의 발해고(渤海考)에서 밝히고 있으며 걸걸중상이란 고구려의 성명은 없고 영주에서 함께 탈출했던 말갈의 장군 걸사비우(乞四比羽)와는 같은 종족으로 추정된바 있다.
● 발해는 당(唐) 거란(契丹) 돌궐, 일본 등과는 국교를 맺고 있었지만 신라와는 200년 간이나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민간교류는 흔적이 있지만 국교를 수립한 적이 없고 신라에서 국경지대에 축성하여 발해의 침입을 예방했던 기록이 있다는 점
● 또한 발해와 신라는 당(唐)에 대한 외교상 서로의 우위를 점하고저 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는 점
● 한편 신라측 기록에 의하면 발해를 말갈국가로 보기도 하고 때로는 고구려 유민국가로 보기도 하는 양면성을 나타냈는데 이는 사회구조의 이중성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서기 926년에 멸망한 후 발해는 200여년 간 끈질긴 독립투쟁을 했지만 고려가 그들을 도운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고 멸망 후 30여 차례에 걸쳐 수 만명의 망명객들이 있었기에 많은 기록들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인데 오늘날 우리 한민족 역사에 기록이 누락된 점이 못내 아쉽고 우리가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로 미루어 발해사에 대한 인식을 우리 한민족의 남북한을 비롯해서 관련국가들 사이에 역사적,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장하고 있는 한민족 역사 편입여부와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은 앞으로 사료 및 유적유물의 발굴과 연구 등을 더욱 심도 있게 전개함으로써 수수께끼가 풀릴 것으로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