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모음

[스크랩] 돼지에 관한 시 모음

시치 2007. 1. 7. 23:36

봄날/송찬호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 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네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더없이 향기로웠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린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아왔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권혁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

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문학세계사, 2001)

 

 

 

돼지를 꿈꾸며/이성목

 

 

돼지가 되어 살아보고 싶다.

 

돼지로 살다가 단 한 번

갖은 양념에 절어 보는 갈비며 삼겹살

저 뜨거운 불판에 노릿하게 구워 먹히는

기름진 황천길이나 구경하고

때로는 컴컴한 비육 우리에 갇혀

디룩디룩 찌는 살에 한 세상 까맣게 잊고도 살다가

 

돼지가 되어 죽어 보고 싶다.

 

정수리 곰배 한 대에 비명횡사하더라도

내가 갈긴 똥물에 코를 처박고 말더라도

이 기다림의 뒷날

저팔계 같은 쇠발톱 하나 쥘 수 있다면

나날이 싸움이라면

 

-시집<남자를 주겠다>(모아드림, 1999)

 

 

 

종돈/함민복

 


불알이 심장보다 커지면서

나는 섹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에 한 번씩 모돈들의 돈사로 갑니다

모돈들은 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일제히 일어나 오줌을 쌉니다

 

주인은 모돈의 엉덩이를 손호미로 눌러보고

뒷다리에 힘주는 놈을 케이지에서 꺼내 놓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짓을, 지긋지긋한, 생명부지를 위해

 

나는 매일 운동을 합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여

모돈이 내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나의 생은 끝

 

내 옆 케이지에서 나와 같은 생을 살아야 할

어린 종돈이 철없이 욕망을 키우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는 그분을 위해 묵은 자지를 물려줄 것입니다

 

불알이 심장보다 커지면서

나는 내 운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세계사,2002)

 

 


돼지/안도현 

 


저 돼지 한마리

멱살 잡힌 채 정육점 입구까지 끌려온 돼지 한 마리

구차한 기색이란 없다

오히려 당당해 보인다

꼭꼭 닫아두었던 가슴 열어제치고

먹는 데 골몰하던 거추장스런 큰 머리 떼어내고

다시는 기어다니지 않겠다고 발목도 떼어내고

올림픽 높이뛰기 선수처럼

뛰어오른다 경쾌하게

이 못된 세상 박차고 뛰어 오른다

꿀꿀거리지도 않는다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현대문학북스)

 

 


돼지 관찰/테드 휴즈(1930~ )

 


돼지가 죽은 채 손수레에 누워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세 사람 만큼의 무게가 나갔다고 한다.

연분홍빛 하얀 속눈썹을 가진 두 눈은 감겨 있다.

다리는 쭉 뻗은 채.

 

죽어 있는 그 무게와 살찐 연분홍빛 덩치는

그저 죽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생물보다 한층 더 못했다.

밀부대자루 같았다.

 

나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것을 탁 쳤다.

죽은 사람들을 모욕할 때, 무덤 위를 걸을 때

사람은 죄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이 돼지는

나를 꾸짖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죽어 있었다. 그저

한 덩어리의 비계와 고기일 뿐.

그 최후의 위엄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은 재미있는 모습도 아니었다.

 

이제 연민을 느끼기에는 지나치게 죽어 있었다.

돼지가 과거에 누렸던 삶과 소음, 세속적인 쾌락의

본거지를 회상하는 것은

그릇된 노력처럼, 촛점이 빗나간 것처럼 여겨졌다.

 

너무도 실제적인 일이었다. 돼지의 무게가

나를 압도했다―― 어떻게 그 놈을 옮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것을 토막내는 수고를 해야 하다니!

목에 있는 칼자국은 총공격이었지만 불쌍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나는 소란스런 시장 속을 달린 적이 있다

고양이보다 빠르고 날랜

기름 바른 새끼 돼지를 잡으려고,

그 깩깩거리는 소리는 금속을 찢는 듯했다.

 

돼지들은 뜨거운 피를 가졌음에 틀림없다, 놈들은 가마솥처럼 느껴진다.

놈들은 말보다 더 지독하게 물어뜯는다――

놈들은 반달모양으로 깨끗이 잘라낸다.

놈들은 재를, 죽은 고양이들을 먹는다.

 

이와 같은 특징이나 찬탄거리들은

이미 오래 전에 끝장이 났다.

나는 오랫동안 놈을 빤히 바라다보았다. 사람들이 그것을 끓는 물에 데치고

데쳐 현관계단처럼 박박 문질러 닦으려 했다.

 

 

 

수퇘지/공광규

 


양돈장에서 얻어온 삼겹살을 굽는데

헌 구두를 잘라 구운 가죽 맛이다

젖꼭지가 붙어 있는 걸 보니

누린내 나는 수퇘지 뱃가죽이다

 

"어머니,

맛대가리가 하나도 없어요."

"정을 너무 많이 넣은 돼지라 그려."

 

마당가에 나와 오줌을 누면서

뱃가죽을 자꾸 만져본다

가까운 날 무덤 속 미생물들은

내 뱃가죽이 질기다고 투덜거릴 것이다.

 

- 시집<소주병>(실천문학사)

 

 

돼지들/최영철

 


구제역 돼지들이 구덩이 속으로 꿀꿀거리며 들어가네

한판 놀아보라고 놀아보라고 파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네 꿀꿀거리며 코를 디밀고 온 세상은

넓어 너무 넓어 한판 걸판지게 놀아볼 자리가 아니었네

한판 걸판지게 놀아볼 세상이 엄마돼지 아빠돼지

다 먹어치웠네 뒤뚱거리며 끝없는 들길 코 박고

네 코는 주먹코, 내 코도 주먹코, 길 잃어버려 길에 쥐어박힌

내 코는 들창코 네 코도 들창코, 뒤뚱거리며 쫒아가다

구덩이 앞에서 널 놓쳐버렸네 구덩이 안에서 널 낳아버렸네

구제역을 까고 구제역을 기르며 꼬물꼬물 구제역을 내보내고

말았네 불룩한 돼지 무덤 네 엄마 불룩한 젖가슴

네 엄마 젖꼭지에 붙어 울고 있는 네 아빠

입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네 들어가고 말았네

 

-시집 <그림자 호수>(창작과비평)

 

 

트럭에 실려가는 돼지 / 김명인

 


얼갈이 무가 한창인 비탈밭 지나자

돼지를 가득 실은 트럭이 길을 막는다

나는 저 트럭을 따라간다, 삼십 분도 넘게

난생처음 우릴 벗어나 돼지들은

어디로 실려가는 것일까,

비자나무 줄지어 늘어선 구릉을 막 벗어나자

어깨를 끊어낸 산자락이 다시 직선으로 이어놓은

길, 죽음의 환한 저 끝,

돼지들은 명상에 잠긴 듯 반쯤

눈을 감고 트럭에 흔들리면서

서로의 엉덩이에 주둥일 들이밀고 연신

입을 우물거린다, 남겨진 모든 마지막까지

먹어치우려는 저 습관성,

하지만 탐식이란 더 이상 이어질 희망이

아니다, 영욕 끝에 비로소 도달한 자리에서

갑자기 내려선 뒤

식음 전폐하고 누워 있는 친구를 문병하고 돌아가는

나는, 누구에 의해 사육되어

이 길에 실려 있는 것일까,

이만큼 뒹굴고 살았으면 진창 속에서 내 생은

얼마나 오욕을 받아먹은 셈일까,

제 살던 우리에서 멀어질수록 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앞차를 앞지르지만

시야 가득히 열려오는 것은 죽음의

저 환한 길 끝,

 

 - 시집 <길의 침묵>(문학과지성사. 1999)

 

 


지리산 멧돼지/이원규

 


남원군 운봉리 지리산 기슭에

정종 개씨 산다 멧돼지에게 들이받혀

갈비뼈 세 대가 나갔지만

멧돼지들의 보모인 그에게서 배웠다

 

순종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순도 백퍼센트의 다이아가 깨지기 쉽듯이

새끼마저 물어죽인다는 사실을

집돼지 어미를 둔 순도 칠십오의 그들은

새끼 잘 키우고 육질도 연하므로

하산한 모든 멧돼지는 반종*이라는 사실을

 

함박눈 내리는 지리산의 밤

멧돼지 쓸개주를 마시다 한 수 배웠다

순결한 꽃은 어째서 일찍 시드는지

알콜 백의 술은 어째서 있을 수 없는지

오르가슴 백의 섹스는 어째서 복상사일 뿐이지

 


반종의 멧돼지처럼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반문해보지만

순도 백의 혁명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순결한 야인을 꿈꾸지만

그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란 것을

 

* 반종:튀기

 

-시집 <돌아보면 그가 있다>(창비)

 

 


냇가로 끌려간 돼지/김충규

 


냇가로 끌려가면서 돼지는 똥을 쌌다

제 주검을 눈치챈 돼지는

아직 익지 않은 똥을 수레 위에 무더기로 쌌다

콧김을 푹푹 내쉬며 꿀꿀거렸다

입가에는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늘은 창자처럼 붉었다

내일 있을 동네 잔치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돼지가 냇가에 도착했을 때

거기 먼저 도착해 있는 것은

숫돌을 갈고 있는 칼이 었다

칼이 시퍼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체념한 듯 돼지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에

씩 웃었다 그 순간, 쑥 들어오는 칼을

돼지의 멱은 더운 피로 어루만졌다

 

-시집<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문학동네)

 

 

 

돼지1-큰누님/김영산 

 


 망헐놈의 돼야지, 망헐놈의 돼야지 금시 싸움질이여------ 피범벅된 꼬리 물어뜯으러 우르르

몰리는 놈들 간짓대로 패 운동장 내모니 불콰 한 콧등 식식대며 흙덩이 마구 파헤치다,

 


 접붙이랴 새끼 받으랴 주사 놓으랴 사료 주랴 똥 치랴 어미돼지 씨돼지 고기돼지 젖돼지 흰 돼지

검은 돼지 붉은 돼지 꽥꽥 울어 쌓는 돼지막,

 


 돼지는 우리 동네 고막손 아버지들 적부터 돼지 짠해하는 큰 누님에 배어 콧구멍 벌렁대는 냄새

풍긴다

 


      - 시집 <벽화> (창비, 2004)

출처 : e 시인회의
글쓴이 : 제비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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