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四郡)] 조선 세종 때 서북방면의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국방상 요지.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4군을 말한다. 서북방면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經略)은 고려 말에 상당한 진척을 보여 강 하류인 서북방면은 거의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부터 이 지역에 대한 개척은 더욱 진척되어, 태종 16년(1416) 지금의 중강진(中江鎭) 부근에 여연군(지금의 慈城郡 閭延面)을 설치함으로써 4군의 설치가 비롯되었다. 세종 때 이르러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세종 15년(1433)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김효성(金孝誠)을 도진무(都鎭無)로 삼아 황해도·평안도의 병사 1만 5000여 명으로 이를 정벌케 하여, 강계부와 여연군의 중간 지역인 자작(慈作:慈城)에 성을 쌓고 자성군을 설치하였다. 세종 22년(1440) 여연군 동방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茂昌縣)을 설치하고 세종 24년(1442) 군으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여연·자성의 중간지점인 우예보(虞芮堡)에 우예군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사군의 설치를 보게 되어 동북의 육진(六鎭)과 아울러 조선의 북경(北境)은 두만강·압록강 상류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육진(六鎭)]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 여진족(女眞族) 침입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 지역에 설치한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여섯 진. 이 방면의 개척은 고려 말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어, 개국 초 조선의 영역은 두만강 하류까지 이르고 있었다. 태종 때 경원·경성에 무역소를 두어 여진족에게 교역 편의를 제공하였으나, 태종 9년(1409) 경원부를 중심으로 하여 우디하[兀狄哈]의 내습이 잦아지자 경원에서 경성으로 부를 옮기고, 경성을 여진족 방어의 요충지로 삼았다. 그러나 태종 10년(1410) 경원부를 중심으로 우디거족 등의 내습이 잦아지자, 다음해 부(府)를 폐지하고 부거(富居;지금의 鏡城郡)로 옮겼다. 그 뒤 얼마간 부령 이북은 여진족에게 방치되었고, 세종 때에 와서도 내습이 끊이지 않았다. 세종 15년(1433) 여진족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적극적인 북진정책에 나섰다. 이듬해 6진의 설치를 시작, 세종 24년(1442) 훈융(訓戎;慶源北方)에서 독산연대(禿山烟臺;會寧西方)까지 장성을 쌓고 석막에 부령부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다. 그 뒤 여진족은 서방쪽으로 이주하였다. 6진에 각도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개척, 조선의 영역은 장성 밖 일부 지역을 제외한 두만강 이남 전역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